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setNet1_2

무관심의 정체

기사승인 2018.02.23  23:57:51

공유
default_news_ad1
article_right_top

“너희들의 심장을 덮었던 무관심의 허울을 찢어버려라! 더 늦기 전에 결단하라!”

지난 2월 18일은 독일 나치 치하에서 히틀러에 대항한 젊은 대학생들이 체포된 지 꼭 75년이 되는 날이었다. ‘백장미’(Weiße Rose)라는 이름으로 이들은 뮌헨 대학 교내에 전단지를 뿌리며 나치의 잔악상을 폭로하며 저항을 촉구했다. 여섯 번째 전단지를 뿌리다가 체포된 그들은 재판 후 곧바로 처형되었다. 그들이 처형당했을 때 주동자였던 한스 숄과 조피 숄 남매는 만 나이로 각각 24, 21살이었다. 위의 말은 그들의 다섯 번째 전단지에 실려 있던 말이다. 이들의 저항의 삶은 그들의 누나이자 언니인 잉게 숄에 의해 집필되어 전해졌는데 이 책의 원제목 <백장미>는 우리말로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으로 번역되어 소개되었다.

꽃다운 젊은 나이의 삶을 용감하게 바쳤던 그들의 결연한 요청을 숙연히 묵상하던 중 문득 ‘무관심’으로 번역된 독일어에 눈이 갔다. “너희들의 심장을 덮었던 무관심의 허울을 찢어버려라!”라는 말 속에 ‘무관심’으로 번역된 독일어는 ‘Gleichgültigkeit’, 이 단어는 ‘같다’는 뜻과 ‘가치가 있다’는 뜻의 말이 조합되어 있는 단어다. 그러니까 ‘무관심’, 또는 ‘중요하지 않음’을 뜻하는 독일어는 ‘모든 것을 똑같은 가치로 여긴다’는 뜻으로부터 생긴 말인 셈이다.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같은 것으로 여기는 것이 무관심이라... 곰곰이 생각해보니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무관심의 정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삶은 끊임없이 모든 가치의 밸런스를 맞추기 위한 노력처럼 보인다. 어디로도 치우치지 않고 특별하게 모나지 않도록 가치의 균형을 잘 맞추려는 삶.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좋은 사람이 되려고 하고, 어떤 것은 비난하고 어떤 것은 옹호하기보다는 둘 사이의 적당한 균형을 찾아 똑같이 존중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으려 한다. 좋은 게 좋은 것이고, 실상 모든 게 다 좋은 것이라는 식. 그러므로 우리는 가능하면 극단적인 표현을 피하려 하고, 모든 사람에게 무난한 사람이 되고자 한다. 어쩌면 이러한 노력은 모든 것을 똑같은 가치로 여기고 모든 것을 똑같은 가치로 만들려는 삶이 아닐까?

그러나 삶에서 늘 경험하고 있듯 누구에게나 좋은 사람은 누구에게도 좋은 사람이 아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적을 만들지 않는 사람은 어떠한 경우에도 정의의 편에 서지 않는다. 언제나 모든 것을 같은 가치로 여기려는 사람은 기울어진 세상을 결코 보지 못하고 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동일한 가치로 여기는 것이야말로 무관심의 본질이다.

한스와 조피가 반나치 운동에 뛰어든 결정적인 계기는 한 사제의 설교였다. 유전자의 순수성을 보호하기 위해 소위 순수하지 못 한 유전자들을 안락사 시키려는 나치의 정책을 비판했던 사제의 강론에 남매는 경악했고, 이 설교문은 그들이 뮌헨 대학에 뿌린 첫 전단지가 되었다. 그 순간 그들은 모든 것을 동일한 가치로 여기던 습성을 거부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즉시 나치의 적이 되었다. 누구에게나 좋은 사람이 되기를 포기한 순간, 그들의 주위는 곧바로 적들로 가득 찼다. 교회가 사회에 대한 무관심의 허울을 찢어버리는 일도 어쩌면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적이 없는 교회에는 정의도 없을 것이다.


“나는 네 행위를 안다.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면 좋겠다.” (계 3:15)

 

 

이진경 jinkyung.lee@yahoo.co.kr

<저작권자 © 당당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4
default_side_ad1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포토

1 2 3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etNet2
default_bottom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