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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로

기사승인 2018.08.18  00: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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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복절을 앞두고 서울 상암동 월드컵경기장에서 남북노동자통일축구경기가 열렸다. 경기장 관람석에 앉아있다는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히는 불볕더위 한복판에서였다. 여러 날 전에 초대를 받았음에도 즉각 답을 주지 않은 이유다. 토요일 오후에다가, 지친 무더위에 몇 시간씩 괴로움을 겪을 것을 생각하니 못내 두려웠다. 그러다가 문득 떠오르는 사람이 있어서 부랴사랴 남은 초대권을 문의하였다.

  비록 이글거리는 햇살은 피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분단의 외투를 한 꺼풀 벗는 의미 있는 이벤트였다. 남과 북에서 온 선수들은 승부와 상관없이 축제에 참여하고 있었다. 관중석은 모두 남쪽 사람이었지만 북이든 남이든 선수들이 골을 넣을 때마다 환호성을 질렀다. 선수들은 편을 갈라 맞섰지만 응원단은 모두 한편이었다. 기록적인 더위를 무릅쓰고 의미를 부여한 만큼 서로 뿌듯해하였다.

  꼭 13년 전, 2005년 8월에도 나는 그 현장에 있었다. 그해는 광복 60주년이었는데, 같은 상암동 월드컵경기장에서 남북 국가대표의 친선축구경기가 열렸다. 남과 북 사이 교류가 활발하던 시절이었다. 관람석 중앙에는 북한 선수를 ‘렬렬히’ 환호하는 북쪽에서 온 응원단도 함께 하였다. 그들 중에 흰 셔츠 차림의 남성 응원단이 한 섹션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아마도 북쪽에서 남한을 상대로 일하는 각 기관의 실무자 그룹처럼 느껴졌다.

  혹시 그도 왔을까 싶었다. 바로 이정로였다. 그는 오랫동안 조선그리스도교련맹 국제부장으로 온갖 국제회의에서 통역을 담당하였다. 1997년 5월 독일 라이프찌히에서 열린 독일개신교회의 날에 처음 만난 이래 2000년에는 푸랑크푸르트에서, 2002년에는 평양에서 여러 날을 만났다. 나이가 어슷비슷 어깨동갑이어서 금새 친해졌다. 평양에서 헤어지면서 다음에는 서울에서 다시 만나자고 농담 아닌 농담을 건넨 것도 얼마 전이었다.

  물론 그가 거기 있을 줄은 전혀 가늠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만에 하나, 혹시나 싶으니 무심코 시선이 그리로 끌리고, 무작정 발길이 그리로 향하였다. 경기가 끝난 후 관중이 뿔뿔이 흩어지는 것을 보면서 천천히 북한대표단을 향해 계단을 내려갔다. 북쪽 손님들도 서울의 관중들이 다 빠져나가기를 기다리며 서서 대기하는 중이었다.

  나는 흰색 상의로 통일했기에 그 사람이 그 사람처럼 보이는 북한대표단 관람석 앞에서 큰 소리로 외쳤다.
  “혹시 여기 조그련에서 이정로 선생이 오셨습니까?”
  남한 사람 하나가 돌연 나타나 느닷없이 사람을 찾는 소리에 무리는 갑자기 술렁댔고, 서로 두리번거렸다. 몇 번이나 목청껏 소리를 높여 ‘이~정~로~’를 부르니 무리 가운데에서 그가 쭈뼛거리고 나타났다. 정말 이정로였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우리 두 사람에게 쏠렸다. 나야 작심하고 찾아 갔지만 그는 난데없이 내가 등장한 까닭에 몹시 놀라하였다. 악수도, 대화도 허둥댔다. 불과 30초나 되었을까? 북쪽에서 온 다른 사람들의 ‘강렬한’ 눈총 때문에 비록 목소리를 과장했으나 떨렸고, 안부를 물었으나 의례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지나치게 가벼울 만큼 스치듯 재회를 약속하고 헤어졌다. 물론 우리 집에 가서 차 한 잔 하자는 말도 꺼내지 못했다.

  무리를 뒤로 하고 돌아오면서 이런 마음이 들었다. 내가 평양에서 그랬듯이 그도 나에게 누군가를 만나게 해 달라거나, 교인의 심부름으로 가져 온 물건을 전해달라거나, 행방불명 된 친척을 찾아달라는 부탁을 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미안함이 남는다.

  2009년 10월, 도잔소회의 25주년을 기념하는 홍콩국제회의에서 이정로 목사를 다시 만났다. 그는 고 강영섭 위원장과 함께 한 자리에서 내게 농담처럼 말했다. “송 목사님, 빨리 높은 사람이 되어 우리를 도와주시오.” 그는 천차만별 생각이 다른 남쪽 사람들의 요구와 등살에 일일이 대응하느라 지쳐있었다.

  올 봄, 이정로 목사가 폐암으로 요양 중이란 소식을 들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얼굴 보기가 힘든 처지가 되었다. 한국교회 파트너들은 항암주사약을 대한적십자사를 통해 구했지만, 이를 전달할 수는 없었다. 항암제는 대북규제(Sanction)상 금지품목으로 북으로 보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인편에 비타민만 보냈다고 들었다.

  폐암 이전에도 이정로는 자기들의 형편을 이해해주는 남쪽 사람들이 너무 적어서 늘 힘들어하였다. 그 나라 시스템에서 하나의 단체에 불과한 조선그리스도교연맹 임의대로, 또 한 사람의 목사가 스스로 할 수 있는 만만한 일이란 거의 없을 것이다. 미약한 북한교회의 입장을 대변하는 그의 입장은 오죽 답답했을까? 이정로 목사의 기적 같은 쾌유를 빈다.

 

송병구 sbkbochu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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