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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굴 속에서

기사승인 2017.11.12  14:5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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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굴 속에서
눅11:37-44
(2017/11/12, 창조절 11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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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바리새파 사람 하나가 자기 집에서 잡수시기를 청하니, 예수께서 들어가서 앉으셨다. 그런데 그 바리새파 사람은, 예수가 잡수시기 전에 먼저 손을 씻지 않으신 것을 보고, 이상히 여겼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셨다. “지금 너희 바리새파 사람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하게 하지만,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다. 어리석은 사람들아, 겉을 만드신 분이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그 속에 있는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해질 것이다. 너희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박하와 운향과 온갖 채소의 십일조는 바치면서, 정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소홀히 한다! 그런 것들도 반드시 행해야 하지만, 이런 것들도 소홀히 하지 않았어야 하였다. 너희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회당에서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 받기를 좋아한다!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드러나지 않게 만든 무덤과 같아서, 사람들이 그 위를 밟고 다니면서도, 그것이 무덤인지를 알지 못한다!”]

• 뜻밖의 초대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한 바리새파 사람이 예수님을 식사 자리에 초대했습니다. 예수님은 주저없이 그 초대에 응하셨습니다.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신약성경은 도처에서 예수님과 바리새파 사람의 대립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위선을 꾸짖으셨고,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 운동이 경건하지 않다고 비난했습니다. 우리 의식 속에서 예수님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물과 기름처럼 섞이기 어려운 존재로 여겨집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단절적이지 않습니다. 바리새파 사람이라고 다 위선적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바리새파는 주전 165년 경, 유대교의 갱신운동으로 등장하였습니다. 타락한 제사장들이 돈에 더하여 권력까지 탐하자, 경건주의 전통에 눈길을 주고 있던 이들이 모여 새롭게 시작한 운동이 바로 바리새파입니다. 제사장들의 활동 공간이 성전이었다면, 바리새파 사람들의 활동 공간은 회당이었습니다. 그들은 토라의 자구에 집착하는 제사장들에 맞서 시대에 맞게 율법이 재해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진보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남보다 더 큰 열정과 세심함으로 하나님을 섬기려 했던 자기들의 태도를 자랑스럽게 여기면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자기들과 다른 방식으로 사는 사람들을 비웃거나 가르치려 들었습니다. 교회생활에 열중하는 이들이 흔히 빠지기 쉬운 영적인 오만함입니다. 그들은 순수하게 하나님께 집중하며 살기보다는 자기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을 더 의식하며 살았습니다. 자기의 경건함을 과시하려는 유혹에 빠졌다는 말입니다. 누가복음 18장에서 주님은 스스로 의롭다고 확신하고 남을 멸시하는 사람들을 향해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바리새인과 세리가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세리는 가슴을 치며 회개하지만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는, 남의 것을 빼앗는 자나, 불의한 자나, 간음하는 자와 같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으며, 더구나 이 세리와는 같지 않습니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내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눅18:11-12)

이건 사실은 기도가 아니라 과시입니다. 미국의 사상가인 리 호이나키는 “순수한 기도는 나에게서 자아를 가져가고 그 대신 타인을 가져다준다”(리 호이나키, <아미쿠스 모르티스>, p.298)고 말합니다. 두 번씩이나 등장하는 ‘나는’이라는 단어와 ‘아무개와 같지 않다‘는 구절이 참 듣기에 민망합니다. 남들과 다르다는 이 오만한 자부심이 실은 죄의 무게입니다. 주님은 그런 태도를 못마땅하게 여기십니다. 저라면 내가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의 초대에 응할 것 같지 않습니다. 괜히 불편한 자리에 앉았다가 체하기라도 하면 어떻게 합니까. 하지만 주님은 우리와 다릅니다. 지레 선입견을 가지고 사람을 대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은 으레 그럴 거야‘라는 편견이 소통을 가로막을 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 관습적 사고의 위험
그 바리새파 사람은 왜 주님을 자기 집에 초대한 것일까요? 뭔가 음모를 꾸미거나, 비난할 꼬투리를 잡기 위해서일까요? 적어도 지금의 본문으로는 그런 판단을 하기 어렵습니다. 그동안 그는 예수 운동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조금 더 친밀한 상황에서 예수님과 대면하고 싶었던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이건 다 가정일 뿐입니다. 예수 운동과 사사건건 대립하고 있던 동료들로부터 비난을 받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예수님을 초대했다는 사실을 저는 긍정적으로 보고 싶습니다.

논어 술이편(21장)에 나오는 이야기를 들어보셨을 겁니다. “세 사람이 함께 길을 가다보면 그중에 반드시 내 스승이 있어. 그의 장점을 통해서는 내가 본받을 것을 배우고, 단점을 통해서는 내가 고쳐야 할 부분을 배우는 거지.“(三人行, 必有我師焉, 擇其善者而從之, 其不善者改之 [공자, <군자를 버린 논어>, 임자헌 옮김, 루페, p.125]) 배우려는 사람은 누구에게라도 배울 수 있습니다. 일단 이 바리새파 사람은 배움의 열정을 가진 사람으로 인정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 집에 들어와 식탁 앞에 앉으신 예수를 의혹에 찬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손을 씻지 않고 식탁에 앉으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관습에 위배되는 일이었습니다. 정결법을 금과옥조로 여기는 이들로서는 용납하기 어려운 태도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슬림들이나 정통파 유대인들은 지금도 모스크나 신성한 장소에 들어가기 전에 몸을 정결하게 닦습니다. 형식적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저는 그런 의례는 참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예배당에 들어오는 우리들은 어떠합니까? 그런 조심스러움, 경외하는 태도가 있습니까? 형식을 함부로 무시하면 내용도 얼크러지게 마련입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씻고 식탁에 앉으셨더라면 좋았겠습니다. 위생상으로도 그게 나으니까요. 그러나 의도적으로 그러신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주님은 손을 씻지 않으셨고, 바리새파 사람은 그것을 불편하게 여겼습니다. 그의 머리 속에서 어떤 판단의 회로가 작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람은 진짜 경건한 사람이 아니구나.’ 어쩌면 그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판단입니다. 그는 그렇게 배워왔고, 또 그렇게 판단하며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16세기 영국의 철학자인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561-1626)은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는 네 개의 우상에 대해 말한 바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동굴의 우상’입니다. 기존의 생각이나 태도에 고착되어 진실을 보지 못하는 것을 이르는 말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좋은 예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기준에서 벗어난 사람들을 용납하기 어려웠습니다. 인습적 사고에 길들여진 결과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런 전통에 매이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이 전통을 무시했다는 말이 아니라, 그 전통을 낳게 한 원천에 늘 마음이 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식사 전에 손을 씻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곧 경건생활의 핵심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리새파 사람은 그 한 가지 기준을 위배하였다고 하여 한 존재를 자기 방식대로 판단하여 버립니다. 이것처럼 위험한 일이 없습니다. 주님은 그런 바리새파 사람을 꾸짖으십니다.

“지금 너희 바리새파 사람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하게 하지만,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다.“(39)

다소 뜬금없는 질책처럼 보이지만 이건 참 중요합니다. 율법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에 당도하지 못한 이들일수록 문자에 집착합니다. 오죽하면 바울 사도가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영은 사람을 살립니다”(고후3:6b)라고 말했겠습니까? 주님의 말씀을 들은 그 바리새파 사람은 무척당혹스러웠을 겁니다. 그러나 주님은 적당한 선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 죽비처럼
초대받은 사람이 초대해준 사람에게 덕담을 건네는 게 보통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적당히 엉너리치면서 그의 귀를 간지럽힐 생각이 없으신 것 같습니다. 이게 어쩌면 그분의 사랑법인지도 모릅니다. 죽비처럼 영혼을 내리쳐 몽롱한 생각과 편견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어쩌면 제일 좋은 선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팔레스타인 출신의 사상가인 에드워드 사이드는 <지식인의 표상>이라는 책에서 “당신이 당신의 후원자를 계속 의식한다면 지식인으로서 사고할 수 없으며, 그저 신봉자나 시종으로서 사고할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이 대목을 읽을 때 즉시 ‘지식인’의 자리에 ‘설교자’라는 말을 대입해보았습니다. 이 땅의 수많은 설교자들은 이 말을 아프게 새겨야 합니다. 회중석에 앉아있는 유력한 누군가를 의식하며 설교한다면 그는 참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제1성서에 등장하는 거짓 예언자들은 늘 왕이 듣기 원하는 이야기를 전하곤 했습니다. 그들의 말은 달콤했지만 생명을 낳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한 사회를 위험에 빠뜨렸습니다. 참 예언자들은 자기들이 전한 말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그 말을 제멋대로 변개할 수 없었습니다. 예언자들의 운명이 고난 속은 순교인 것은 그 때문입니다. 예레미야의 증언이 가슴 저릿합니다.

“내가 입을 열 때마다 ’폭력’을 고발하고 ‘파멸’을 외치니, 주님의 말씀 때문에, 나는 날마다 치욕과 모욕거리가 됩니다. ‘이제는 주님을 말하지 않겠다. 다시는 주님의 이름으로 외치지 않겠다’ 하고 결심하여 보지만 그 때마다, 주님의 말씀이 나의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 뼛속에까지 타들어가니, 나는 견디다 못해 그만 항복하고 맙니다.”(렘20:8-9)

예언자들은 이런 의미에서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일상적인 삶, 안온한 삶을 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백성들을 지켜내는 보루들입니다. 고통 받는 이들을 대하실 때 예수님의 언어는 부드럽고 따뜻하지만, 스스로 의로운 줄 알고 사는 사람들을 대하실 때는 거칠어집니다. 주님은 무골호인 류의 현자가 아닙니다. 시장통과 거리, 그리고 거친 사내들이 가쁜 숨을 몰아쉬는 노동의 현장 한복판에 들어가신 분입니다. 그렇기에 주님의 언어는 거침이 없습니다. 손익을 따지는 일은 그분의 성품이 아닙니다.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다’, ‘그 속에 있는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래야 너희가 깨끗해지지 않겠느냐?‘ 진짜 깨끗함은 손을 닦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가득한 탐욕을 물리치고, 지금 함께 있는 사람들을 인애의 마음으로 대하고, 그의 필요에 응답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 화가 있다, 너희 바리새인들아
42절부터 44절은 바리새인들에 대한 준엄한 질책입니다. 마치 환자의 환부를 도려내는 외과의사의 칼처럼 주님의 말씀은 예리합니다. 몰아칠 때는 몰아쳐야 하는 법입니다.

“너희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박하와 운향과 온갖 채소의 십일조는 바치면서, 정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소홀히 한다! 그런 것들도 반드시 행해야 하지만, 이런 것들도 소홀히 하지 않았어야 하였다.“(42)

‘화가 있다’는 말이 우렁우렁 우리 가슴에 여울져옵니다. 화가 확정되었다는 말이라기보다는 지금의 태도를 지속하는 한 그 삶 자체가 화라는 말일 겁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겉보기에는 경건해 보입니다. 박하와 운향과 온갖 채소의 십일조를 정확히 바치기 위해 애씁니다. 조금이라도 어기면 큰일이 날 것처럼 그들은 그 일에 집중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기들의 경건의 증거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더 중요한 것을 소홀히 했습니다. ‘정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 말입니다. 본과 말의 뒤집힘입니다. 손익 계산이 정의의 원리를 압도할 때 세상은 전장이 되고 맙니다. 힘없는 이들이 늘 당하는 구조는 그 자체로 죄입니다. 모름지기 하나님을 믿는 이들은 우리 역사를 정의와 공의의 원리 위에 세우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한국의 개신교도들의 신앙은 지나칠 정도로 개인화되어 있습니다. 공적인 일에 무관심하다는 말입니다. 오히려 공적인 문제에 대해 발언을 하면 비신앙적이라고 공격하기까지 합니다. 교회는 오직 영혼 구원에 치중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처럼 반성경적인 말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무너지고 있는 데도 침묵하고 있다면 돌들이 일어나 소리를 칠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어떤 것일까요? 누군가를 사랑해본 이들은 알 것입니다. 그들은 사랑하는 이가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차리기 위해 노심초사합니다. 그리고 그 일을 이루기 위해 애씁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여쭤야 하고, 주님의 마음이 있는 곳에 우리 마음도 머물러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사랑한다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 말하면서도 실상은 자기만 사랑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스스로 속고 있는 겁니다. 그런 태도 자체가 화입니다. 믿음의 길은 자기 부정의 길입니다. 믿음이 깊어갈수록 자기를 높이려는 부끄러운 태도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주님은 자아의 노예살이를 하고 있는 바리새인들의 아픈 곳을 지적하십니다.

“너희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회당에서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 받기를 좋아한다!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드러나지 않게 만든 무덤과 같아서, 사람들이 그 위를 밟고 다니면서도, 그것이 무덤인지를 알지 못한다!“(43-44)

높은 자리에 앉기를 바라는 마음, 누군가에게 인사를 받는 자리에 서려는 욕망이야말로 사탄이 틈입하는 통로입니다. 세상의 모든 싸움은 자기를 높이려는 마음들이 충돌하면서 빚어집니다. 겸허하게 자기를 낮추는 이들, 비굴하게 굴종하는 것은 아니지만 스스로 종이 되는 자유를 선택한 사람이 있는 곳에는 평화가 깃듭니다. 사탄은 사람들로 하여금 장벽을 쌓아올리도록 우리를 부추깁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장벽들을 허물라 명하십니다. 사탄은 불통을 조장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만날 수 없던 사람들이 만나 소통하도록 만드십니다.

주님이 바리새인들의 위선과 위험을 준엄하게 꾸짖으신 현장은 바로 바리새파 사람의 집이었습니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서 호랑이를 꾸짖은 격입니다. 그 사건 이후 그 바리새파 사람에게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가르침이 그의 가슴에 새로운 생명의 씨앗이 되지 않았을까요? 입에 발린 소리를 해서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있지만, 그런 말로 생명을 탄생시킬 수는 없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을 향한 주님의 말씀은 날카로운 듯 보이지만, 그 말씀은 생명을 낳는 말씀이었습니다. 그 말씀을 가슴에 모셔야 합니다. 그 말씀의 거울에 우리 삶을 비춰보아야 합니다. 부끄러운 생각과 행실을 버리고, 주님의 마음을 꼭 붙들어야 합니다. 낙엽이 지면서 모든 것이 돌아갈 곳으로 돌아가는 이 계절에, 세상에 팔렸던 우리의 마음을 거두어 주님 앞에 바칠 수 있기를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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