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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통을 지고 온 동네를 돌아라!”,오히려 기뻐해

기사승인 2018.10.17  21:3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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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통을 지고 온 동네를 돌아라!”,오히려 기뻐해
-신사참배 거부 순교자 최인규 권사의 생애와 신앙-


노종해(CM리서치)

   
▲ 신사참배 순교자, 최인규 권사 흉상 부조(2018)


1. 신사참배와 한국기독교

 

   한국기독교사에 있어서 신앙의 굴절과 쓰라린 아픔의 사건은 일제 군국주의자들에 의해 강요된 신사참배 사건이다. 이 사건은 한국교회에 아직도 아물지 않은 깊은 상처를 주었고 지금도 때마다 거론되어서 신앙의 정통시비를 일으키기도 한다. 신사참배 문제는 한국 기독교의 걸림돌로써 시원하게 해결치 못하고 서로 반목하고 갈등, 공격하는 근거가 되곤 한다.

 

   
▲ 조선신궁-남산 신사 오르는 길
   
▲ 남산 조선신궁(1918년 착공, 1925년 완공)-매월 6일 애국일(愛國日)로 정하고 신사참배 강요

 

   일본 치하에 있어서 신사참배는 조선의 일본인들에 의해서 시행되어 왔다. 1912년부터 조선신사(朝鮮神社)가 계획되었고 1918년 서울 남산에 공사를 착수하여 1925년 6월에 조선신궁(朝鮮神宮)을 완공하였다. 신사참배는 일본인들에 의해 시행되어 오다가 1936년 8월 제7대 미나미(南次郞) 총독이 부임하면서 조선통치 수단과 조선민족말살 정책으로 본격적으로 강요되었다. 초기에는 기독교계 학교에 강요되었고,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이 일어나면서부터 더욱 강화되어 1938년부터는 교회지도자들에게까지 강요되었다.

 

   
▲ 평양신사-남산 조선신궁 외 두번째로 크다는 평양신사

 

  장로교회는 1938년 2월 9일 평양노회에서 신사참배를 국가의식으로 인삭하고 참배를 결의하였으며, 평서와 안주노회가 뒤따라갔고, 총회 전에 이미 전국 23개 노회 중에서 17개 노회가 신사참배를 실시하고 있었다. 9월10일 평양 서문교회에서 열린 제27회 장로회총회 첫째날 일경의 감시 속에 신사참배 안을 결의 통과시켰고, "紳士는 宗敎가아니며, 基督敎 敎理에 違反치 않고, 紳士參拜가 愛國的 國家儀式으로 率先하여 國民精神總動員에 參加하여, 皇國臣民으로 奉國을 다하기로 함 "이란 성명서를 발표한 후, 즉시 총회장 홍택기 목사, 부회장 김길창 목사(임원대표)와 각  노회장들이(회원대표) 총회를 대표하여 평양 신사(紳士)에 참배(參拜)하였다.

 

   
▲ 朝鮮예수교長老會 總會 第二十七回 總會錄과 "聲明書"(1938.9.10.)-“神社參拜를 率先하고...”
   
▲ “平壤紳士參拜하는 長老會總會代表“(사진)-朝鮮日報, 昭和十三年(1938) 九月十二日(月曜日)


   감리교회도 1938년 10월 제3회 총회 때 일제의 강압에 따라 10월 7일 총회 세째날 배재학교 운동장에서 애국일 행사를 하고 총독부를 방문하여 미나미(南次郞) 총독의 권고를 들은 후, 총회원 일동은 남산신궁에서 신사참배 하였다. 총회장 양주삼 총리사는 개회강설에서, "천황, 황후 양폐하의 만수무강을 봉도하며 황국의 영광이 세계에 발휘 되기를 기도합시다" 하였으며,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황국신민 될 의무가 있다"고 강조하였다. 이렇게 각 교단 총회는 신사참배를 결의하였고 1938년 12월 12일에는 전 조선기독교 대표를 일본에 파견하여 일본 이세신궁을 순례 참배케 하였다.
 

   
▲ 기독교조선감리회 제3회 총회회의록(소화13년, 1938.10.5-13.)-총회원 일동은 애국일을 실행하고 황국요배
   
▲ 조선감리교 제3회 총회 때, 1938년10월7일 총리사 양주삼 목사 인도로 남산 朝鮮神宮에 參拜 기사(朝鮮監理會報, 第八十七號, 昭和13年11月1日 發行)

 

  그러나 모든 교회가 다 신사참배 한 것은 아니다. 교단 총회와 지도자들은 강압에 굴복하였지만 개별적으로 전국 각지에서 신사참배 거부운동이 일어났고 이에 말할 수 없는 박해를 받았다. 장로교회는 1938년 9월 25일 남 장로교 선교사들이 광주에 모여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결의하고 소속 노회를 탈퇴하기도 했으나 10월 21일 캐나다 장로교 선교사회는 신사참배를 결의해 분열을 가져오기도 하였다.

   신사참배 반대운동은 한국인 목회자와 신도들에 의해 계속 추진되었고 이들은 소속노회에서 탈퇴하거나 제명받기도 하였다. 이 운동에 앞장선 분들은 주기철, 한상용, 이기선, 채정민 목사 등이었고 주기철 목사는 순교하기도 했다.

   감리교회도 신사참배 반대운동이 있었다. 연회에서 휴직하기도 하며, 제명되기도 하고 적극적으로 투쟁하기도 했다. 33인중 한 분인 이필주 목사는 낙향하였고, 신석구 목사는 천안교회에서 반대투쟁하다. 옥고를 치르셨고, 이진구 목사는 원산지방 고성교회에서 반대 투쟁하다가 투옥되었으며 이영한 목사는 해주형무소에서 순교하기도 하였다. 1940년 6월에는 감리교신학교 안에 신사참배 반대와 일제의 정책을 반대하는 전단이 뿌려진 사건으로 신학교는 무기 휴교 당하였으며 급기야는 폐교당하고 말았다.

   여기서는 이진구 목사와 함께 투옥되었다가 옥중에서 순교한 전도사 최인규 권사의 신앙과 활동을 살펴봄으로서 당시 감리교회의 신앙모습을 찾아보려 한다.

 


2. 최인규 권사의 신앙과 생애

 

1) 천곡교회(泉谷敎會)의 개척자 최인규 권사

   
▲ 강릉지방 사경회(1938.11.)-최인규 권사(앞줄 좌측에서 3번째)

   최인규 권사는 1881년 11월 15일 강원도 삼척군 북평읍 송정리에서 출생하여 성년기에 홍씨를 부인으로 맞아 슬하에 두 아들을 두었다. 최권사는 예수 믿기 전에는 방탕한 생활을 하였으나 1921년부터 예수를 믿게 된 후 방탕한 생활을 끊고 신앙생활에 전념하였다. 그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주일성수 하였고, 온 가족과 함께 가정예배를 드리며 자신의 믿는 바를 이웃에 증거하기를 기뻐하였다. 강릉지방 삼척구역 북평교회에 출석한 최인규는 그 신앙의 순수함과 열심이 목회자와 신도들에게 감화를 주었고 인정받아 속장(屬長)이 되었으며 주일학교 교사일도 받아 충성하였다. 그는 교회의 크고 작은 일에 없어선 안 될 중요한 일군이 되어 유사 직분도 받았고 주일학교 교장일도 맡았다. 최인규 속장은 삼척구역의 천거로 권사(勸師) 직까지 받게 되었다. 당시 권사 직은 본처사역자로서 감리사의 파송을 받아 교회를 맡아 전도사일도 할 수 있으며 신학회를 거쳐 목사 안수를 받을 수 있었다.

   그 당시에는 신학교 입학 안하였어도 다년간 전도사로 시무하면 협동목사로 안수받기도 하였다. 지금으로 말하면 장로직과 같은 교회의 중요한 직책이었다.

   이렇게 신앙생활 하던 중 같은 북평교회의 권화선 속장과 만나게 되었다. 권화선 속장은 본래 경상도 태생으로 삼척에 술장사 하러온 분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삼척은 10여호 밖에 안되는 산골이었다. 그러나 동양 최대의 무연탄광이 개발되면서부터 전국 각지에서 농토를 잃은 사람들, 일자리를 잃은 이들이 몰려와서 수백 호에 이르렀고, 3,000여명이 넘는 마을이 되어 교회가 설립되었다(朝鮮監理會報, 78號, 昭和13年), 권화선 씨도 이때 삼척군 북평까지 들어왔고 술장사로 생계를 유지하던 중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지금까지 죄된 생활을 한 것을 깨닫게 되었다. 권화선 씨는 즉시 회개하고 술장사를 청산한 후 북평교회 다니면서 속장까지 되었고 부지런히 일하면서 신앙생활을 하였다. 권 속장은 전도의 열심이 생겨 인근 마을인 천곡(泉谷)에 기도실 하나를 정하고 가가호호 다니며 전도하여 신자를 얻었으나 그 가정이 인가귀도 되지 않았으므로 어려움이 많았다.

   그래서 같이 개척할 동지를 구하던 중 우연히 최인규 권사와 이야기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권속장이 이 간절히 기도하던 중 하나님의 응답으로 열린 것이다.

   전도사 최인규 권사는 천곡교회 개척에 발 벗고 나서서 열심히 전도하며 예배를 인도하였고 자신의 논 1,369평(당시 싯가 600원)과 밭 539평(당시 싯가 450원)을 교회대지로 헌납 하였다. 교회 건축을 위해 낮에는 재목을 운반하고 밤에는 새끼 꼬아 열심히 기도하며 기쁨으로 일하였다. 결국 1932년 해가 다 가기도 전에 초가 8간의 예배당을 세우게 되었고 1933년에는 봉헌예식을 거행하였다.(朝鮮監理敎會報, 제1권 第7號, 昭和8年(1933년).7.10. p19)

   당시 삼척지방 감리사는 박영모 목사였고 지방목사는 노블(W.A. Noble)선교사였으며 모리스(Louise Morris)여선교사도 순회전도자로 일하였었다. 삼척구역 담임자는 조종범 목사이었다. 최인규 권사는 이분들과 강릉지방 교역자와 신도들이 모인 가운데 감격스러운 봉헌식을 하였다. 최인규 권사의 헌신적인 신앙과 생활은 전 감리교회의 모범이 되었고 존경받게 되었다. 1937년 1월 21일 총리원이사회에서는 교회사업을 협조키 위하여 금품이나 토지를 기증한 신자들에게 총리원에서 포상하자는 의견이 결의되어 전도사 최인규 권사는 1938년 10월 총회때 상장과 은제 상패를 표창받기도 하였다.(朝鮮監理敎會報, 第87號, 昭和13年.11.1. p10)


2) 신앙을 지킨 최인규 권사

   
▲ 범죄인명부-최인규

 

  1940년 들어서 심하게 강요되는 신사참배에 전도사 최인규 권사는 우상숭배 할 수 없다하여 거부하였다. 그래서 동년 5월 천곡교회에서 일경에 의해 체포되었고 잔혹한 고문을 당하였다. 그러나 최 권사는 굴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당당하게 자신의 신앙을 증거하였다. 삼척 경찰서장 우지시마(牛鳥正太)는 “예수님이 십자가 지신 것처럼 어디 한번 혼 좀 나봐라” 하고는 전도사 최인규 권사에게 똥통을 지고 온 동네를 "나는 신사참배 않는 최인규 이다!"라고 외치며 돌게 시켰다. 일본순사는 채찍으로 때리면서 온 동리를 다니게 하였지만 최 권사님은 오히려 기뻐하였다.

 

   
▲ 최인규 권사-순교자 기념비(1946년)-삼척제일교회 뜰에 유해와 함께 안장

 

  주님의 이름으로 능욕 받고 고난 받는 것을 영광으로 믿고 더욱 감사하며 기쁜 마음으로 "나는 신사참배를 않는 최인규 이다"라고 외쳤다. 당시 삼척교회 권사로 울진교회를 맡아 전도사 일을 하던 신앙의 친구 차국성은 이 소식을 듣고 경찰서장을 찾아가 최인규는 원래 정신병자인데 예수 믿고 조금 나았다가 다시 재발한 것 같으니 석방시켜달라고 간청하였다. 경찰서장은 차국성(車國星)에게 "예수를 믿으려면 최인규 처럼 믿으시오. 당신이 정신병자요"하고 호통을 쳐 보내기도 하였다. 비록 혹독한 고문을 가해온 서장까지도 최인규의 신앙에 내심으로 감복하고 있었다.

   최인규 권사는 함흥재판소에서 재판받게 되었다. 그는 재판정에서도 굽힘없이 더욱 담대히 믿음을 증거하였다. 재판관 앞에 서도 “우주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 외에는 경배할 수 없으며 일본 천황도 하나님이 내신 사람으로 죄인에 불과하며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을 믿어야 하고 일본은 죄악을 회개치 않으면 필히 패망할 것”이라고 당당하게 신앙을 증거한 후 “신사참배 할 수 없다”고 하였다. 재판장은 화가 나서 천황을 모독하였다고 불경죄를 더하여 2년 징역을 언도하였다.(咸興地方法院 裁判文, 昭和十六年)


3) 순교자 최인규 권사

   
▲ 고 권사 최인규 순교기념비(1946년)-전면과 뒷면
   
▲ 고 최인규 순교비와 비문내용, 해석(1946)-삼척제일교회
   
▲ 고 최인규 권사 순교기념비문 해석

 

   최인규 권사는 감옥에서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늘 기쁘게 찬송 부르며 전도하였다. 간수가 매일 아침 때리며 동방요배를 시키면 신사참배와 동방요배를 아니하므로 감옥에 왔는데 왜 띠리느냐 나는 재판소에서도 안하겠다고 선언한 사람이라고 호통쳤다. 최권사가 있는 감방에는 신사참배 거부한다고 감옥에 갇힌 원산지방 고성교회 이진구 목사도 있었다. 1941년 10월에 최인규 권사는 이진구 목사와 함께 대전감옥으로 이감되었다. 대전 감옥은 주로 사상범이 수감되는 곳으로 이곳에는 사상 전환시키려고 교회사(敎誨士)가 있었다. 교회사(敎誨士)는 "너희 선생인 전도사와 목사들로 신사참배 하는데 공연히 고집부리지 말고 이제라도 마음을 돌리고 신사참배하면 특별히 가출옥시켜 주겠다 처자들이 보고 싶지 않은가, 불쌍하지 않은 가“고 회유해 보았지만 최 권사의 신앙을 꺾을 수 없었다.

   최 권사는 계속되는 고문으로 몸이 쇠약해져 음식도 먹을 수 없게 되었고 병감(病監)으로 이전되어 치료받았으나 1942년 12월 16일 오후2시 그가 사모하던 주님의 나라로 떠났다. 최 권사는 끝가지 믿음을 지켜 옥중에서 순교한 것이다. 교우인 김창주는 1946년 3월에 자전거로 대전 형무소에 찾아가 최인규 권사의 유골을 찾아다가 삼척읍교회 정문 우편 뜰에 안장하고 강릉지방 교회들은 그곳에 "고 최공인규 순교기념비"(故崔公仁奎 殉敎記念碑)를 세웠으며, 1982년 천곡교회를 재건하고(동해시 천곡동 1081-8), 1986년 유해를 이장하며 순교 기념비를 옮겨 세웠다. 기념비는 최인규 권사가 제작한 강대상을 모형으로 만들었다.

   천곡교회는 1940년 최인규 권사 체포이후 경찰당국으로부터 탄압을 받아 교회는 폐쇄되었고 교인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1950년에야 ‘최인규 기념예배당’(현 동해시청 앞)을 마련했지만 도시 계획으로 옮겨 다니다, 1982년에야 천곡동에 자리를 잡고 예배당을 건축한(천곡동1081-8) 후, 1986년 11월 고 최인규 권사 순교기념비 아래 유해를 이장하고 안장하였다.

 

   
▲ *“순교자 최인규 권사 기념교회”-해방 후 제2차 천곡교회와 성도들(1968년)


3. 맺는말


  목회자가 아닌 평신도 임원으로써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믿음을 지켜 순교한 최인규 권사의 순교적 신앙은 당시 한국감리교회의 신앙을 보여주고 있다. 이 신앙이 오늘날 우리 교회의 터전인 것이다.(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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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朝鮮監理敎會報, 7호, 8호, 78호, 87호,
-朝鮮耶蘇敎長老會總會錄, 第二十七回 總會, 昭和十三年 九月十日 - 十六日
-朝鮮日報,  昭和十三年(1938) 九月十二日,
-咸興地方法院 裁判文, 昭和十六年
-노종해: “순교자 최인규 권사의 생애와 신앙”(기독교세계,1985.11. 제694호.)
-노종해: “최인규, 신사참배를 거부한 평신도 순교자”(한국감리교사학회 편, 한국감리교회를 만든 사람들, 기감본부교육국, 1987.)
-盧宗海, 韓國監理敎史의 새視覺, 풍만, 1988.)
-윤춘병, 순교 순국자 최인규 권사의 삶과 신앙, 기감 동부연회, 2000.

 

   
▲ 오늘의 동해시 천곡감리교회 재건(1982년)-최인규 권사 유해 이장하고 순교기념비 세움(1986년)

 

노종해 rocha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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