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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아들

기사승인 2018.03.11  21:2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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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아들
마21:28-32
(2018/03/11, 사순절 제4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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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는데, 아버지가 맏아들에게 가서 ‘얘야, 너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해라’ 하고 말하였다. 그런데 맏아들은 대답하기를 ‘싫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 뒤에 그는 뉘우치고 일하러 갔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에게 가서, 같은 말을 하였다. 그는 대답하기를, ‘예, 가겠습니다, 아버지’ 하고서는, 가지 않았다. 그런데 이 둘 가운데서 누가 아버지의 뜻을 행하였느냐?“ 예수께서 이렇게 물으시니, 그들이 대답하였다. “맏아들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을 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오히려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옳은 길을 보여주었으나,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다. 그러나 세리와 창녀들은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치지 않았으며, 그를 믿지 않았다.”]

스킵과 스위퍼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경칩이 지나자 거짓말처럼 겨울잠에 빠졌던 것들이 깨어나고 있습니다. 효창공원의 물웅덩이에 바글거리는 개구리들을 보면서 혼잣소리를 했습니다. “야, 너희들, 봄의 기척을 기가 막히게 잘 알아차리는구나.” 아직 개굴개굴 소리를 내며 울지는 않지만 엉금엉금 기면서 그들은 긴 겨울 추위를 견디며 살아남았음을 피차 경축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겨울이 아무리 길어도 봄은 기어코 옵니다. ‘me too 운동‘은 우리 사회가 새로운 변화의 단계로 접어들었음을 보여줍니다. 두려움과 수치심에 몸과 마음을 웅크리고 있던 이들이 용기를 내면서 권력에 취한 이들의 추한 민낯이 백일하에 드러나고 있습니다. 자기 힘을 과신하는 순간 사람들은 괴물로 변하게 마련입니다. 권력은 그 자체로 유혹이자 위험인 까닭이 거기에 있습니다. 권력에 맛들인 이들은 아픔에 대한 공감 능력이 떨어진다는 연구 보고도 있습니다.

계절의 봄도 봄이려니와 이 한반도를 온통 얼어붙게 했던 전쟁 위기라는 겨울도 조금씩 물러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남북정상회담이 실현되더니, 북미 정상회담까지 예정되어 있습니다. 아직 낙관할 때는 아니지만, 그래도 피차 소통의 창구를 열었다는 측면에서는 고무적입니다. 모처럼 조성된 평화 분위기를 잘 가꾸어가야 할 때입니다. 며칠 전 서울시립과학관장인 이정모 선생이 한국일보에 쓴 칼럼을 읽었습니다. 제목이 <언니, 그냥 던져요>였습니다. 지난 동계올림픽 기간 동안에 인기 스포츠로 부각된 컬링 게임이 글의 소재였습니다. 얼음판 위를 미끄러져 가다가 슬쩍 밀어낸 컬링 스톤이 어떤 이치로 30m가 넘게 굴러가는지, 또 핸드에 주는 스핀의 작동 원리까지 설명한 후에, 그는 우리 대표팀 경기 중에 들려왔던 한 외침에 주목했습니다. 우리 팀의 스킵인 영미 친구(김은정)는 마지막 스톤을 회전시켜서 상대편 가드 뒤로 과연 넣을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망설이는 그를 향해 영미 동생, 아니면 영미 동생의 친구의 외침이 들려왔습니다. “언니, 그냥 던져요.” 자기네가 비질을 해서 스킵이 투척한 스톤의 길을 열어줄 테니 믿고 편하게 던지라는 뜻이었습니다. 그가 쓴 칼럼의 묘미는 예상치 못한 마무리입니다. 그는 모처럼 조성된 평화 분위기에 시민들이 빗자루를 들고 스위퍼가 되자고 제안합니다. 전쟁 위험을 부추기는 외세와 경거망동하는 자들을 부지런히 쓸고 닦아서, 평화의 스톤이 하우스 안에 차곡차곡 쌓이게 하자는 겁니다.(한국일보, 이정모 칼럼 “언니, 그냥 던져요” 중에서, 2018년 03월 07일 자)

믿는 이들이 해야 할 일이 바로 그것이 아닐까요? 평화의 전망이 불투명하다 해도 기어코 평화를 안착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 죽임의 문화가 아무리 기승을 부려도 생명 가치가 우리 삶의 핵심이 되도록 하는 것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들 모두 그런 길을 닦는 스위퍼 노릇을 잘 해야 합니다.

무슨 권한으로?
오늘 본문은 주님의 마지막 한 주간에 벌어진 일 가운데 한 에피소드를 들려줍니다. 마태복음 21장은 죽음과 부활을 여러 번 예고하신 주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사건과 더불어 시작됩니다. 성전에 들어가신 주님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놓았다면서 성전 뜰에서 사고 파는 사람들을 쫓아내시고, 돈 바꾸어 주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셨습니다. 그 이튿날 주님은 잎만 무성할 뿐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이제부터 너는 영원히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다!” 주님의 선언이 떨어지자 그 나무는 곧 말라버렸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행위 예언입니다.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는 물론 외적으로 경건해 보이는 성전체제 지도자들을 상징합니다. 성전 체제 지도자들이 그 뜻을 모를 리 없습니다.

주님이 성전에 들어가셔서 사람들을 가르치실 때에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다가와서 불퉁거립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시오?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마21:23) ‘이런 일’은 일차적으로는 가르치는 일을 가리키겠지만, 예수께서 성전을 뒤엎은 일, 성전체제를 지탱하고 있던 지도자들에 대한 심판을 선언한 것을 두루 가리키는 말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자기 권력에 도취된 이들은 누군가에게 도전받는 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자기들 이외의 다른 중심을 허용하려 하지 않습니다. 예수의 돌출된 행동은 자기들의 강고한 체제에 틈을 만드는 행위였기에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작은 틈 하나가 강고한 건물을 무너뜨리는 법임을 그들은 너무 잘 압니다. 예수는 권위의 망토, 신비의 너울에 감싸인 채 호의호식하던 그들의 민낯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존재입니다. 모두가 알고 있었으나 차마 말할 수 없었던 그들의 위선을 예수는 고스란히 폭로했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어떤 식으로든 예수의 영향력을 차단하려 했습니다. 그래서 들고 나온 것이 자격 시비입니다.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시오?‘,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자격 문제를 두고 논쟁을 하는 순간 정작 주목되어야 할 사안은 뒤로 숨게 마련입니다. 주님은 늘 그러하셨던 것처럼 질문으로 질문에 응답하십니다. “나도 너희에게 한 가지를 물어 보겠다.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를 말하겠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왔느냐? 하늘에서냐? 사람에게서냐?”(21:24-25) 그들이 정말 진리에 근거하여 사는 사람이라면 담박하게 대답하면 그만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서로 의논합니다. “‘하늘에서 왔다’고 말하면, ‘어째서 그를 믿지 않았느냐’고 할 것이요, 또 ‘사람에게서 왔다’고 하자니, 무리가 무섭소. 그들은 모두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니 말이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 모르겠다고 대답합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진실이 아닙니다. 유불리의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진리를 추구하는 이들이라 할 수 없습니다. 마하트마 간디의 말이 떠오릅니다.

“비겁은 안전한지를 묻는다. 편의주의는 정치적인가를 묻는다. 허영은 인기 있는가를 묻는다. 그러나 양심은 옳은가를 묻는다. 안전하기 때문이 아니라, 정치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인기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양심이 옳다고 말하기 때문에 일을 해야 할 때가 있다.” 

이익과 손해가 모든 판단의 근저에 놓여 있는 이들은 다 이와 같이 처신합니다. 제 아무리 천사처럼 말을 한다 해도 결론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진리를 추구하는 순례자가 아닙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당신이 무슨 권한으로 그런 일을 하는지 대답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은 사안의 핵심으로 끌어들입니다.

두 아들
주님은 비유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포도원 주인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맏아들에게 “얘야, 너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해라” 하고 말하자 아들은 “싫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하지만 그는 곧 뉘우치고 일하러 포도원으로 갔습니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에게 가서 같은 말을 했습니다. 그러자 둘째 아들은 “예, 가겠습니다, 아버지” 하고서는, 가지 않았습니다. 이 비유에 등장하는 두 아들의 모습이 왠지 낯설지 않습니다. 형제자매라고 성격이나 성정이 비슷한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 배에서 나온 아이들이 이렇게 다를 수 있나“ 하고 놀라기도 합니다. 비유에서 두 아들은 대조적입니다. 맏아들은 ‘싫습니다‘ 하고 대답한 후에 곧 후회하고 포도원에 갔고, 둘째 아들은 “예, 가겠습니다” 하고 말한 후에 가지 않았습니다. 맏아들은 좀 숫된 데가 있어 자기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에 비해 둘째는 좀 약은 인물 같습니다. 일단 듣기 좋은 말을 한 후에 자기 좋을 대로 합니다. 이것을 두고 맏아들과 둘째 아들의 성격을 유형적으로 분류하는 것은 우리의 관심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예수님의 질문입니다. 비유를 시작하면서 주님이 청중들에게 하셨던 질문은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였습니다. 이 질문을 통해 주님은 그들을 관습적인 사고나 당파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사유하는 주체가 되라고 요구하신 겁니다. 비유 끝에 하신 질문은 “그런데 이 둘 가운데서 누가 아버지의 뜻을 행하였느냐?”입니다. 질문 속에는 답이 내포되게 마련입니다. 질문을 바꾸는 순간 답은 자명해졌습니다. 그들은 “맏아들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하나님께 중요한 것은 시원시원한 대답이나 듣기 좋은 말이 아닙니다. 삶입니다. 맏아들이 좀 사근사근하게 대답했더라면 더 좋겠지만 그는 일단 자기감정에 충실합니다. 그러나 금방 뉘우칩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린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는 포도원으로 갔습니다. 하지만 둘째 아들은 대답은 시원하게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아버지의 뜻을 거슬렀습니다.

호모 사케르
신앙생활이란 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동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우리 자신을 그분의 뜻에 복속시키는 것입니다. 욕망의 관점에서 보면 신앙생활은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영생의 관점에서 보면 그런 자기 극복과 헌신이야말로 아름다운 삶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스스로 ‘잘 안다‘, ‘잘 믿는다‘ 하는 이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릴 수 있습니다. 반면 스스로 부족함을 아는 이들이 하나님의 뜻을 순전한 마음으로 수행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은 둘째 아들처럼 말은 시원하게 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보다 자기들의 욕망을 따르는 이들입니다. 반면 그들에 의해 죄인으로 규정된 사람들, 곧 세리와 창녀들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불결한 존재로 여겨지던 사람들입니다.

조르주 아감벤이라는 이탈리아 학자는 이런 이들을 가리켜 ‘호모 사케르’(Homo Sacer)라 했습니다. 고대 세계에서 희생물로 바칠 수는 없지만 죽여도 되는 생명을 일컫는 말입니다. 세상은 그런 이들을 필요로 합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정상임을 드러내기 위해 비정상적인 사람들을 상정합니다. 마음대로 경멸해도 되는 이들이 있어야 그들은 자기들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 아닌가요? 저는 우리들 속에 있는 냉소와 폭력성이 두렵습니다. 예수님은 유대교 사회적 세계에서 호모 사케르로 여겨지던 사람들을 놀랍게 복권시키고 있습니다. 사회적 약자들, 소수자들을 향해 돌팔매질을 하는 이들을 보면서 주님이 기뻐하실까요? 개신교인들 가운데는 누군가에 대한 혐오를 믿음과 등치시키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의 길과 다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오히려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21:31)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이들은 멋진 말을 하는 사람 혹은 많이 아는 사람이 아니라, 마음에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안다‘ 하는 자부심이 배움을 가로막고, ‘나는 의롭다’는 생각이 은총을 구하는 겸손한 마음을 갉아먹습니다.

주님은 지금 우리를 포도원으로 부르십니다. 추수해야 할 것은 많은 데 추수할 일꾼이 적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살아갈 힘과 용기를 잃어버린 이들의 벗이 될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욕망의 벌판에서도 사랑을 목적으로 삼는 사람들이 있음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정치권력이든 경제 권력이든 종교 권력, 젠더 권력이든, 어떠한 형태의 권력이든 간에 사람들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대하는 이들이 더 이상 힘을 쓸 수 없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런 일을 위해 초대받은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포도원은 특정한 장소가 아니라, 우리가 매일 살고 있는 비근한 현실 그 자체입니다. 우리의 일상 속에 하늘의 빛을 끌어들여 더 이상 어둠이 사람들을 사로잡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실천과 헌신 위에 복을 내리시기를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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