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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자유

기사승인 2018.11.04  00:4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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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미국에서 57년 만에 기밀의 봉인이 풀린 외교문서가 존 F. 케네디 암살에 대한 새로운 진실을 증언할지 이목을 끌고 있다. 케네디는 20세기에 가장 사랑받던 몇몇 정치인의 한 사람이었다. 많은 세계인이 그를 통해 진보의 힘을 믿었고, 자유정신을 느꼈기 때문이다. 여전히 케네디의 암살사건은 그에게 희망을 건 사람들에게 미궁에 빠진 블랙박스로 남아있다.

  케네디는 뛰어난 연설가였다. 그의 가장 유명한 연설은 분단 독일의 서베를린에서 행한 것인데, 통일된 지금도 베를린 시청사 앞에서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케네디의 생생한 연설은 60년이 다 된 오래된 낡은 기록이지만, 여전히 미래의 관광상품으로도 의미있다.

  베를린의 서쪽 절반은 냉전시대에 가장 상징적인 자유의 도시로 불린다. 무엇보다 분단되어 서독과 동떨어진 서베를린의 지리적 위상은 동독에 갇혀있는 섬과 같았다. 장벽으로 둘로 나뉜 도시는 마치 ‘독 안에 든 쥐’처럼 숨이 콱콱 막혔다. 베를린대학교의 이름이 ‘자유(自由)대학’인 것은 지극히 역설적이다. 베를린은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의 정신으로 자라난 도시였기 때문이다.

  누군들 사방이 공산주의 세계로 꽉 막힌 반쪽짜리 서베를린에 가서 살고 싶지 않았다. 당시 동독정부와 체제경쟁을 해야 하는 서독정부로서는 서베를린에 많은 인구를 유치하려고 특별한 조치를 취했다. 세금을 감면해 주고, 거주자특별수당을 주었다. 심지어 장벽과 붙어있는 접경지역인 크로이쯔베르그에 사는 젊은이에게는 군(軍) 면제 혜택을 주었다.

  분단시절, 크로이쯔베르그는 대단히 자유로웠다. 현실로부터, 부모로부터, 미래로부터, 온갖 구속하는 것들로부터 도피한 온갖 도망자들의 피난처였고, 누릴만한 해방구였다. 사람들은 스스로 갇혀있기를 선택함으로써, 원하는 만큼의 자유를 누렸다.    

  그런 베를린에 급박한 위기가 찾아왔다. 1961년에 동서독 사이에 장벽이 쌓이고, 긴장이 고조되었다. 소련과 동독 군대는 도너츠 반쪽만한 서베를린을 봉쇄하였는데, 서독으로 통하는 고속도로와 철도가 다 차단되었고 오로지 하늘만 열려있었다. 베를린 시민이 먹을 모든 음식물과 일용품은 오로지 비행기를 통해서만 공급되었다.

  그때 미국대통령 케네디가 봉쇄된 서베를린을 비행기로 방문하였다. 세계로부터 고립감을 느끼며 부자유에 답답해했던 서베를린 시민들은 시청 광장에 100만 명이나 모여 케네디를 열렬히 환영하였다. 그날 케네디 대통령이 한 연설은 적어도 독일인들에게는 가장 유명한 것으로 남았을 것이다. 그는 베를린 사람들의 부자유를 격정적으로 공감하였고, 자유세계 시민으로서 뜨겁게 연대하였다.
  “나는 베를린 사람입니다.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베를린 사람입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향수처럼 베를린 시청 앞 광장에서 그의 육성과 함께 당시의 동영상을 본다. 그 시절은 자유라는 단어만 들어도 가슴이 뛰던 때였다. 모든 나라마다 숨죽여 자유를 노래하고, 몸으로 자유를 외치던 그런 역사가 있다. 지금 자유가 흔한 나라에서는 더 이상 자유의 소중함을 모른다.

  올해는 종교개혁 501주년이다. 해마다 종교개혁을 기념하지만, 해마다 자유, 그 자체에 대한 목마름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501년 전 루터의 용기는 지리한 다툼과 논쟁으로 소멸될 수도 있었지만, 그러나 루터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마침내 1521년 1월, 교황은 루터를 파문하였고,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루터를 보름스 제국의회에 소환하였다.

  그때 루터의 심정은 어땠을까? 루터는 보름스 성의 지붕 위에 있는 기왓장의 수만큼이나 마귀들이 많이 있을지라도 결연히 맞서 싸우고자 하였다. “지옥의 모든 문들과 하늘의 모든 권세들이 막으려고 할지라도... 거기서 우리의 사명은 마귀를 쫓아내는 것이다.”
 
  루터는 황제 앞에서 담대히 증언하였다. 그것은 16세기 뿐 아니라, 모든 인간의 세기에서 자유에 대한 가장 빼어난 연설로 남아야 한다.
  “성서의 증거와 명백한 이성에 비추어 나의 유죄가 증명되지 않는 이상 나는 교황들과 교회 회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겠습니다...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양심에 반해서 행동하는 것은 안전하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현명한 일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 아멘.”

  역사가들은 보름스 제국의회에서 루터가 한 증언을 가리켜 “두려움 없는 최고의 용기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었다”고 평가하였다. 마틴 루터는 교황과 황제, 두 세계의 권력과 맞섰던 진정한 자유인이었고, 해방자였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우리가 지닌 신앙에서 ‘마그나 카르타’와 같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 이렇듯 자유란 개념은 종교개혁의 심장과 같은 메시지가 되었다.

  모든 종교개혁자들의 언어는 ‘자유’였다. 마틴 루터는 당시 가톨릭교회에서 자유가 아닌 멍에를, 복음의 생명이 아닌 율법의 부자유를 느꼈다. 그래서 복음과는 상관없는 면벌부를 판매하는 로마 가톨릭의 잘못된 행태에 대해 “그건 아니요!”라고 손을 들었던 것이다. 목숨을 건 일이었다.

  오늘, 우리는 어떠한가. ‘자유의 진리’(요 8:32)를 품어야 할 교회가 오히려 이를 되팔아 종의 멍에와 악마의 명예를 구하고 있지는 않는가? 중세기의 모습과 다르지 않은 현대판 교회세습과 매매, 욕망을 사고파는 신앙양태와 ‘절대’ 타락한 성직 선거판을 보면, 다시 우리를 질식하게 한다.
  “나는 프로테스탄트입니다. 자유를 위해 저항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프로테스탄트입니다.”

송병구 sbkbochu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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