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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각의 굴복이 믿음이다

기사승인 2018.08.16  00:2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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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새벽기도회 때 욥기를 읽고 있다. 욥은 의로운 신앙인이라는 걸 성도라면 다 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를 마귀의 손에 맡겼고 모든 재산을 잃고 가족들마저 잃었을 뿐 아니라 자신은 몹쓸 병에 들어 기왓장 조각으로 가렵고 진물 나는 피부를 긁어야 하는 지경에 이른다.

친구들이 이 안타까운 소식을 듣고 위로하러 먼 거리에서 욥을 찾아온다. 하지만 욥이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는 말을 듣고 위로가 아닌 정죄의 말을 한다. 원인이 있으니 결과가 있다는 일반론을 펼치며 욥이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빌라고 한다.

친구들의 말에 욥은 계속하여 자신이 죄가 없음을 말하며 억울하다고 한다. 친구들의 주장인 인과응보의 사상은 일반적 진리다. 욥은 하나님은 죄인이든 의인이든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가지고 복을 주시기도 화를 주시기도 한다고 항변한다.

두 의견 모두 맞는 말이다. 친구들의 주장처럼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날 수 없다. 이건 일반적 원인 결과를 설명하는 데 있어 진리다. 또한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도 하나님은 자신의 주권을 가지고 사람에게 이런 저런 일을 하신다는 욥의 말도 진리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인가. 인과응보라는 말도 하나님의 절대주권이라는 말도 옳은데 욥과 친구들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감만 맴돈다. 똑 같은 주제의 말들의 성찬이 욥기 전체를 타고 흐른다. 끝없이, 한없이, 거침없이...

모두 맞는 말을 하는데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왜 그럴까. 시각의 차이 때문이다. 아무리 맞아도 시각이 다르면 문제가 생긴다. 적용의 차이 때문이다. 아무리 진리라도 적용을 잘못하면 문제는 그대로 남는다. 친구들의 주장이 옳지만 욥에게 적용될 말은 아니다.

우리는 너나없이 자신의 위치와 시각을 너무 과신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이 종교적 도그마에 갇히면 상당히 위험한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친구들의 주장인 인과응보라는 일반론을 욥에게 억지로 적용하려고 할 때 문제가 생긴다.

그들은 주장한다. 자신들의 주장이야말로 진리라고. 맞다. 그런데 문제는 해결되기는커녕 더 꼬인다. 지적이며 영적인 논쟁이 감정적인 논쟁으로 번진다. 시각이나 적용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욥이든 친구들이든 했다면 그렇게까지 지겹도록 다투지는 않을 것이다.

생각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 있다. 같은 교회를 다녀도, 같은 집안사람이어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시각(생각)을 버리지 못하면 결코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욥기는 뒷부분에 하나님이 친히 나타나 개입하심으로 문제가 해결된다. 이는 하나님의 생각의 개입이다. 두 그룹의 서로 다른 진리를 하나님의 생각이 덮을 때 문제는 저절로 해결된다.

그게 대단한 진리라 할지라도 사람의 생각은 다만 사람의 짧은 생각일 뿐이다. 더 오묘하고 더 광범위한 하나님의 진리가 다가오면 사라져 버릴 것들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짧고 아둔한 자신의 생각을 절대적 진리인양 주장하며 산다. 참 어리석다. 내 생각을 하나님의 생각에 굴복시키는 일이야 말로 진정한 용기이고 신앙이다.

김학현 nazunja@gmail.com

<저작권자 © 당당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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