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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죄

기사승인 2018.03.09  23:4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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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지인의 글을 통해 엘리 위젤의 <나이트>라는 작품을 알게 되었다. 소설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들이 겪었던 나치 강제수용소 생활의 참상을 그린 내용이다. 지인은 아마도 수용소에서 한 소년이 교수형을 당하는 장면을 인용했던 것 같다. 죽어가는 소년을 보고 하나님은 어디에 있는가 묻는 질문에 대해 소설 속 주인공이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여기 교수대에 매달려 있지.”라고 속으로 대답하는 장면.

이 소설은 엘리 위젤 자신이 열다섯 살에 수용소로 이송되고 그 안에서 가족을 잃은 경험을 바탕으로 쓴 자전적 소설이라고 한다. 언젠가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하다가 중고책방에서 책을 구해 책상에 놓아두었다. 그렇게 한동안 책상에 놓인 채로만 있던 책을 훑어나 볼까 싶어 한가하게 집어 들고 펼쳐 읽기 시작한 순간, 무언가 묵직한 것으로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것은 목차를 지나고 만난 첫 페이지의 첫 문장 때문이었다. “어제 침묵을 지킨 사람은 내일도 침묵을 지킬 것이다.” 이렇게 강렬한 문장의 시작이라니, 이것은 내 삶의 미지근한 태도를 준엄하게 꾸짖는 말처럼 들렸다.

세상의 모순과 불의는 직접적인 피해자가 아니라면 보려고 애쓰지 않는 한 대개 잘 보이지 않는다. 나아가 그런 모순과 불의의 구조에서 일말의 이익이라도 보고 있는 입장이라면 이 불의는 더더욱 의식조차 되지 않는 경향이 있다. 많은 남성들이 성평등 운동에 직면했을 때 여성들이 겪는 차별을 인지조차 못하는 것도 아마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잘못된 것들은 똑똑히 쳐다보려고 애써야만 보이는 종류의 것이다. 보지 않으려고 노력해서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가만히 있으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더 심각하고 결정적인 문제는 원해서든 우연히든 불의를 보고 알고 난 후에 일어난다. 문제를 알게는 되었지만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상황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문제의 원인이 나보다 훨씬 더 큰 권력이라거나, 문제를 제기하는 순간 너무나 큰 삶의 변화를 감수해야 한다거나, 때로는 적잖은 피해까지 예상해야 하는 상황이라거나, 이런 여러 가지 사정들이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 못하게 만들곤 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대부분 이 장면에서 침묵을 지킨다. “안 됐지만 별 수 없지. 어쩌겠어. 여기서 나서면 나까지 다칠 텐데.” 언제나 이런 마음으로 자신을 합리화하면서.

엘리 위젤의 일갈은 마틴 니묄러 목사의 저 유명한 시 <나치가 그들을 덮쳤을 때>를 떠오르게 한다. “나치가 공산주의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에. 그들이 사회민주당원들을 가두었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사회민주당원이 아니었기에. 그들이 노조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노조원이 아니었기에. 그들이 유대인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기에. 그들이 나를 덮쳤을 때, 나를 위해 항의할 이들은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엘리 위젤의 말처럼 어제 침묵을 지킨 사람은 내일도 침묵을 지킬 것이다. 그리고 침묵의 죄는 결코 가볍지 않을 것이다.


“잘 들어라. 그들이 입을 다물면 돌들이 소리 지를 것이다.” (눅 19:40)

 

 

이진경 jinkyung.lee@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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