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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의‘라는 질병

기사승인 2018.01.07  00:2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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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이야기를 해야 하는 마당에 느닷없이 그리스 신화로 시작함을 양해해주십시오. 신화라고 번역되는 ‘뮈토스‘는 사실 단순히 ‘이야기‘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이야기를 참 좋아합니다. 이야기는 사람을 만들고, 사람은 또 다른 이야기를 낳습니다. 지금의 나는 따지고 보면 지금까지 들어왔던 이야기가 체화된 존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이야기를 듣고 사느냐가 곧 우리 인생의 길을 결정할 수도 있습니다. 널리 회자되고 있는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Alasdair MacIntyre)의 말이 참 크게 다가옵니다. 그는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나는 어떤 이야기, 혹은 어떤 이야기들의 일부로 존재하는가?’라는 보다 앞선 질문이 해명될 때에만 비로소 대답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신화는 신들의 이야기이지만 실은 이상화된 인간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신화 속의 신들은 인간이 도달하기를 바라는 가장 높은 ‘아레테’(arete), 곧 탁월함을 구현한 인물들의 상징이거나, 인간이 도달하기 어려운 압도적인 힘 혹은 능력을 의인화한 존재입니다. 따라서 신화에 주목하는 것은 거짓 신들을 비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욕망과 두려움을 이해하기 위한 방편입니다. 신화는 신들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영웅들의 이야기도 내포합니다. 신들의 세계와 영웅의 세계 사이의 경계가 불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잠시 테세우스라는 영웅의 이야기에 주목하려고 합니다. 그의 아버지 아이게우스는 아테나이의 왕입니다. 아들을 얻고 싶어 델포이 신전에 올라갔다가 “그대가 왕 노릇 하는 땅에 이르기까지는 술 항아리 마개를 열지 말라. 불연(不然)이면 아이게우스의 아들을 보리라”1)는 신탁과 접합니다. 아들을 얻으리라는 신탁을 얻은 그는 흥을 이기지 못해 트로이젠 왕인 피테우스와 더불어 질펀한 술 잔치를 벌입니다. 그리고 쓰러져 잠이 듭니다. 피테우스는 해신의 포세이돈의 아이를 잉태한 딸 아이트라 공주를 슬그머니 그의 발치에 밀어넣습니다. 잠에서 깨어난 피테우스는 당황했지만 아이트라에게 아들을 얻게 되면 자기에게 보내라면서, 신표 둘을 객사의 댓돌 아래 숨겨둡니다. 칼 한 자루와 갖신 한 켤레였습니다. 그 댓돌은 장사 서넛이 힘을 합쳐도 들어 올릴 수 없겠지만 아이게우스의 아들이라면 능히 찾을 수 있을 거라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아이게우스와 아이트라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바로 테세우스입니다. 어릴 때부터 영웅의 면모를 보였다고 합니다. 마침내 그가 열여섯 살이 되었을 때, 그는 어머니의 말에 따라 댓돌을 들어올리고 아버지의 신표를 찾았습니다. 아버지의 칼을 옆구리에 차고, 아버지의 갖신을 신고 그는 아버지를 찾아 길을 떠납니다. 집을 떠나고, 시련을 이겨내는 것이야말로 모든 영웅신화에 등장하는 보편적인 요소입니다. 사람들이 영웅 이야기에 그렇게도 집착하는 까닭은 그들의 이야기를 내면화함으로 우리 인생길에서 만나는 수많은 난관을 돌파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조금 납작해졌다고는 해도 사람들의 가슴에는 영웅적 상승 의지가 깃들어 있습니다. 

성경 이야기도 크게 다를 바 없습니다.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났던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그렇고, 출애굽 공동체 이야기도 그러합니다. 그들의 신산스러운 삶의 이야기를 읽고 들으며 사람들은, 시련의 풍랑에 속절없이 떠밀리던 자기 삶의 자세를 바로잡게 됩니다. 다시 테세우스의 이야기를 이어가겠습니다. 테세우스는 여섯 가지의 시련을 겪어냅니다. 한결같이 사람을 괴롭히고 죽이는 무도한 자들과 맞서는 일이었습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만난 괴인은 프로크루스테스입니다. 아테나이로 들어가는 길목에 주막을 차려놓고는 나그네들을 죽이는 괴물이었습니다. 그의 집에는 철침대가 하나 있었는데, 나그네들을 그 침대에 눕혀 놓고는 쇠메로 그 몸을 두들겨서 죽이곤 했습니다. 프로크루스테스는 ‘두들겨서 펴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의 본명인 다마스테스는 ‘정복자’라는 뜻과 아울러 ‘쇠메’라는 뜻도 있다고 합니다. 그의 침대 혹은 모루 위에 눕혀진 사람은 누구나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은 신화 속의 이야기이지만 우리 현실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우리들 속에도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기준에 따라 다른 사람들을 평가하고 재단합니다. 세상 어디에도 내 기준에 딱 부합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 사람은 이래서 문제고, 저 사람은 저래서 문제라고 비평합니다. 저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를 ‘스스로 기준이 되려는 욕망’이라고 번역하고 싶습니다. 여기서 잠깐 에덴 동산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인류의 첫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시고, 땅을 경작하고 지키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를 신신당부하셨습니다.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2:16-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가 무엇인지 굳이 특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그 나무 열매가 ‘선악을 알게‘ 한다는 말에 주목해야 합니다. 나중에 유혹자 뱀은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라”(창3:5)고 말합니다. 

인간의 타락 사건을 전락이 아닌 성숙, 곧 도덕적 주체의 탄생으로 보는 철학자들도 있기는 합니다. 이것도 깊이 생각해볼 주제입니다. 하지만 저는 선악과를 따먹은 이들 속에 잠재된 욕망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욕망 말입니다. 이것은 경계를 넘는 일입니다. 선악을 판단하는 것은 도덕적 주체의 마땅한 책임이지만 모든 것이 착종되어 있는 세상에서 선과 악을 가른다는 것은 그렇게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지금은 선으로 여겨지는 것이 나중에는 악으로 판명날 수도 있고, 그 반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선한 뜻으로 한 일이 누군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겨주기도 합니다. 인생이 조심스러운 것은 그 때문입니다. 선악에 대한 궁극적인 판단은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유한성 속에 갇힌 인간이 궁극적 판단의 주체가 되려는 것 자체가 타자에 대한 지배의 욕망이 아닐까요? 

예수님도 비유를 통해 이런 현실을 지적하신 적이 있습니다. 밀밭에 자란 가라지 비유(마13:24-30) 말입니다. 일꾼들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하고 묻자 주인은 그냥 내버려두라고 말합니다.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뿌리가 서로 얽혀 있는지도 모르니까요. 그렇다면 사람은 아예 선악을 판단하면 안 된다는 말일까요? 물론 그렇지는 않습니다. 명백한 악을 보고도 모른 체 한다면 세상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제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선악을 판단하되, 내가 그릇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은 항상 열어두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내 입장, 내 생각, 내 지식, 내 경험을 판단의 척도로 삼을 때 ‘나’는 타자의 생명을 일그러뜨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회에 암 수술을 받아 목소리를 잃은 교인이 있습니다. 치열한 노력 끝에 완치 판정을 받았지만 목소리를 되돌릴 수는 없었습니다. 그분은 예배당에 들어오면 장의자 끝에 앉은 분의 어깨를 툭툭 치며 안으로 들어가달라는 몸짓을 합니다. 사정을 아는 분들이야 그 행동을 이해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분들은 그분의 행동을 몹시 불쾌하게 받아들입니다. 심지어 그분은 자리에 앉아서 찬송도 부르지 않으니 더 그렇겠지요? 사람들은 어떤 자극도 자기 방식을 받아들이는 일에 익숙합니다. 선과 악, 그것을 일도양단식으로 가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종교인들일수록 나는 옳고 다른 이들은 그릇되었다는 오류에 빠져들 가능성이 큽니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바리새인과 세리입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눅18:11-12). 우리 속에 형성된 바리새인에 대한 편견을 일단 내려놓고, 이 기도의 언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보세요. 이 바리새인은 참 경건한 사람입니다. ‘토색(討索)’의 사전적 정의는 “돈이나 물품을 억지로 달라고 함“(동아 새국어사전)입니다. 토색질은 그러니까 자기가 가지고 있는 힘이나 지위를 이용해서 상대적으로 약한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서 뭔가를 강탈하는 행위입니다. 이 바리새인은 적어도 토색질로 부를 쌓은 사람은 아닙니다. 불의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정의나 공의를 왜곡하거나 무시하는 행위입니다. 그는 이런 일을 멀리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또 그는 간음을 하지 않았습니다. 충동적인 욕망을 제어하며 신실하게 살려고 노력했다는 말이겠지요? 그의 기도 속에서 토색, 불의, 간음하는 이들에 대한 혐오와 멸시를 읽는다면 너무 과민한 반응일까요? 

칼 구스타프 융은 우리 의식이 억압하여 형성된 무의식의 열등한 인격 혹은 자아의 어두운 면을 ‘그림자(shadow)‘라고 명명했습니다. 누구에게나 자기를 세상의 중심에 놓으려는 욕망이 있습니다. 다만 그런 욕구를 조정하거나 완화하면서 살 뿐입니다. 그런데 뻔뻔하게도 그런 욕망을 한껏 표출하며 사는 이들을 보면 사람들은 불쾌감을 느끼거나 분노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자기들 속에 있는 그림자가 그에게 투사된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지나치게 도덕적인 체 하는 사람일수록 그림자가 짙은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굳이 이 바리새인이 자기 그림자에 갇힌 사람이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타자와 자기를 비교하면서 자기가 도덕적으로 우위에 있음을 강변하고 싶어하는 그의 마음이 딱할 뿐입니다. 그는 그 성전의 외딴 곳에서 기도를 하고 있던 세리를 노골적으로 거명하면서 그와 같지 않은 것을 감사한다고 말합니다. 나는 남과 다르다는 생각이 그의 삶을 지탱해주는 닻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자기 삶을 남들과의 차이 혹은 차별을 통해 긍정하려는 이들이 많습니다. 소비사회의 특징은 바로 ‘차이 만들기‘와 관련됩니다. 현대인들은 물건의 사용가치보다는 교환가치에 더욱 주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남들이 하기 어려운 소비생활을 누림으로 자기 존재가치를 높이고 싶어합니다. 상징의 소비, 이미지의 소비야말로 현대인들을 현혹하는 세이렌의 노래입니다.

바리새인의 기도는 노골적인 자기 자랑으로 이어집니다. 그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을 하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친다고 말합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좋은 신자임이 분명합니다. 금식은 유대인들의 경건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음식을 끊는다는 것, 그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를 차단하는 일이니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지속적인 훈련과 의지가 필요합니다. 십일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도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철저했는지를 잘 아셨습니다. 그래서 박하와 근채와 회향의 십일조를 바치는 그들의 행위를 언급하신 바 있습니다. 문제는 금식과 십일조가 그들을 더 나은 존재가 되도록 하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제2이사야는 금식하면서 논쟁하고 다투고 주먹으로 상대를 치는 현실을 보면서 진정한 금식이 무엇인지를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사58:6-7)

금식은 음식을 끊는 것만이 아니라, 자기중심성을 끊는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고통 받는 이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들의 구체적인 필요에 응답하고, 그들의 삶에 연루되기를 꺼리지 않는 것이 진정한 금식이라는 것입니다. 비유에 등장하는 바리새인의 금식에는 이런 따뜻함 혹은 슬픔의 공감이 배어있지 않습니다. 오직 구별에의 욕망만 번득입니다. 불교의 용어를 빌어 말하자면 이런 금식은 아만(我慢)과 아상(我相)을 강화해주는 기제로 작동할 뿐입니다. 금식이 오히려 그의 존재의 진전에 장애물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나는 남과 다르다는 생각에 빠지면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나와 너를 가르는 장벽을 쌓기 시작합니다. 장벽이 높을수록 장벽 너머의 세상은 상상 속에서만 재구성되기 마련입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두려워합니다. 미지의 세계를 우리는 잠재적인 적대감의 공간으로 상상합니다. 그렇기에 장벽 너머 세계에 속한 사람들은 위험한 사람, 더러운 사람으로 치부됩니다. 소통의 단절은 이처럼 세상을 적대적인 공간으로 인식하도록 만듭니다. 종교의 가장 큰 위험이 여기에 있습니다.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는 확신처럼 위험한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경건의 외양을 하고 있는 이가 실은 세상을 위험한 곳으로 만들 수도 있다는 사실이 두렵게 느껴집니다.

이제 세리의 기도를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그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말합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18:13). 윤동주의 그 유명한 ‘서시‘가 떠오릅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한 점 부끄럼 없기를/잎새에 이는 바람에도/나는 괴로워했다.”는 구절로 시작됩니다. 예민한 감성을 지난 식민지 청년의 아픔이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한다는 말을 시적인 과장으로 보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바란다는 이 구절은 실은 맹자에 나오는 말로 군자삼락 가운데 하나입니다. 부모가 구존하여 계시고 형제가 무고한 것, 천하의 인재를 얻어 교육을 시키는 일, 그리고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고 구푸려 사람에게 부끄러움이 없는 것(仰不愧於天 俯不怍於人)이 군자가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단어 하나 혹은 문장 하나가 우리 삶의 길을 밝히는 불빛이 될 때가 있습니다. 윤동주에게는 바로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다‘는 구절이 그러한 것 같습니다. 시인답게 그는 ‘한 점’이라는 단어를 추가함으로 자신의 결연한 태도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비유에 등장하는 세리는 감히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합니다. 떳떳한 삶을 살지 못했다는 자책 때문일 겁니다. 그가 어떻게 유대인들이 멸시하는 세리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로마의 식민지로 전락한 이스라엘 사람들을 괴롭힌 건 이방인의 지배를 받는다는 사실에서 비롯되는 민족적 굴욕감만이 아니었습니다. 자기들을 지켜줄 힘이 없어 보이는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상실감 또한 컸을 겁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들을 괴롭힌 것은 가혹한 수탈이었습니다. 로마는 관료들을 보내 식민지 백성들로부터 무거운 세금을 거둬갔습니다. 토지세와 인두세는 산헤드린에 위탁해서 징수했고, 통행세와 관세는 세리들을 통해 거두었습니다. 로마는 입찰을 통해 최고액을 제시한 세리장들에게 관할지역의 징수를 맡겼습니다. 누가복음 19장에 등장하는 삭개오가 그 한 예입니다. 세리장은 세리들(telones)을 고용하여 도로, 강, 성문 곁에서 통행세와 관세를 거뒀습니다. 법적 관세율은 2.5%에 불과했지만 규정대로 시행되는 경우는 많지 않았습니다. 입찰을 받기 위해 많은 금액을 써낸 세리장들은 자기들의 이익까지 확보해야 했기에 세리들을 통해 터무니없이 많은 세금을 거두었습니다. 그들은 허락받은 강도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회개하라는 외침을 듣고 나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묻는 세리들에게 세례자 요한은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눅3:13)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세리들의 늑탈이 얼마나 심했는지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로마에 내는 세금 외에도 각종 종교세 납부의 의무를 지고 있었습니다. 첫 열매 세금, 제사장과 레위인들의 생계를 위해 바치는 십일조, 다양한 목적으로 사용되는 십일조, 성전세 등 종교세 부담만으로도 그들의 허리가 휠 정도였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성전은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있었습니다. 일종의 중앙은행 구실을 할 정도였습니다. 외경인 마카베오기 하권에 보면 베냐민 지파 출신으로 성전 관리 책임자였던 시몬이 도성의 운영과 관련하여 대사제와 의견 충돌이 벌어지자, 그는 당시 시리아와 페니키아의 총독이던 아폴로니우스에게 가서 예루살렘의 금고에는 엄청나게 많은 돈이 있어 그 액수를 헤아릴 수 없는데, 그 돈은 희생 제물에 드는 비용이 아니기에 임금의 권한 아래 둘 수 있다고 말합니다. 아폴로니우스는 임금에게 가서 그 소식을 전했고, 임금은 행정관인 헬리오도로스를 보내 그 돈을 가져오라고 명령합니다. 돈의 행방을 묻는 그 관료에게 대사제는 “금고의 돈이 일부는 과부와 고아들을 위한 기금이고, 일부는 토비야의 아들로서 높은 지위에 있는 히르카노스의 기금”이라면서, “그 돈은 다해서 은 사백 탈렌트와 금 이백 탈렌트밖에 안 된다”(마카베오기 하3:10-12)고 말합니다. 사실 이 돈은 막대합니다. 이야기의 귀추와 관계없이 제가 주목하는 것은 ‘히르카노스의 기금’이라고 명명된 돈입니다. 그것이 어떤 용도로 사용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수탈이나 약탈로부터 자기 재산을 지켜내기 우해 성전에 위탁해 놓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성전에는 이래저래 돈이 많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가리켜 강도의 굴혈이라 하셨던 것은 이런 상황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종교를 이용해 막대한 돈을 벌어들이는 현실에 분노하셨던 것입니다. 성전 체제는 식민지 당국에 세금을 뜯기고는, 먹고 살 길이 막막해 종교세를 내지 못하는 이들에게 ‘부정한 자‘ 혹은 ‘죄인’이라는 낙인을 찍었습니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세리가 사람들의 증오의 표적이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그런 증오를 무릅쓰고 세리가 되었던 것일까요? 돈 욕심 때문이라고 말하면 간편하긴 하지만, 세상이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습니다. 핑계 없는 무덤은 없다는 말도 있습니다만 저마다 사정이 있었겠지요. 일전에 동일본 대지진과 해일로 수많은 목숨이 사라졌을 때 일본의 어느 작가는 이 사건을 두고 수많은 사람이 죽은 단일한 사건이 아니라, 수 만 명의 개별적인 사람이 죽은 수 만 개의 사건이라고 말했습니다. 똑같은 사건을 보아도 보는 각도에 따라 사건의 의미가 전혀 다르게 보입니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는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2)는 말로 시작됩니다. 세리가 세리를 직업으로 선택하게 된 사연도 다양할 겁니다. 비유 속에 등장하는 세리는 자기의 처지를 한탄합니다. 세리로 살아가는 삶이 부끄러운 겁니다. 그래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한 채 자기 가슴을 북처럼 두드립니다. 그가 하는 말은 단순합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동방교회가 전승해온 예수 기도(Jesus prayer)와 거의 유사합니다. 그 기도 이후에 그의 삶이 새로워졌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기도를 제대로 드린다면 이전의 생활을 지속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요. 의문이 남기는 하지만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세리 가운데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으로 돌아간 것은 세리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어 이야기를 이렇게 마무리합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눅18:14b).

이쯤 되면 이 비유에 대해서 다 말한 것인가요? 조금 발칙하지만 저는 이의를 제기하고 싶습니다. 사실 우리에게 상처를 주는 것은 비유 속의 바리새인처럼 노골적으로 자기 의를 드러내는 이들이 아닙니다. 그들의 정직한 자기 노출은 오히려 측은한 느낌을 자아냅니다. 문제는 가장 겸손의 외양을 하고 있지만 내심으로는 자기 의에 사로잡힌 사람들입니다. 제가 교회에 처음 나갔을 때 견딜 수 없었던 것은 연세 지긋하신 어른들의 태도였습니다. 교우들을 대표해서 기도할 때 그들이 사용하던 상투어가 제게 반발심을 불러일으키곤 했습니다. “버러지만도 못한 이 죄인을 용서해 주십시오”, “주홍빛보다 더 붉은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그런 기도 자체를 부정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기도하시는 분들이 일상생활에서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신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 위에 군림하려 했고, 함부로 가르치려 했습니다. 그들은 ‘버러지’가 아니었습니다. 젊고 경험도 부족한 사람들이 버러지였을 뿐입니다. 쇠렌 키르케고르도 이런 불유쾌한 상황에 자주 맞닥뜨렸던 모양입니다. 그는 이 비유를 해석하면서 세상에는 세리를 본받으면서도 바리새인과 같은 위선자가 있다고 말합니다. 

“거만하게 따로 선 바리새인과는 달리 위선적으로 멀리서, 거만하게 하늘을 우러러 본 바리새인과는 달리 위선적으로 눈을 내리깔며, 거만하게 자기의 의로움을 감사한 바리새인과는 달리 위선적으로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고 탄식하는 위선자가 있는 것입니다.”3)

스스로 의롭다 여기는 이들은 위선의 가면 바꾸는 법을 배움으로 점점 더 악해집니다. 직업적인 종교인들만 여기에 해당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신앙생활에 익숙해져 더 이상 순례자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지 못하는 이들은 이런 위장을 통해서라도 자기를 합리화하고 싶어합니다. 말은 공손하지만 그 속에 비수를 감추고 있는 이들이 있습니다. 한껏 자기를 낮추는 듯 하지만 실은 다른 이들을 깔보는 이들이 있습니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 <이별의 왈츠>에 나오는 미국 사업가 바르틀레프는 자기 속에 있는 욕망을 도덕주의의 외투 속에 숨기고 있는 세태를 비꼬며 이런 말을 합니다. 

“오래 전 한 시닉파 철학자가 코트를 입고 모두들 자기의 인습에 대한 경멸을 찬양하리라는 희망 속에 아테네 주위를 자랑스레 배회했지요. 소크라테스가 그를 만났을 때 이렇게 말했지요. ‘당신 코트의 구멍을 통해 저는 당신의 자만심을 봅니다. 선생, 당신의 그 더러움 또한 방종이요, 당신의 방종은 더러움이에요’라고.“4)

검소의 상징인 낡은 옷이 오히려 자아를 강화하는 기제로 사용될 수도 있습니다. 인습적인 삶에 동화되기를 거부하는 자신이 스스로 자랑스러워 우쭐거리는 허릅숭이들이 참 많습니다. 나의 옳음에 대한 지나친 확신으로 인해 늘 타자들을 시정해주려는 태도로 일관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미국 교사들의 교사라는 칭호를 얻은 파커 파머는 자기의 신념을 적들에게 ‘돌’처럼 던지는 일의 무망함을 지적합니다. 그는 나의 옳음을 제시하며 다른 이들을 동화시키려 하기보다는 오히려 상대방이 처해 있는 고통의 근원에 다가서는 것이 깊은 소통을 가능케 한다고 말합니다.5) 뚜렷한 소신을 갖고 사는 것을 나무라는 것은 아닙니다. 주체성 없이 흔들리는 것이 오히려 문제입니다. 문제는 그 소신이 타자에게 폭력적인 방식으로 작동할 때 발생합니다. 정치인들 가운데는 자기 옳음에 대한 확신으로 인해 현실 적응력이 떨어지는 결정을 내리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사회학자인 막스 베버는 신념의 윤리와 책임 윤리를 구분합니다. 신념 윤리가는 의도의 선함을 강조합니다. 책임 윤리가는 결과에 대한 신중한 판단을 중시합니다. 둘의 차이가 명백하게 드러나는 것은 행위의 결과가 드러났을 때입니다.

“순수한 신념에서 나온 행위의 결과가 나쁠 경우, 신념 윤리가는 그것이 자신의 책임이 아니라 세상의 책임이며 타인들의 어리석음에 그 책임이 있다거나 또는 인간을 어리석게 창조한 신의 책임으로 본다. 그에 반해 책임 윤리가는 인간의 평균적 결함을 고려한다.……인간의 선의와 완전성을 전제한 어떠한 권리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 자신의 행동의 결과를 다른 사람에게 뒤집어씌울 수가 없다고 믿는다.”6)

신념을 버리자는 말이 아닙니다. 자기 신념으로 다른 사람을 함부로 재단하지 말자는 말입니다. 자기 확신이 지나치게 강한 사람일수록 타자들을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비유 속에 등장하는 바리새인은 딱한 사람입니다. 그는 ‘거룩’이라는 경계 혹은 장벽 너머의 세계와 소통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평범한 행복을 꿈꾸지만 언제부터인가부터 길에서 벗어나 자책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람의 아픔을 헤아리지 못합니다. 저만치 떨어진 채 가슴을 치고 있는 세리의 가슴에도 따뜻한 피가 흐르고 있고, 누군가의 인정을 구하는 마음이 있다는 사실을 외면합니다. 장벽 너머, 경계 너머를 상상할 줄 아는 능력이 사라질 때 우리는 자기 틀 안에 갇힌 수인이 됩니다. 아니, 상상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때로는 경계를 넘어서거나 장벽 너머로 발걸음을 옮겨야 합니다. 바리새인이 일체의 판단을 배제한 채 세리에게 말을 건넸더라면 어땠을까요? 그의 내밀한 삶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더라면 그에 대한 판단이 달라졌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 삶의 이야기를 써가는 ‘저자(author)‘입니다. 물론 어느 누구도 홀로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를 듣고 참조하며 자기가 가야 할 길을 가늠해보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이 써가는 삶의 이야기를 무가치하다고 판단할 권한을 위임받은 사람은 없습니다. 단절적이고, 뒤죽박죽이고, 지향조차 없는 이야기처럼 보여도 한 존재가 몸으로 써가는 삶의 이야기를 함부로 부정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를 도드라지게 드러내려고 타자의 삶을 짓뭉개는 일은 허용될 수 없습니다. 

우리 속에는 바리새인도 있고 세리도 있습니다. 아파하며 긍휼히 여기며 사는 법을 배울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윤동주는 부끄러움과 회한의 시간을 보내다가 ‘쉽게 씌여진 시’를 얻습니다. 거기에는 식민지 청년의 자화상이 그려져 있습니다. 부끄럽고 서럽더라도 살아야 하는 게 인생입니다. 번민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그는 자신에게 화해의 악수를 청합니다.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눈물과 위안으로 잡은 최초의 악수.” 이 마음이 필요합니다. ‘나‘를 향해서만 손을 내밀 게 아니라, 낯선 ‘너‘를 향해서도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그때 하늘빛이 그 위에 비쳐들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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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윤기, <뮈토스2; 英雄의 시대>, 고려원, 1988년 7월 30일, p.219

2) 레프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1>, 박형규 옮김, 문학동네, 2017년 8월 11일, p.11

3) 쇠렌 키르케고르, ‘세리’, 기독교사상, 1960년 9월호 p.54-57

4) 밀란 쿤데라, <이별의 왈츠>, 김규진 옮김, 중앙일보사, 1989냔 12월 1일, p.200

5) 파커 J. 파머,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 김찬호 옮김, 글항아리, 2012년 3월 26일, p.37-38)

6) 박상훈, <정치의 발견>, 후마니타스, 2013년 2월 20일, p.60에서 재인용

김기석 vorblick@dreamw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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