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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리히 보름달

기사승인 2018.09.22  23:4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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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처럼 스위스에 다녀왔다. 창립 40주년을 맞은 한인교회 수양회에 참여한 것인데, 스위스에 있는 신앙공동체가 벌써 40년을 맞았다니 놀랍다. 이민국가가 아닌 유럽에서 한인공동체는 아주 작기 마련이다. 그것도 곳곳마다 한인타운이 형성된 미국이나, 광부와 간호사가 주류를 이룬 독일이 아닌, 작은 나라 스위스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스위스 거주 한인들은 예전에 살던 독일에 비해 훨씬 여유와 안정감이 있었다. 누구나 인정하듯 삶의 질이 더욱 견고하게 느껴졌다. 5박 6일 잠시 머물렀지만 취리히는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 1위라고 할 만 하였다. 인구밀도, 환경, 교육, 안전, 물가, 수입 등을 평가한 결과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중립국으로서 오래 평화를 지켜왔기 때문이다. 평화의 중요성을 새삼 느낀다.

  수양회에서 만난 교인들과 대화하면서 스위스 역시 한인교회의 주축은 간호사 출신임을 알 수 있었다. 만 65세를 전후해 최근 은퇴한 그들은 대개 교회에서 권사직분을 맡아 헌신하고 있었다. 한 마디로 평생 교회와 함께 이민생활을 감내해 온 셈이다. 그들의 라이프 스토리는 제 각각이지만 흥미로운 공통분모가 있었다.

  애초에 정착한 곳은 독일이었다. 물론 언어가 같은 동질성 때문이겠으나 독일에서 병원계약을 마친 후 취리히로 다시 이주하였다. 독일에서 만족하지 않고 3년 혹은 5년 후에 다시 모험을 시도한 이유는 더 나은 삶을 위해 도전했기 때문이다. 어려서 읽은 동화 하이디의 꿈을 이루었다고 했다. 거듭한 도전의 결과 더 나은 만족을 얻을 수 있었다.

  물론 한인교회 구성원의 대부분은 1970년대 간호사 이주 이후에 온 이들이다. 한국에서 장기 출장으로 일하던 스위스 기술자들은 현지에서 한국인 여성을 사귀었고, 결국 결혼에 성공한 이들은 이곳에서 정착하였다. 그렇게 결혼한 여러 쌍이 교회에서 자연스레 이중문화를 가능하게 하였다. 소수의 스위스 남편을 위해 예배에서 동시통역은 필수였다. 이후에 여러 경로로 스위스에 정착한 한인들이 있는데, 열거하기 어려울 만큼 그 갈래가 다양하다.

  취리히가 세계에서 수위를 다투는 도시가 된 까닭은 어쩌면 제한적 비자제도 덕분이란 생각이 들었다. 도시 전체가 흠잡을 데 없이 깨끗한 인상을 주는 배경에는 비교적 안정된 직장의 취업자에게만 머물 수 있는 권리와 자격을 준 배타성 덕분이다. 물론 쯔빙글리의 종교개혁도시인 만큼 가톨릭의 부패를 거부한 용기와 스위스 용병제도 등 오랜 관행과 맞섰던 시민의식이 뿌리가 되었을 것이다.

  자연친화적인 생활 덕분일까? 대부분 걷는 일에 관심이 많았다. 간호사 출신 중 한 분은 은퇴 후에 이미 두 차례 홀로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에 참여하였고, 또 한 분은 스페인의 출발지점인 피레네 산맥으로 연결되는 스위스 구간 420킬로미터를 날마다 걷고 있었다. 이 길은 독일 남쪽 콘스탄쯔로부터 프랑스와 인접한 제네바로 통하는 순례자를 위한 길인데 ‘야곱의 길’로 불렸다. 독일이나 유럽의 동쪽에서 출발하는 순례자들은 이 길을 걷는다.    

  1999년 여름, 처음 취리히를 여행하던 중에 샤갈의 스테인드글라스로 유명한 성 페터 교회 앞 광장에서 열린 벼룩시장에서 ‘십자가에서 웃는 예수상’을 구입한 일이 있다. 마치 값진 진주를 발견한 상인처럼 내가 가진 현금을 다 털었던 까닭에 다음 여정에서 곤욕을 치룬 기억이 생생하다. 옛 기억을 거스르면서 스위스에서 십자가 구하기가 참 어렵다고 투정했더니 즉각 반문이 왔다. 세계에서 가장 큰 십자가가 스위스라고 하면서, 스위스 국기가 십자가이고 여기는 적십자의 나라라는 것이다.    

  여행자의 눈에 신기한 것은 유모차의 존재였다. 어디에든 아기들과 이를 돌보는 엄마들이 있었다. 한국사회가 염려하는 낮은 출산율과 높은 고령화는 눈에 띄지 않았다. 언뜻 들은 바 스위스 교육은 페스탈로찌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러 교육원리 중에서 가장 바탕이 되는 것이 바로 가정교육이라고 하였다. 스위스에서 맞벌이 부부 수입 중 한 사람 몫은 자녀교육 비용일 만큼, 부담이 컸다.

  흥미로운 것은 모든 학교는 점심시간이면 문을 닫는데 모두 집에 가서 밥을 먹고 다시 오라는 뜻이다. 무상급식이나 방과 후 교실과 같은 대안제도가 없는 것이 신기할 정도다. 미련할 만큼 가정의 책임을 강조하고, 부대낄 정도로 부모의 역할을 강요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오히려 아이들을 많이 낳아 어떤 지역은 유치원을 증설해야한다고 하니, 참 묘한 사회이다. 물론 취리히에서는 유치원 2년 의무교육부터 부담 ‘제로’라고 했다. 아이를 낳게 하는 것은 바로 평화였다.

  취리히의 한인들은 곧 열릴 남북정상회담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들 역시 남과 북 그리고 해외 동포를 포함한 8천만 민족의 일원이기 때문이다. 북쪽의 지도자가 10대 시절 대부분을 스위스 베른에서 유학한 이유로 더 친근하게 느끼고 있었다. 비록 가까이 만나 볼 기회는 없었으나 스위스 터줏대감 한인들의 기대치를 부추기는 배경이었다.

  스위스 취리히에도 한인들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아주 오래 전에 고향을 떠난 디아스포라이다. 내일 모레로 다가 온 한가위에 취리히 호수 위에도 보름달이 뜰 것이고, 한글학교에서는 추석행사를 열 것이며, 시차를 따져가며 부모님께 떨리는 목소리로 명절 전화를 드릴 것이다. 아마 눈시울도 적실 것이다. 평화와 안정을 누리는 그들에게도 그리움은 언제나 텅 빈 가슴이다.

 

송병구 sbkbochu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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