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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한국감리교회의 선교특성과 매일학교 운동

기사승인 2018.10.09  23:2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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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강의법학교와 서강여학교를 중심으로-

민족과 사회에 열린 선교

초기 한국감리교회의 선교특성과 매일학교 운동

-서강의법학교와 서강여학교를 중심으로-

노 종 해(CM리서치)
 

   
▲ 배재학당(1890년경)

 

1. 한국선교초기의 특성과 매일학교

     1882년 한미수호조약 이후 1884년6월24일 맥클레이 부부가 내한하여 고종황제로부터 교육과 의료사업을 허락받은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에 따라서 한국 최초의 선교사들은 의료와 교육 사업을 통한 선교계획을 가지고 1885년에 내한하였다. 의료선교는 1885년6월 서민을 대상으로 하는 병원이 스크랜튼(Rev, Dr W.B. Scranton)에 의해 세워졌고, 아펜젤러(Rev, H.G. Appenzeller)는 1885년7월에 예배처(Chapel)를 준비하였고, 학교는 8월에 시작되었다.

    1885년10월에는 미감리회 해외여성선교회 파송으로 메리 스크랜튼(Mary F. Scranton) 여사에 의해 여성을 위한 예배처(Chapel)와 교육 선교처(학교)가 준비 되었고, 1886년5월에 여학교가 시작되었다. 이때 시작된 남.녀 학교는 고종황제로부터 1887년2월 “배재학당”(培材學堂)이란 교명(校名)과 “이화학당”(梨花學堂)이란 교명(校名)을 받아 교육선교에 격려와 용기를 얻었다.

     한국감리교회의 첫 예배처(Chapel)는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의 교육선교를 병행하여 형성되었으며, 그 후 교회가 서는 곳마다 매일학교가 설립되어 나갔고,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은 각처에 설립된 매일학교의 모본이 되었다.

 

   
▲ 이화학당 학생들(1890년대)

 

    여기에서 초기 한국감리교회의 선교적 특성을 찾을 수 있다. 교회설립은 의료와 학교로 전도와 직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병원”은 의료선교의 본부와 지휘부가 되었고 각처에 “시약소”(Dispensary)를 세웠다. “배재학당”과 “이회학당”은 상급학교(High School)로 교육선교의 중심이 되었고 각처에 매일학교(Day School)의 모본이 되었다. 이러한 시약소와 매일학교(Day-School)들은 예배처(Chapel)와 병행하여 각 처에 교회(Church)를 이루게 된 점이 한국감리교회 선교와 교회의 특성이다. 즉, 정동병원을 중심으로 “아오개 시약소”(아현교회), “상동 시약소”(상동교회), “동대문 시약소”(동대문교회) 등이 설립되어 나갔다. 또한 정동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을 중심으로 “아현 여학교”, “상동 매일학교”, “동대문 매일학교”, 인천 매일학교, 평양 매일학교, 공주 매일학교 등으로 설립되어 나갔다.(참조-이상금: 한국근대유치원교육사, 이화여대출판부 1987. pp57-59.)

     1905년 엡웟 청년회가 해체 되었을 때, “정동 의법(엡윗)학교”는 서강으로 옮겼으며, 서강, 마포, 염창, 창천, 공덕리, 왕십리, 용두리 등 각처에 매일학교가 설립되어 교회 있는 곳에 매일학교가, 학교 있는 곳에 교회가 설립되었다. 이러한 매일학교들은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의 예비학교로써 초등교육기관과 선교전초기지가 되어 서민대중과 직접 만나는 처소가 되었다.

     더욱이 1894년 동학란(東學亂)과 청일전쟁(淸日戰爭)을 거치면서 기울어져가는 국가 정세를 보며 민족을 자각시키는 애국계몽의 일환으로 매일학교운동은 확산되어 나갔다. 이점에서 한국감리교회의 선교는 민족과 사회를 향한 열려진 선교를 펼쳤다. 이러한 사실은 초기 감리교 연회록(監理敎年會錄)을 통해서 볼 수 있다.

     1896년 조선감리교회 연회록을 보면 스크랜튼 감리사는 “매일학교를 강조한다”하였고, 매일학교는 정동의 배재와 이화학당을 모본으로 상동, 동대문, 제물포, 평양에 훌륭하게 설립, 운영되어 감리교 선교에 큰 힘이 되고 있음을 강조하며 보고하였다. 이러한 학교는 “지혜의 근원이신 주님을 경외할 줄 아는 것이 학교의 근본입니다.”라고 하여 교육과 전도가 직결되어 있음을 가르쳐주고 있다.(Annual Report of M.E.C,1896. p23ff) 여기에서 우리는 1896년 이전에 이미 각처에 매일학교가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899년 연회 때 아펜젤러 선교사의 보고에서도 “이화학당 부인들이 앞을 내다보고 설립한 매일학는 전도사업의 중심이 되고 있으며, 주일예배 드리는 곳마다 증가하고 있다”고 말했다.(Annual Report of M.E.C,1899. p26.) 또한 1901년 연회록에도 “매일학교는 현재 우리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라 하였고, 매일학교를 통한 전도의 효과를 기뻐하였다.

     특히 매일학교사업은 폴 앤드류기념재단(Paul Andrew Memorial Fund)에서 재정지원을 특별히 해주어 더욱 활발하게 되고 있음을 보고하였다. 이러한 재정적 후원으로 정동교회 뿐아니라 상동매일학교, 제물포매일소년학교 등이 세워졌고, 뉴욕의 볼드윈 박사(Dr S.L. Boldwin) 기금으로 “볼드윈 매일소년학교”(동대문 매일소년학교)가 세워지기도 했다.(Annual Report of M.E.C,1901. p23)

     1902년 연회록에서 죤스(Jonse) 선교사의 보고에 보면 교회에 부설된 매일학교는 11개의 소년매일학교(Boy’s-Day School)에서 약 2백 여명의학생을 가르치고 있으며, 15개의 소녀매일학교(Girl’s-Day School)에서 약 2백 여명의 여학생들도 가르치고 있다고 보고하면서, “교육선교는 매년 더욱 강화하여야 함”을 감조하고 있다.

     또한 한국교회는 청년들을 교육시켜, 초등학교(Primary School)를 이루어 나가야 하며 교육자료는 구역회에서 계속 주어져야 함도 강조하였다. 당시 매일학교는 외국의 보조 없이 유지되었으며, 모든 학교가 학교발전을 위해 교인들 스스로 참여하고 있음이 기쁘다고 죤스 선교사는 보고하였다.(Annual Report of M.E.C,1902. p24)

 

   
▲ 1890년대 어린이들

 

    여기에서 우리는 당시 감리교회가 남녀를 차별하지 않고 교육하였으며, 오히려 여학교 수사 더 많은 것으로 보아 여성교육에 앞장섰음도 알 수 있다. 또한 당시 교회는 세상을 향해 열려져 있는 교회임도 알 수 있다.

     교회의 부설 매일학교는 외부의 재정지원 보다도 실제로 한국교인들 스스로에 의해 설립운영 되었다. 배재나 이화, 광성학교 등은 선교부에 의해서 지원되었으나, 교회의 매일학교는 선교사들이 주재하는 교회를 제외하고는 교인들의 열성과 헌신으로 유지되었다. 매일학교의 교육과 선교가 직결되었음은 하운셀(C.G. Hounshell) 선교사의 1904년 배재학교 보고에서도 볼 수 있다.
 
    “학교는 감리교 소년들과 감리교 부모의 자녀들로 구성되어 있다. 다른 사람들도 우리의 신앙예식에 참여한다면 우리는 그들을 환영하고 즐거이 가르친다. 모든 학생들도 규칙적으로 교회에 참석토록 요청하며 날마다 기도하며 성경 읽도록 한다. 각 반은 매일 성경공부하고 학생들을 기독교의 교리와 원리의 지식 없이는 학과를 이수할 수 없게 되었다. 특별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도록 학생들에 의해 전도가 실시된다.”(Annual Report of M.E.C,1904. p55)

    노블(W.A. Noble) 선교사는 연회보고에서 당시 매일학교 운동의 열심과 성격을 밝히고 있다. 즉,

  “배재는 우리의 조직된 소년학교(Boy’s School)의 대표이다, 새로운 열정적인 정신이 학교생활에서 일어나고 있다. 우리의 매일학교에는 수천의 소년들이 있다. 나는 그들 스스로가 학교설립에 참여하며 유지하는 것을 볼 때 매일학교를 교회의 중요한 사업으로서 추천한다. 이러한 일를 이루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계삭회(The Quarterly Conference)에 위원을 임명하는 것이다. 이러한 학교는 교회의 유능한 사람들이 선택되어 돌보아지고 조직되어야 한다. 큰 문제는 교사 선발이다.”(Annual Report of M.E.C,1904. p55)

     여기서는 한국인에 의해 설립되고 운영된 매일학교를 “서강감리교회”(西江監理敎會. 창립:1902년)와 병설인, “서강의법학교”(西江懿法學校)와 “서강여학교”(西江女學校)를 중심으로 한국감리교회의 매일학교 운동을 밝혀 보려한다.

 

2. 서강의법학교(西江懿法學校)


 

   
▲ 경성의법학교(서강의법학교와 서강여학교 통합) 전경-사진: 교장 최희명 선생

 

    한국의 비선교계 첫 민간인 사립학교는 1895년 민영환(閔泳煥)에 의하여 설립된 흥화학교(興化學校)로 이 학교는 주로 영어와 일어를 가르치는 외국어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세운학교이다. 흥화학교는 민영환의 순직 이후 경영이 곤란하여 1911년 폐교되었다.

     을미의숙(乙未義塾)은 흥화학교와 같은 때에 세워져 주로 일어를 가르쳤으며, 1897년에는 안창호(安昌浩) 선생이 강서(江西) 지방 고향에 점진학교(漸進學校)를 세웠다. 1901년에는 서광세 선생이 낙연의숙(洛淵義塾)을 설립하여 일어와 보통학과를 가르치며 사범과를 두어 교사양성에 힘쓰다가 1916년에 폐교되었다.(참조-吳天錫:韓國敎育史,서울,現代敎育叢書出版社,1984.pp110-111) 1902년에는 서강(西江)에 양재건 선생이 우산학교(牛山學校)를 세웠다.(李萬珪:朝鮮敎育史,下)

     당시는 학교라 하지만 교사 1-2명에 교실 하나로 수시로 입학하는 실제로 서당과 같은 학교들이 많았다. 이에대해 오천석 선생은 다음과 같이 지적하며 평하였다.

    “신문학 가운데도 가장 시급한 것은 외국어의 지식이었다. 이것이 돌연한 국제무대에 등장하게 된 우리나라의 시대적 요구이기도 하였다. 이에 민간인의 힘으로 특히 영어와 일어를 가르치는 학교가 서게 되었다.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고 시대의 요청에 따라 학교를 세우는 유지가 있는가 하면 개중에는 시국에 편승하여 영리를 목적으로 학교를 세우는 사람들도 없지 않았다. 따라서 어학의 지식이 무엇보다도 출세와 취직의 첩경으로 생각한 젊은이들이 이러한 학교로 몰려든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학교의 수명은 길지 못하였다. 본격적인 학문을 공부하는 데가 아니라 일시적인 어떤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곳이었던 만큼 그 요구가 약해지거나 없어지면 학교운영도 따라서 결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재정적 기반이 약한였던 이들 초기의 민간학교는 오래 계속되지 못하였다.”(吳天錫,韓國敎育史,pp109-110)

     이러한 때에 최병헌(崔炳憲) 목사는 1904년에 감리교청년회인 의법회(懿法會,엡윗회)를 확장하며 정동 엡윗청년회 내에 “의법학교"(懿法學校)와 "몽양원"(蒙養園)을 설립하였다. 특히 의법학교는 ”국정(國政)이 나날이 시들어감을 분히 여기며 탄식하여서 자존자립(自存自立)의 정신을 고취할 목적“으로 설립하였다.(金鎭浩,”故 擢斯 崔炳憲先生 略歷“,神學世界 第12卷2號,p101-102.몽양원은 유치원과 같은 과정임)

       최병헌 목사는 가난하여 배우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주어 백성을 깨우쳐 국가와 민족을 위한 인재를 양성시키고 교회의 지도력을 배양시켜 민족복음화를 이루기 위해 의법회 경영으로 야간학교를 시작하였다. 1906년만 해도 이 야간학교에 1천명 이상의 학생들이 공부하였다.(Annual Report of M.E.C,1907.p409) 이 야간학교는 성경교육 뿐만 아니라 일반교육도 시켰는데, 낮에는 학교에 나갈 수 없는 청소년들도 몰려왔다.

 

   
▲ 서강의법학교 아침조회

 

    서강의법학교(西江懿法學校)는 1905년에 최병헌 목사에 의해서 서강교회(西江敎會) 부설로 설립되었고, 교사로는 방진국(方鎭國) 선생이 배재학당과 연관하여 담당하였다. 이러한 때에 최병헌 목사는 1907년 서강에 있던 우산학교(牛山學校)가 경영난으로 허덕이게 되자 이를 인수하여 서강의법학교는 더욱 발전하게 되었다.

     서강에 있는 사립 우산학교는 1902년 지역인사 양재건 선생이 사재를 털어 설립한 학교로 1906년까지 경영하였다. 교사는 이기정(李起錠), 조병화(曺秉和) 선생이었고 독서, 작문, 습자,지지(地誌), 미술과목을 가르쳤으나 경영난에 부딪쳐 고심하던 중 최병헌 목사가 인수하여 서강의법학교로 흡수되었다. 우산학교는 광무10년(1906년) 6월에 졸업생 박윤식(朴潤植)이 제10회 졸업증서를 받은 것으로 보아서 적어도 1906년까지 존재했었음을 알 수 있다.(牛山學校 第10回 卒業證書, 朴潤植)

     서강의법학교 설립연도에 있어서는 여러 의견이 있다. 감리교연감(1935년)에는 1907년으로 나와 있고, 1935년 연합운동회 때 의법학교에 대하여 1909년 설립 된 것으로 나와 있지만 이는 정확한 것이 아니다.

    이미 1909년 의법학교는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하였음으로 그 이전에 설립 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 점은 의법학교를 졸업한 장로교회 최석주 목사도 지적하고 있다.

     또한 1907년 염창(鹽倉)에 의법학교(배재소학교)를 설립할 때 서강의법학교 교사인 방진국 선생이 담당한 것을 보아서도 이전에 서강의법학교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孫元學, 鹽倉敎會略史,鹽倉敎會.1938年) 방진국 선생은 1905년에 서강의법학교 교사로 오신 분이다. 이 사실은 1935년 서강교회를 건축하기 위해 구 교회를 헐었을 때 그 정초에서 나온 서강교회 역사에서 방진국 선생의 이름이 1905년으로 기록되었음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 때 나온 서강교회약사는 일제말기 교회가 합병되고 폐쇄되는 과정에 관리소홀로 분실되고 말았다.(서강교회 교인들의 증언)

     서강의법학교는 1905년에 설립되었으며, 1907년에 서강 우산학교를 인수하였고, 1910년 조내덕 전도사 때 학교를 창전동(倉前洞)으로 옮겼다. 의법학교 건물은 한옥으로 초창기에는 교회와 함께 사용하였으며, 초대 교장은 최병헌 목사였고 교사는 방진국 선생이었다. 방진국 선생은 1907년 조내덕 전도사가 서강교회 전도사로 부임하기까지 교회예배도 인도했다. 서강의법학교는 배재학교와 연관되어 있으며, 정동구역의 의법회(엡윗회) 지원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엡윗청년회는 1897년5월5일에 정동교회에서 조직된 한국최초청년회였다. 초대 총무는 조원시(Jones) 목사였고, 연회위원은 노블(Noble) 선교사이며, 배재학당 대표 노병선, 제물포대표 김기범, 달성(상동)교회 대표 이은성이였다.

     서강의법학교는 최병헌 목사가 심혈을 기울여 설립한 학교였다. 우산학교에서 의법학교로 전학하여 서강의법학교를 1909년 제1회 졸업한 분 가운데는 연세대학 부총장까지 지내신 한글학자 김윤경(金允經) 선생 같은 분도 계신다. 김윤경 선생은 서강의법학교를 졸업할 때 최병헌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기도 하였다.(문효근,“주시경 선생의 후계자 김윤경 선생”, 나라사랑 제4집.1971.p157. 배화60년사,1958.pp285-286)

     의법학교 초창기에 대하여 제4회 졸업생인 최석주 목사(장로교)는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다.

“서강교회는 그 당시 모든 교회들이 그러했듯이 교육사업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였다. 서강에 의법학교는 바로 서강교회의 중대한 사업이었다. 이 학교는 나에게 유일한 모교라 할 것이다. 나의 시대, 나의 환경은 학교에 다니기를 허락지 아니하였다. 반쯤 하다 그만두게 되고 시작만하고 끝을 보지 못하곤 했었는데 이 의법학교만은 완전히 시작해서 졸업한 학교이다. 그때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돈푼이나 있는 이들이었고 풍조에 예민한 사람들은 공립보통학교에 가는 것이 능사였다. 그 나머지 중에서 더러는 예수학교라도 좋다고 생각하여 의법학교에 보내게 되었던 것이다. 이 학교는 적지 아니 허술하여서 뚝배기학교하는 별명이 붙어 있었다.“(崔錫柱,”恩寵은 江물같이“,서울,CLSK,1975.p43-46)

     최석주 목사는 “당시 교사로 음악지도에 김동익(金東翼) 선생, 국어 한문에 박영진(朴英鎭) 선생, 일어에 박병제(朴秉濟) 선생이었고, 동창으로는 고성진(高星鎭), 박연우(朴淵瑀), 이택주(李澤周) 최등만”이라 회상하고 있다.(최석주,恩寵은 江물같이,p47)

     서강의법학교는 일제치하에서 꿋꿋하게 선교부의 보조 없이 자력으로 운영되었다. 1928년에 발행된 “The Korean Mission’s Year Book”에 보면 당시 서울의 세 교회만이 선교부의 보조 없이 운영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The Korean Mission’s Year Book, Seoul CKSL,1928. p61) 당시 서강의법학교 교사는 서강교회 담임목사인 이필주(李弼住) 목사를 비롯하여 정호석, 강준표, 이계창 등 서강교회 임원들이었다.

     서강의법학교는 1935년3월21일에 제26회 졸업식을 하였으며, 총 졸업생 수는 315명으로 명실공히 국가와 사회 및 교계의 유능한 인재들을 날로 양성하고 배출하였다.(참조:기독교조선감리교회요람,1935-1936)

     1930년 대에는 백아덕(白雅悳,Arthur L. Becker) 선교사가 연회전문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교장직을 맡아 수고하였다. 교사는 5명이고 학생수는 327명으로 서울 서대문 밖으로는 굴지의 학교였다.(참조:기독교조선감리교회요람,1935-1936. 조선감리회 중부연회 제16회 회의록,1937. p8)
 

 

3. 서강여학교(西江女學校)
 

   
▲ 서강여힉교 교직원-우측:이필주 목사/이계창 선생(전도사,장로)

 

     서강여학교는 이화학당 부속여학교로 당시 서울지역 매일학교부에서 파송 받은 선교사와 한국인 교사에 의해서 설립 운영되었다. 서강여학교는 1907년에 이화학당 부속여학교로 설립되었는데 이화학당은 “한국인이 한국인으로 긍지를 가지고 나아가서 그리스도와 그의 교훈을 통하여 완전무결한 한국인”을 만드는 것을 교육목적으로 삼고(梨花八十年史,梨花出版部,p89), 여성교육의 황무지를 개척하엿다. 이화학당은 초기에 학생모집에도 어려움이 많았고 운영에 있어서도 어려움 속에서 성장하였다. 졸업생도 일정한 학칙에 따르지 않고 기혼여성 이외에는 결혼을 하면 졸업해 버려 일정한 학령(學齡) 없이 같이 숙식하며 한 교실에서 수업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가운데 이화의 첫 졸업식은 창립23년째 되는 1908년6월18일이며, 5명을 졸업시켰을 정도이다.(梨花八十年史,梨花出版部,p73)

     그러나 1886년부터 1907년까지 이화를 거쳐나간 사람들은 약 50명 정도 되는데 이들 대부분은 고난과 시련의 사회환경 속에서도 이화학당에 있는 동안 배우고 익힌 그리스도의 신앙과 정신으로 그들이 처한 사회 속에서 개척자와 봉사자가 되었다. 이들은 교육뿐만 아니라 교회와 의료사업 방면으로도 뻗어나가 자신들이 배운 바를 가르치며 전달하며 봉사하는 것을 사명으로 알았다.(梨花八十年史,梨花出版部,p83)

     교육방면에 있어서 이화에서 직접 가르친 분도 있었으나 대부분 산하 소학교(小學校)로 흩어져 그들이 가는 곳마다 학교를 세우는 일을 하였다. 이들 중에는 자기 집의 방 하나를 교실로 꾸며 여아(女兒)들을 모아 가르치는 사람도 있었다(아현여학교).(梨花八十年史,梨花出版部,p84)

     서강여학교는 1907년 홀 부인(Dr, Mrs Rossetta Sherwood Hall,1865-1956)의 주선으로 이화학당부속 소학교로 설립되었다. 서강여학교는 서강교회 옆에 붉은 벽돌 2층의 현대식 건물로 설립되었다. 당시 서강여학교를 지도하던 분들은 이화학당의 학당장인 프라이(Miss Lulu E. Frey) 선교사였고, 이화학당의 매일학교를 위해 파송된 선교사는 역시 이화학당장을 지낸 페인(Josephine D. Paine)과 제시 마커(Jessie M. Marker) 선생이었으며, 서강지역 전도에 힘쓰던 밀러(Mrs, Hugh Miller) 선교사였다.

 

   
▲ 서강여학교 11회 졸업기념(1927)-교장:로이스 선교사/우측:이계창 선생

 

    서강여학교에 대해서 최석주 목사는 “의법학교에는 같은 교회 안에서 자라난 이화학당 부속 서강여학교라는 자매학교가 있었다. 이 학교는 서강교회를 중심한 여자 교육기관으로 붉은 벽돌2층 건물로 작기는 하였지만 교회당이 양철지붕이요, 의법학교가 다소 비뚤어진 재래식 기와집인데 비교해 보면 이채를 띤 학교였다. 그 중에도 그 학교 선생들은 대체로 문 안에서 나오는 분들이 있어서 동리에서는 다소 색다른 존재이었다”라고 회상하였다.(崔錫住, 恩寵은 江물같이. p44)

     당시에는 교회마다 교육선교활동을 하였다. 서강 마포지역 만해도 여러학교들이 있었다. 공덕리여학교(1908년), 잔다리교회(細橋里敎會)에도 1906년에 소학교가 설립되었다. 동막교회(東幕敎會)에도 후에 흥영학교(興英學校)가 있었고, 창천교회에도 창천소학교, 염창교회에도 염창배재소학교가 있었다.(朝鮮예수교長老會史記,1928年刊. p177)

     1912년 연회록에 보면 서울에만도 46개 교의 매일학교가 있었다고 보고되었고, 소녀매일학교(Girl’s Day School)은 이화와 연관되어 있다고 보고하였다.(Annual Report of M.E.C,1912. p63) “The Korea Mission’s Year Book”(1928년 발행)에 보면, “서울에 11개교의 초등여학교가 있는데 모두 이화학당 부속학교이며, 여성해외선교회(W.F.M.S)의 관리 아래 있다”고 하였다.(The Korea Mission’s Year Book,1928. p61)

     서강여학교는 1927년에 이화학당의 로이스(Edith Royce) 선교사가 맡아 가르쳤으며, 1928년에는 아다 홀(Ada B. Hall) 선교사가 교장으로 봉직하며 가르쳤다. 아다 홀 선교사는 여선교부의 회계였으며, 이화전문학교 교수였고 이사(理事)로서 서강여학교를 1937년까지 10년 동안 맡아 교육선교를 담당하였다. 1932년까지 졸업생 수는 144명이며 재학생 97명에 교사는 3명이었다.(기독교조선감리교회요람, 총리원 발행,1936. 중부연회록,1937년. p8)

 

   
▲ 서강여학교 제13회 졸업기념(1929.3.18.)-이계창 선생(좌측), 이필주 목사(우측)

 

   
▲ 서강여학교 제14회 졸업기념(1930년3월20일)-왼쪽:이필주 목사/중양:아다 홀 교장/우측:이계창 선생

 

    1934년 경성지방 감리교여학교 연합추기대운동회가 모였는데 그때 참가한 여학교는 서강여학교, 왕십리여학교, 아현여보(阿峴女普), 용두리(龍豆里), 공덕리, 동대문여보(東大門女普), 연화봉여학교(蓮花峯女學校)였다.(監理會報,2권11호.통권23호. p10) 서강여학교 교사인 이계창 선생은 1934년3월24일에 조직된 기독교 조선감리회 초등교육연맹총회의 교과서 편수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감리교회의 초등교육총회는 “감리교 안에 있는 초등교육기관의 상호연락과 특히 종교교육의 통일과 실행을 기(期)하여 조직된 단체”이다. 이 총회는 1934년3월24일 기독 청년회관(YMCA)에서 모였는데, 각 남녀학교 대표와 교육국 대표로 구성되었고, 학생종교문제, 학교보건문제, 연맹복지문제, 사업실시문제를 토론하였다. 총회의 결의는 성경 준수를 위해 학생과 교사에게 적합한 교과서를 편찬하기로 하고 교과서 편찬위원은 이계창, 전경준, 이동욱, 최희명, 배덕영 제씨였다.(감리회보,2권11호, 5호. p5) 이계창과 최희명 선생은 서강여학교 교사였다.

 

4. 서강의법학교와 서강여학교의 통합과 폐쇄

   
 

   
▲ 경성의법학교, 제31회 졸업기념(1940년/중앙: 김형욱 선생)
   
▲ 경성의법학교 제31회 졸업생 명단(졸업기념 사진 명단)

 

    일제가 태평양전쟁으로 치닫던 1940년 선교사들이 추방당하면서 서강여학교가 폐쇄되어 사강의법학교와 통합됨으로 남녀공학이 되었고, 학교명도 “경성의법학교”(京城懿法校學)로 개명되었다. 1940년 제31회 경성의법학교 졸업기념 사진첩을 보면 학교상황이 기록되어 있다. 교장은 최희명(崔喜明) 선생이며, 교사로는 김정억(金正億), 최윤용(崔允龍), 김형욱(金炯旭), 한상만(韓相萬), 조진(曺瑱), 박기원(朴基原), 최한호(崔漢鎬)와 일본인 교사 장기희세야(長埼喜世野), 이숙자(李淑子), 선생이었다. 제31회 졸업생은 남자47명, 여자3명으로 졸업생 총수는 50명이었다.(京城懿法校學,第三十一回卒業記念. 昭和十五年(1940))

     일제말기 태평양전쟁시 1944년 7월 7일 중일전쟁 7돐을 맞으며서 애국기(愛國機)를 헌납키 위해 교회들을 합병하고, 폐쇄된 교회와 부동산은 매각처분하여 군용기 3대(감리교단호)와 군용기 헌납금 예정액 21만원을 충당한다고 1944년3월7일 감리교단 상임위원회에서 결의하였다. 이때 폐지된 교회수는 36개 처였고, 30여채의 주택과 20여채의 부속건물들이 매각처분 되었다.

     서울의 교회는 13개처 교회가 매각 폐지되었는데, 즉 상동교회, 광희문교회, 용두리교회, 석교교회, 채부동교회, 답십리교회, 성북교회, 이태원교회, 도화교회, 마포교회, 서강교회였다.(基督敎新聞,85號(昭和19年), 88號) 서강교회와 경성의법학교도 이때 매각되었다. 교회는 7천원에 팔렸고, 학교는 교육사업을 좋아하는 지역유지 유성준에게 3만5천원에 매각되었다.

     유성준은 학교를 매입하였으나 얼마 동안 운영하다가 경영에 실패하여 해방 후 학생들만 오늘날의 “서강국민(초등)학교”로 넘겨주었다. 선교초기부터 민족구국, 애국계몽과 선교에 앞장서 온 서강의법학교와 서강여학교는 수난과 고통 속에서도 꿋꿋이 한국인 스스로의 힘으로 유지되었다가 이렇게 폐지되고 말았던 것이다.(盧宗海, 西江敎會八十五年史,1986. p229)

 

5. 맺는말

 

     한국감리교회의 매일학교(每日學校) 운동은 실제로 한국기독교 선교 초기부터 실시된 것으로 기독교선교와 교회설립은 물론 민족을 자각시키고 계몽시키며 민족국국운동에 앞장서게 하는 한국 근대민족의식 형성가 민주주의 훈련에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또한 정규학교를 가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주어 사회 진출케 하는 인재양성과 사회봉사의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선교사에 의해서 유지되기 보다는 한국인 스스로에 의해서 운영되고 교육되었다는 데서 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한국교육과 역사교육 등으로 민중을 계몽시키고 민족의 주체가 민중임을 각성시켜 민족 주체의식을 갖게 하며 민족문화의 저변을 확대시키는 데 공헌하였으며, 또한 여성(女性) 교육에도 힘써왔다.

    한국감리교회의 매일학교 운동은 1905년 을사보호조약 이후 더욱 왕성하여졌으며 민족구국과 애국신앙 고취를 위해 애국계몽운동으로 전국각지로 퍼져 나가게 되었다. 매일학교는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사립학교에 의해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기관으로 지목받았고 감시와 탄압 속에서 점차 쇠퇴하게 되었다. 1919년 3.1운동 이후에는 교육령에 의해 배재, 이화, 광성, 호수돈. 정신, 경신, 숭실 등 선교부가 지원하거나 운영하는 외에는 유지되기 힘들었으나 민족의식이 투철한 인사들과 교인들에 의해 일제말기 최후까지 존속해 왔다. 또 한편 사라졌다가 무산아동야학으로 1920년대와 1930년 되살아나기도 하였다. 앞으로 매일학교 운동은 다각적인 방면으로 더 깊이 연구되고 밝혀져야만 할 것이다.

 1. 당시 교회마다 교육활동 하였으며, 서울 마포지역에도 여러 매일학교들이 있었다. 그러나 한 교회에 남.여학교가 각가 설립된 교회는 없었다. 서강교회(창립:1902년)는 의법학교(남)와 여학교를 병행 운영하였고, 학교 교사들은 교회 전도사 등 임원이기도 했다. 서강의법학교와 서강여학교 1911년 졸업식 소식이 “그리스도회보”에 보도 된 것을 보아 알 수 있다.

 “의법졸업-서강교회에서 설립한 의법학교와 이화학당부속 녀소학교 졸업식을 거월 31일 하오 2시에 행하였는데, 남 졸업생은 문귀인, 김영호, 정성윤 등 8일이요, 여 졸업생은 최경숙, 민춘순, 김수정, 이민경 등 4인이요, 남녀 진급생이 36인 인데 당일 내외국 내빈이 수천여 명에 달하였고 남녀학도부형제씨의 연조금액이 35원이요 또 내외국 신사제씨가 공책과 연필 등물을 다수히 기부하였다더라".(그리스도회보,1911년7월30일)


2.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에 서강의 남녀학교도 주동이 되어, 마포지역 교회와 주민들과 함께 열렬히 진행하여 희생과 옥고를 치루었다. 서강의법학교 교사요, 전도사(장로)인 정호석(鄭浩錫) 선생, 서강여학교 교사요 전도사(장로)인 이계창(李桂昌), 교회유사(재무부장)인 강준표(姜俊杓) 선생 등이 앞장서서 학생들과 함께 태극기를 그리고 깃대를 높이 세우고 마포지역 주민들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연일 투쟁하였다.

서강교회와 남.녀학교의 3.1독립운동 투쟁소식은 “3.1운동 재판기록”과 “상해독립신문”의 “옥중비화”란 보도 등을 통해 알 수 있다.(獨立運動史料集,第5輯. p107-110. 上海獨立新聞,元年9月13日)


3. 서강의법학교와 서강여학교는 일제말(1944년)에 지역 민간인에 매각되고, 교회는 이웃교회로 통합 폐교 되었으나, 학생들만은 “서강초등학교”로 전학되었다. 그러나 서강교회(西江敎會.창립:1902년)는 해방 직후 흩어졌던 성도들이 모여들어 와우산(臥牛山) 중턱에 교회를 다시 세우고 여의도 국회와 유유히 흐르는 한강을 바라보며 민족과 세계를 향해 오늘까지 꿋꿋이 증인으로 서있다.(rch)

 

   
▲ 마포 서강 와우산 중턱에 우뚝 선, 서강감리교회 전경(창립:1902년/창립100주년:2002.년)

 

   
▲ 서강교회 교육관과 뒷편 교회 십자가탑(2018)-서강 남.여매일학교를 기억하고, 어린이교육과 사회복지 활동을 이어가

 

 

노종해 rocha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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