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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나 소나 받는 복(福)

기사승인 2018.10.07  04:2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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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음'으로 포장한 무속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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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적 관념에서 복은 지극히 '물질적'인 용어다. 사람들은 이 글자를 좋아하여 대문, 기와장, 담벼락, 창, 등, 장롱, 이불, 옷, 밥사발, 숟가락, 심지어 요강에까지 각인하고 살았다.

이건 결코 그들이 내세의 소망이나 영혼의 구원을 갈망해서가 아니다. 전통적으로 동양인에게 '복'이란 아무리 고상하게 치장을 하더라도 다분히 현실적이며 물욕적인 개념이다.

구약 히브리어 '베라카'는 '축복'을 뜻하는데 이것도 주로 물리적 은총을 의미했다. 구약의 복 개념 역시 현세적, 물질적, 외형적, 그리고 육신적인 면이 강했다.

반면에 신약에서는 복의 개념이 크게 진보한 것을 보여준다. 신약은 철저하게 영구적, 정신적, 내면적, 그리고 영적이다(엡1:3-5). 하나님의 특별계시인 성경은 구약 역사 속에서 점진적으로 발전하여 사도 시대에 완성되었다.

가장 심각한 점은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보다 성숙된 신약의 '신령한 은총'을 강조하기보다는 주로 구약적이며 초보적인 철 지난 '기복 신앙'에 몰두하는데에 있다. 이를 한마디로 하자면 밥 놔두고 죽 퍼먹는 형국이다. 아니면 장성한 성인이 되어서도 여전히 젖병만 물고 있는 꼴이다.

 

원어 성경에 '복음'이란 용어는 없다

한글 신약에 '복음(복된 소리)'이라고 번역한 헬라 원어 '유앙겔리온(ε?αγγ?λιον, 라틴식으로는 에반게리온)'은 '좋은 소식' 또는 '기쁜 소식'이란 뜻으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이는 복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단어다.

영어의 'Evangelism'도 여기서 유래했는데 복과 무관한 이 단어를 한국에선 굳이 '복음주의'란 이상한 용어로 번역했다. 이걸 풀어 쓰면 '복된소리주의'라는 우스꽝스런 이름이 된다. 아울러 영어의 '가스펠(Gospel)' 역시 'God-Spell(하나님-이야기)'에서 유래되었으며 이 또한 복과는 아주 다른 단어다.

더구나 놀랍게도 한글 구약엔 복음이란 단어가 아예 단 하나도 없다. 이건 신약의 '복음'이란 번역이 매우 생뚱맞다는 걸 역으로 시사하고 있다.  

그래서 난 한글 신약의 '복음'이란 번역을 지지할 마음이 전혀 없다. 대체 누구 맘대로 '좋은 소식'을 그대로 직역하지 않고 엉뚱하게 '복음'으로 바꾸었나? 원래 중국인들이야 워낙 복을 좋아해서 그랬다지만, 무분별하게 그걸 왜 한국교회가 그대로 답습했는지 정말 답답하다. 이런 번역은 아주 무책임한 성경 왜곡이다.

차라리 영문 성경처럼 헬라어 원의를 살려 '복음' 대신에 'Good News(좋은 소식)'나 'Gospel(하나님 말씀, 하나님 이야기)'로 번역했어야 옳았다고 본다. 예수는 무슨 복으로 오신 게 아니라 하나님나라의 실상으로 오셨다(눅10:9).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예수 외에 다른 좋은 소식을 주신 적이 없다(갈1:7).

예수의 진리를 겨우 복이란 이름의 떡조각으로 용도 변경하지 말라는 거다. 물질의 복이란 하늘의 비와 같은 것이다. 하니님께서는 의인과 악인 구분 없이 골고루 비를 주신다. 그런데 허탄한 인생들은 틈만 나면 "돌로 떡을 만들어 달라!"고 요구하며 욕심을 부린다.

 

'무속적 복'은 금송아지 우상

신약 성경엔 물질적 기복 사상이 전혀 없다. 그 음성을 들으면 물질의 복을 받게 된다거나, 또는 물질의 복을 전해주는 소리로서의 복음이란 절대로 없다.

오히려 많은 교인들이 진정으로 성경의 예수를 만나는데 가장 큰 장애물은 바로 이 '복음'이라는 탈을 쓴 현세 기복적 무속 신앙이다. 어떤 교회에서는 돈과 권력과 무병장수와 무당목사라는 '금송아지 복음'이 예수의 이름을 대신하고 있다. 그러나 호박에 줄 긋는다고 그게 수박이 될 리가 없다.

만일 양가죽 뒤집어 쓴 이리들을 매주 강단에 세우고 거기서 참된 '좋은 소식'을 듣기 원한다면 과연 이는 얼마나 어리석은 행위인가. 그들은 예배마다 '복음 장사'와 '볶음 설교'로 교인들을 약탈하고 있다.

어떤 설교자들은 복이란 말을 너무 남발한다. 입만 열면 복타령이다. 그들은 그게 마치 '영적인 복'인 듯 애써 주장하지만 실제 행실을 보면 그 속마음은 '육신의 복'으로 가득 차 있다.

사도들은 "예수 믿으면 밭이나 밥이나 재물을 주겠다"고 가르친 적이 단 한번도 없건만 이들은 있는 복도 나갈 정도로 지긋지긋하게 복을 노래한다. 사실 강력한 무속적 수요가 있으니 여전히 맹신적 공급이 있는 거다.

어느 무속인이 겪은 실화다. 하루는 한 할머니 집사가 와서 점 보고 만원을 내밀며 "오천원은 교회 가서 감사헌금 낼거니 거슬러 달라"고 하시더란다. 점치러 오는 사람들의 약 삼분의 일이 기독교인이라는 말이 아주 근거 없는 낭설은 아닌 듯 하다.

 

일생을 건 혁명

일부 목사들은 틈만 나면 "예배 잘 참석해야 복 받는다", "기도 잘 해야 복 받는다", 또는 "돈 잘 바쳐야 복 받는다"고 복을 노래한다. 하지만 그런 설교는 종교적 사기다. 그것은 종교 장사치들이 날조한 무속적 복음의 전형적인 싸구려 전단지다.

많은 재벌들은 교회에 전혀 안 가도 돈과 성공과 번영을 누리며 건강하게 잘살고 있다. 예수를 몰라도 만수무강하는 사람들 아주 널렸다.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주신 '좋은 소식'이란 고작 그런 수준의 기복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산 변종 복음은 개신교로 위장한 양복무당들의 판촉용 특산품으로 변질하고 있다. 성도들은 이제 더 이상 '복음'이란 무속적 번역에 속지 말아야 한다. 예수는 이 땅에 육신의 복으로 오신 게 아니다. 그는 평생 가난하게 사셨다. 제자들 또한 모두 지지리 고생하다가 죽었다. 예수를 따르면 물질이 아니라 고난을 받는다.

원어 성경엔 '복음'이란 단어가 없다. 그건 사람이 만든 용어다. 마태는 단 한번도 '복'을 주겠다고 말한 적이 없다. '마태복음'의 '복음'은 아주 자의적인 번역이다. 영어 성경엔 그냥 '마태서'인데 한국에선 임의로 '복음'자를 추가했다. 이건 마치 '이사야서'를 '이사야복음'으로 번역하는 것만큼 어색한 것이다.

마태가 전한 건 본래 원문에 있지도 않은 '복음'이 아니라 '예수'다. 빈말이라도 예수를 '복'으로 포장하지 말라는 거다. 잘 먹고 잘사는 건 개나 소나 다 받는 복이다. 예수는 그런 복을 위해 오신 게 아니다. 예수를 따른다는 건 고작 세상의 떡을 누리자는 게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나라에 일생을 거는 거룩한 혁명이다.

 

신성남 / 집사, <어쩔까나 한국교회> 저자

신성남 sungnamshi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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