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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영이와 수영이

기사승인 2018.06.23  22:5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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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집공동체 이야기 —

   
 

 

노후에 전원주택을 지어 살려던 터에 장애가족들의 집을 짓다

 

충남 논산시 벌곡면에 ‘우리집공동체’라고 하는 장애인 시설이 있다. 호남고속도로의 논산과 대전 중간에 ‘벌곡휴게소’가 있는데, 그 ‘벌곡’의 벌곡면이다. 박성훈 목사와 나혜자 사모 부부가 설립한 장애가족들의 보금자리이다.

박 목사는 신학을 하기 전 서울에서 사업을 크게 했던 사람이다. 그가 살던 평창동 저택은 영화나 TV 드라마에도 자주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사업이 기울자 일을 접고 대전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3년 후 신학을 시작했다. 유성 소재 침례신학대학교에서였다.

늦깎이 신학생이 된 그는 공부를 하면서 많은 신학생들이 그런 것처럼 전도사로 교회 일을 도왔다. 공주 근교의 교회에서였다. 시골 교회이지만 회원 14,5명의 학생회를 조직하여 성경공부를 주축으로 활발히 활동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담임목사가, 기독교의 본모습을 바르게 드러내는 전도사의 성경공부 결과가 자기의 기복신앙을 위협하는 것이나 아닐까하는 우려 때문에 학생회를 해체해 버린 것이다.

그는 무엇인가 다른 일이라도 해야 했다. 그래서 우연찮게 찾게 된 데가 경북 안동에 있는 한 장애인 시설이었다. 사모와 매주 다니며 일을 도왔다. 목요일 아침에 갔다가 주일날 예배를 드리고 돌아왔다. 고교생인 아들과 중학생 딸만을 두고 주(週)의 절반이나 집을 비웠으니 가정이 제대로 돌아갈 리 없었으나, 그때는 그렇게라도 그런 일을 하는 것이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동료 신학생들은 대부분 졸업하면 기성 교회에 초빙되어 가거나 유학을 하여 교수가 되는 그런 꿈을 꾸고 있었다. 그들은 그 같은 희망으로 안광이 번뜩였다. 이를 악물고 공부했다.

그런데 그는 그러한 그들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장애가족들의 대소변을 받아내는 일을 하는데도 마음이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마음에 풍파가 일다가도 그들의 시중을 들고 있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잔잔해졌다.

그때부터 그는 장애인들을 보살피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할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심각하게 기도하며 지인들과 상의도 해 보았다. 그러는 동안 그게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맡겨 주신 사명이라는 데로 생각이 굳어져 갔다.

그때 그는 서대전의 아파트에서 살고 있는데, 오갈 데 없는 지체 장애 5급, 지적 장애 3급의 송영숙이라는 40대 중반 아줌마와 가족이 되어 같이 지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족이 한명 더 늘어 40대 초반의 이근희라는 남자와도 같이 살게 되었는데, 지적 장애 2급으로 충북 제천 시장에서 밥만 얻어먹으며 중국집 배달도 하고 상인들이 시키는 일을 이것저것 가릴 것 없이 했던 사람이다. 주민등록조차 없었다.

그러다가 벌곡에 장애가족들의 보금자리의 터를 다듬기 시작했다. 서대전 아파트와 벌곡을 오가며 일에 박차를 가했다. 2000년 봄이었다.

벌곡에는 다행히 서울에서 사업을 할 때 노후에 전원주택을 지어 내려가 살려고 1992년도에 사 놓은 토지 약 1250평이 있었다. 조그만 손을 봐도 그럭저럭 살 수 있는 농가도 한 채 있어 필요할 때는 거기서 머물기도 하며 일을 했다.

드디어 2000년 9월에 60평 남짓한 조립식 건물이 완공되어 박 목사 부부와 아들과 딸, 그리고 그간 한 명 더 늘어 3명이 된 장애가족을 포함한 일곱 가족이 이사를 하여 본격적으로 장애인 공동체가 시작되었다.

2004년에는 봉사자들과 손님들의 숙소로 쓸 30평 정도의 역시 조립식 건물을 지었고, 2005년에는 230평 정도의 제대로 된 건물을 지었다. 그러는 동안 시설은 법인체가 되었고 터도 몇 차례인가 사 늘려 약 3500평이 되었는데, 그 새로 산 터에는 사람이 살 던 집이 있어 그 집에 지금 박 목사 가족이 살고 있다.

 

 

관훈이 형과 태성이

 

가족 중에 박 목사보다 3살 위인 관훈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전에 배를 탔으나 알코올중독이 심하여 일을 할 수 없자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우리집공동체에 들어와 가족이 되었다.

술만 안 먹으면 나물랄 게 별로 없는 사람이었으나, 항상 술 그것이 문제였다. 술을 한 번 입에 대면 계속해서 마신다. 강소주를 보통 1주일에서 열흘 동안이나 계속해서 마신다. 새우깡 같은 것을 조금씩 먹으니 강소주랄 수는 없을지 모르나, 당뇨를 앓고 있는 그로서는 그렇게 마시고도 죽지 않은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한 25일에서 한 달 동안은 맨 정신으로 살다가 1주일에서 열흘 정도씩 계속 마시는 일을 주기적으로 했는데, 방에다 소변뿐 아니라 대변까지 보는 일도 있었다. 그에게 방을 하나 따로 주었기에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가 술을 마시는 것은 시설에서만이 아니었다. 가끔 답답하다며 외출을 하겠다고 하면 박 목사는 얼마간의 돈을 쥐어주어 보냈다. 그러면 배 타던 때가 떠올라서인지는 모르지만 주로 항구도시를 찾아가 여인숙 같은 데에서 그렇게 술을 마셨다. 군산에서 경찰로부터 연락이 와 가서 데려 온 일이 몇 차례나 되고, 목포까지 가서 데려 온 적도 있다.

그러한 그를 박 목사는 ‘관훈이 형’이라 부르며 함부로 대하는 일이 없었다. 박 목사가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는데, ‘나를 무시하는 것은 참아도 우리 가족들을 무시하는 것은 못 참는다’는 것이었다.

당뇨병 환자가 그렇게 술을 마시고도 죽지 않는다는 것이 믿겨지는가. 그러나 그도 무쇠 아닌 사람인 이상 몸이 제대로 배겨날 수는 없는 일, 결국 충남대학교 병원에서 다리를 절단해야 한다는 진단을 받고 입원을 했다.

박 목사가 ‘관훈이 형, 우리 기도해’라 말하자 그는 ‘예’라고 순순히 대답했다. 별일이었다. 다른 말은 다 잘 들어도 예배에 참석하라는 말만은 죽어도 듣지 않던 그인데, 그러한 그도 다리를 잃어야 한다는 현실 앞에서는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박 목사는 간절히 기도했다. 그런데 이변이 일어났다. 수술 날짜를 기다리는데 상태가 호전되어 퇴원을 하게 된 것이다. 박 목사는 그에 대해 기도의 응답인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의 은혜임은 틀림없다고 말한다.

관훈이 형, 박 목사가 그렇게 부르는 그는 결국 오래 살지 못하고 몇 해 전에 세상을 떠 그 유해가 ‘평화의 뜰’에 묻혔다. 평화의 뜰, 그것은 시설의 넓은 터 한 쪽 외진 곳에 마련된 잔디 장(葬)의 가족묘지인데, 2013년 봄에 조성되기 전까지는 가족이 세상을 뜨면 그 유해를 시설 내에 지천으로 많은 감나무라든가 벚나무, 목련나무 등의 밑을 파고 묻었다. 일종의 수목 장인 셈이지만, 시설 내이다 보니 나무마다에 묘비 대신의 이름표조차 걸어 줄 수가 없었다. 박 목사는 항상 그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제대로 된 잔디 장의 묘지를 마련 한 것이다.

우리집공동체에서 지금까지 세상을 뜬 가족은 40여 명이 된다. 그러나 평화의 뜰이 마련된 2013년 이후로는 소천한 가족이 적어 6명만이 묻혀 있다.

 

   
 

가족 중에 알코올중독자가 또 있었다. 태송이라는 이름의 경북 의성 사람이었다. 이혼을 하고 이곳저곳 떠돌다가 들어와 우리집공동체 가족이 된 사람이다. 그도 술만 먹지 않으면 착한 사람이었으나 한 번 입에 대면 한 달 동안이나 계속 마셨다. 한 번 시작하면 1주일 이상 마시는 사람이 있어 놀랐는데, 1개월 동안이나 술만 마시는 사람도 있다니 어안이 벙벙할 일이었다.

그런데 그는 시설에선 많이는 마시지 않았다. 1년에 세 번 정도, 여름이 되면 좀 일찍 벌초를 한다며, 그리고 추석과 구정 때면 고향에 다녀온다며 나가서는 마셨다.

박 목사는 그가 고향에 다니러 간다고 할 때마다 얼마간의 돈을 주어 보냈다. 그러면 고향에 들렸다가 대전역 근처 사창가의 싸구려 여관 같은 데에서 한 달 내내 마셨다.

그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는데, 결혼도 안하고 여자와 동거를 한다는 걸 알게 된 박 목사가 당신 이름으로 예금을 하여 3,000만원이 되면 줄 테니 아들이 전세방이라도 얻는데 보태 주어 아버지 노릇을 하라며 술을 참아 보라고 했다. 그리고 실제로 한 달에 70만원씩 예금을 시작했다.

그는 박 목사에게 통장을 자기가 가지고 있고 싶다고 통사정을 하여 주었는데, 나중에야 통장에서 돈을 찾아 술값으로 썼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술을 끊게 하는 데에 도움이 될까 했던 것이 오히려 음주를 부추기는 꼴이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통장을 빼앗았으나 예금은 계속 했다.

그래도 그는 술 먹는 버릇은 고치지 못했다. 고향에 다녀오겠다며 나간 그는 어디에서 누구에게 들어 방법을 알았는지 은행에 통장 분실신고를 하고 1년쯤 모아진 8백 몇 십만 원의 돈을 모두 찾아 행적을 감추었다. 그리고는 소식이 끊겼다. 2년 전 일이다.

알코올 중독에 대한 이야기만도 이러한데, 다른 일들을 다 말하자면 한도 끝도 없다.

 

 

예영이와 수영이

 

박 목사 부부의 생애에서 예영이와 수영이 이야기를 빼고 나면 팥소 안 든 찐빵이 될 것이다.

예영이는 2005년 4월 15일에 들어와 박 목사 부부의 아들이 되었다. 그 며칠 전에 우리집공동체 홈페이지를 보고 알았다며 전화를 해 온 여자가 있었다. 예영이의 생모였다. 그녀는 울며 사정 이야기를 했다. 자기가 낳은 아기가 다운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는데 심장에 천공이 2개나 있고, 한 쪽 다리가 가늘고 짧으며 뒤틀려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기를 형편이 못되니 대신 좀 길러 달라는 것이었다.

박 목사가 안동에서 장애인들을 돌보고 있었을 때 거기에 초등학교 3학년의 예쁜 여자 아이가 있었는데, 다운 장애를 가지고 있었다. 박 목사는 우리집공동체에도 그런 아이가 한 명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러나 그런 전화를 받고는 선뜩 대답할 수가 없어 애매하게 한 번 와 보기나 하라고 했다. 그런데 바로 다음날 그녀가 아기를 안고 찾아 왔다. 태어난 지 23일만이라 했다. 안동의 그 여자 아이처럼 예쁘지도 않고 정이 느껴지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거절할 수는 없었다. 남의 부탁의 거절을 잘못하는 성격 탓인지도 몰랐다. 그런데 사모는 달랐다. 온 그날부터 너무 예뻐서 자기 부부 방에 뉘어 놓고 시간 날 때마다 옆에 앉아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이름을 ‘예수님’의 ‘예’자를 따 ‘예영’이라 지었는데, 기르는 것이 이만저만 어려운 게 아니었다. 우유 잘 빨지 못하여 40ml를 먹이는 데 1시간은 족히 걸렸다. 2시간 이상이 걸린 적도 적지 않았다. 그러니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어 사모의 눈은 항상 충혈 되어 있었다. 잔병치레가 많아 병원신세를 지는 일이 많은 것은 물론이고 백일 때쯤에는 심장 수술을 받았다. 그들 부부는 그 어린 것이 그 큰 수수를 받는다는 것이 못 견디게 아팠다.

만 한 살이 되자 다리 수술을 하여 회복까지 6개월이 걸렸다. 수술 후 주에 한 번씩 통원치료를 받았는데, 병원까지는 가는 데 50분 정도가 걸렸다. 병원에 데리고 다니는 것은 엄마인 사모의 몫이었으나 고생이 아니라 회복되어 가는 것을 보는 기쁨이었다.

그런데 그러는 동안 박 목사도 예영이가 예뻐지기 시작했다. 그에 가속이라도 붙은 듯 나중에는 외출을 했다가도 예영이가 보고 싶어 서둘러 돌아오곤 했다. 좀 더 나중에는 아예 외출을 할 때면 특별히 안 될 자리가 아니면 예영이를 데리고 다녔다. 안수예배라든지 개업예배 같은 데에도 데리고 가고 특강 같은 데에도 데리고 가서 들었다. 해외여행에 데리고 가기도 했다. 아무리 고단해도 예영이만 보면 피로가 가시었다.

한 번은 딸에게 외손자보다 예영이가 더 예쁘다고 했다가 섭섭해 하는 모습을 보아야만 하기도 했다. 장 서방에게는 그런 말씀하지 마시라는 말도 들었다.

그런 예영이가 13살로 중학생이 된 지금까지 박 목사 부부의 사이에 끼어 잠을 잔다. 어떤가. 이해가 가는 일인가.

박 목사는 새로 산 터의 집에 살고 있다고 전술했는데, 그러기 전에는 다른 가족들과 함께 살았었다. 그런데 예영이가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자 식사시간이 공동체와는 맞지 않아 따로 준비를 하여 먹여 등교를 시키기 위해 따로 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렇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예영이가 재작년, 그러니까 2016년 9월 중순경부터 다리를 절기 시작했다. 병원에 데리고 갔더니 고관절이 어긋나 핀으로 고정하는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순간 박 목사 부부는 하늘이 노래지는 것 같았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수술을 받으면 완치 가능성이 80%는 된다는 것이었다. 20% 정도는 무혈괴사 가능성도 있다 했지만,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박 목사는 무슨 일이 됐건 가능성이 50%만 되어도 성공을 100% 확신하는 까닭 모를 자신감이 있었다. 수술은 대성공이어서 예상보다 빨리 걸었다.

그러나 1주일 쯤 지나자 다시 아프기 시작했다. 병원에 갔더니 20% 가능성의 무혈괴사가 진행되고 있다 했다. 핀을 빼는 수술을 마친 의사는 이제 방법이 없다며 평생 휠체어를 타는 수밖에 없다 했다. 박 목사는 그게 의사로서 할 말이냐고 소리를 질렀다. 서울대 병원 소아정형외과를 찾았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박 목사 부부는 그래도 포기할 수가 없었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 되어 여기저기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ebs의 ‘명의’라는 프로그램에서 역시 서울대 병원 소아정형외과의 조태준 교수를 알게 되었다.

그래서 바로 예약을 신청했는데 뜻밖으로 날자가 빨리 잡혔다. ct사진을 본 조 교수는 수술이 가능하다며 정형외과 인공고관절 분야의 유정준 교수와 연결시켜 주어 3일 만에 만날 수가 있었다. 역시 수술이 가능하다 했고 6월 24일(일), 그러니까 내일 입원하여 26일(화)에 수술을 하기로 날자가 잡혔다.

사실 박 목사에게 인터뷰를 요청했으나 무슨 자랑스러운 일이냐며 거절했는데, 많은 사람이 알아야 기도를 해 줄 것 아니냐고 설득을 하여 겨우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 글을 읽으시는 여러분께서도 예영이의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란다.

 

   
▲ 박 목사 부부와 예영이, 수영이

 

박 목사 부부에게 다운 장애를 가진 아들은 또 있다. 수영이. ‘예수님’의 ‘수’자를 딴 ‘수영’이다. 자기들의 아들이 된 뒤 박 목사 부부가 상의하여 지은 이름이다.

수영이가 우리집공동체에 들어와 그들 부부의 아들이 된 것은 2011년 11월 26일이었다. 그 날, 충남 홍성에서 청소년 쉼터를 운영하는 이철이라는 분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한 부부에게서 다운 장애를 가진 아기가 태어났는데, 기를 형편이 못되니 우리집공동체에서 좀 받아달라는 전화였다.

말을 들어 보니 아기의 장애는 다운뿐이 아니었다. 언청이라고도 하는 구순열에 입천정이 갈라진 구개열의 장애도 있었다. 미숙아로 태어나 인큐베이터 신세도 져야 했다. 그럼에도, 아니 그렇다보니 오히려 아기의 아버지 되는 사람은 아기를 보려고 조차 하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아기 엄마에게 아기를 데리고 집에 오면 이혼을 하겠다고 했다.

이철이 씨는 그러니 좀 받아달라고 통사정을 했다. 사정은 딱했으나 박 목사로서는 그럴 수가 없었다. 예영이가 예뻐서 죽고 못 사는 것은 사실이지만, 기르며 너무 힘이 들었던 일이 생각나서 그럴 수가 없었다. 다른 데를 알아보라 했다. 그러나 이철이 씨는 물러나지 않고 졸라댔다. 하는 수없이 말 대접으로 언젠가 한 번 와 보기나 하라고 했다.

그런데 그날 밤 8시나 됐을까, 이철이 씨와 아기 엄마와 그 오빠를 포함한 몇 사람이 아기를 안고 들이닥쳤다. 친권포기각서에 인감증명서까지 떼어 가지고 왔다.

인큐메이터에 23일간 있었는데, 오늘 나와 데리고 왔다 했다. 박 목사 부부는 참 이상한 우연도 다 있다 싶었다. 예영이가 자기들 품에 안긴 게 생후 23일째 되던 날이었는데, 수영이도 엄마 뱃속에서 나온 지 23일 만에 온 것이다. 거기에다 그날은 박 목사 부부의 결혼기념일이기도 했다. 박 목사는 피할 길이 없다고 생각했다. 사모는 아기를 하나님께서 자기들 부부에게 보내신 것 같아서 순종하는 마음으로 받아 기르기로 했다. 또 한 번의 사랑의 고생이 시작된 것이다.

구순열의 아기는 다운 장애가 없어도 우유를 먹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는데, 사모는 수영이에게 우유를 먹이는 데에 진이 다 빠질 지경이었다. 세 살 때 구순열을 수술했고, 네 살 때는 구개열을 수술했는데, 구개열 수술 후의 통증은 5,6개월이나 이어졌다. 아파 울어대는 아이를 보는 엄마아빠의 가슴은 무너져 내렸다.

그에다 자폐증까지 있어 말을 전혀 하지 못하고 체구가 작기는 하지만 비교적 건강하여 올봄에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가족 소풍이라도 가는 것 같은 기분으로 한 번 찾아가 보라 권하고 싶다

 

박 목사 부부는 ‘우리집공동체’가 장애가족 한 사람 한 사람의 ‘우리 집’이기를 바란다. 학생이 학교와 교사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학교와 교사가 학생을 위해 있는 것 이상으로 장애인 시설은 시설과 그 운영자가 아닌 장애가족을 위해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시설 운영의 기조로 했다. 자기 (장애)가족들이 보통 사람들의 가정과 같은 환경에서 생활했으면 하는 바람이 컸다. 그러나 얼마 안 되는 후원금과 모자라는 일손이 문제였다.

그런데 사회복지법인으로 승인이 나 2013년부터 정부의 보조금을 받게 되었고, 후원자들이 보내 온 후원금도 많지는 않지만 있어 한시름 놓게 되었다. 장애가족 30명에 직원이 원장을 포함 23명이니 국가가 복지에 나서지 않았다면 생각도 못할 일이다.

박 목사 부부는 주어진 인력과 운영비가 가장 효과적으로 쓰이도록 마음을 쓰고 있다. 그들 부부가 직원들에게 가장 바라는 것은 장애가족을 자기의 혈연가족처럼 생각하고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온 애정으로 돌보라는 것이다. 아들딸이나 부모형제처럼 아끼고 사랑하라는 것이다. 쉬운 일이 아니니 자기최면이라도 걸어 노력하라 한다.

감기 같은 것이라면 몰라도 몸이 많이 아픈데 편하자고 가까운 병원에 데리고 갔다가는 불호령이 떨어진다. 그러니 충청지방에서는 제일 좋다는 충남대 병원을 가장 많이 이용하게 되었다.

우리집공동체는 팀의 책임 하에 생활이 이루어지는데, 급식 팀에게는 주어진 예산 한도에서이기는 하지만, 최상품의 식재료를 써서 정성으로 조리를 하라고 한다. 인스턴트식품이나 햄, 소지지, 어묵 같은 가공식품은 식탁에 올리지 않는다. 식용유도 올리브유를 쓴다. 부득이하게 가공식품을 써야 할 경우에는 가장 믿을 만한 메이커의 제품을 골라 쓴다. 균형 있는 식단을 짜되 청결에 방점을 찍는다. 모든 것이 다 만족해도 청결이 낙제점이면 전체적으로 마이너스의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사무 팀은 가족들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행정적으로 뒷받침하고, 생활재활 팀은 가족들 각자마다의 부족한 기능을 보강하여 혼자서도 기본적인 일은 해 낼 수 있도록 한다. 그리고 위생 팀은 복지의 기본은 청결이라는 마음의 자세로 일한다.

인터뷰 전에도, 그 중간 중간에도 박 목사와 사모가 걱정하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자기들이 사실 이상으로 좋게 포장되어 글이 세상에 나가는 것이었다. 맞다. 그들도 이 글에 소개한 것들만 빼면 지극히 평범한 부부임이 틀림없다. 아니 평범 이하인 점도 있는지 모른다.

장애인 시설 운영자에 대한 사회적 시선은 대체적으로 좋지 못하다. 가슴 훈훈하게 하는 미담은 거의 없고, 눈살을 찌푸리게 하거나 분노를 자아내게 하는 악행이 메스컴을 장식하는 일이 많다. 그러니 그로 인한 사회적 편견을 바로잡아야 할 것이 아니냐는 것도 인터뷰에 응하게 하는 설득의 한 방편이었다.

우리집공동체 가까이에 거주하시거나 근처를 지나시는 분들이라면 한 번 들려 확인해 보시기 바란다. 정원도, 울안 환경도, 가족소풍이라도 가서 휴식을 취할 수 있을 정도로 아름답게 잘 가꾸어져 있으니 정말 나들이라고 가는 것 같은 기분으로 가보시기 바란다.

 

   
 

 

* 이 글은 인터뷰 내용만을 근거로 하여 쓴 것이 아니다. 우리집공동체와 필자는 긴밀한 관계에 있어 지근거리에서 보고 느낀 것을 주축으로 하고 인터뷰 내용은 오히려 참고로 했을 뿐이다.

 

 

임종석 seok9448@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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