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setNet1_2

신성일과의 인연

기사승인 2018.11.08  17:54:01

공유
default_news_ad1
   
 

한국 영화계의 대스타였던 신성일 씨가 별세했다. 고인의 명복을 빌며 그와 스쳤던 인연을 기억한다.

1964년도 나는 신당동에서 조간신문인 한국일보를 돌렸다. 인생 대학 부모 박복과 출신답게 새벽 5시에 일어나 보급소에 가서 신문 뭉치를 옆에 끼고 동네를 돌며 신문을 배달했다. 학교에 갔다 와서는 영수증을 들고 수금을 하러 다녔다.

문제는 확장지였다. 예를 들어 독자가 100명이면 신문은 110부를 준다. 10부는 알아서 독자를 늘리라고 일정 기간 강제로 할당하는 것이다. 배달원은 확장지를 안 받으려고 하고 보급소장은 강제로 떠맡기는 과정에서 오래된 배달원에게는 적게 주고 신입 배달원에게는 많이 주는 불공평한 일이 벌어진다. 대략 3개월 후면 독자를 110명으로 계산해서 돈을 내야 하고 또다시 10부의 확장지를 준다.

결국 실제 수금을 할 수 있는(신문값 안 내고 도망가는 사람이 없다면) 독자는 100명, 보급소에 110명의 돈을 내야 하니 새벽부터 저녁까지 일을 해도 손에 남는 것이 없다. 보급소에 납부해야 할 돈이 점점 늘어나 나중에는 보증금까지 떼이고 배달을 할 수 없게 되는 입장이 되기도 한다.

6개월 정도 하다가 견디지 못하고, 공장에 다니는 누나 월급에서 만들어 준 보증금까지 털리고 그만두었다. 이런 배달 구조가 대한민국에서 신문 끊기가 담배 끊기보다 어려운 이유이다. 이렇게 수십 년 동안 사회 최대의 약자인 배달원의 노동을 착취해서 이루어진 것이 오늘날 한국의 족벌 신문이다.

 

   
 

 

수금의 애로 사항은 낮에 사람이 없는 소위 명사들의 집이었다. 김종필의 집 같은 곳은 낮에도 사람이 있어서 문제가 없었지만, 배우 엄앵란 같은 어중간한 명사 집의 문을 두드리면 집을 지키는 식모들이 “아무도 없어요.”라고 했다. 식모는 ‘아무도’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아무도' 못 만나 몇 달씩 수금이 밀려 있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한번은 수금을 하고 있는데 엄앵란의 집 앞에 승용차가 서더니 엄앵란과 어머니, 당시 연애 중인 신성일이 내리고 있었다. 얼른 그쪽으로 달려가서 대문에 달린 쪽문을 열고 들어가려는 그들에게 “저기요. 신문값 좀 주세요.”라고 했다. 신성일이 뒤를 돌아보더니 “야! 나중에 와.”라고 한 마디 했다. 나는 “안돼요. 3개월치나 밀렸단 말이에요."라고 했다. 그다음 신성일의 입에서 나온 말이 완전히 이성을 잃게 만들었다.

“짜식이? 나중에 오라면 올 것이지?”

당대의 최고 인기 배우로 신문을 돌리는 고학생쯤은 충분히 하찮게 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신성일은 나에게 전혀 의미가 없는 존재였다. 이번에는 신성일이 이성을 잃을 차례였다.

“짜식?! 이봐요. 나는 당신이 나오는 영화 따위 보지도 않아.”

신성일 씨의 입장에서는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고교생에게 개무시를 당했으니 화도 날 만했을 것이다. 그는 내 멱살을 잡고 한 대 칠 기세였다. 나로서는 손해 볼 것이 없었기 때문에, 그가 10살이나 많았고 체격도 훨씬 컸지만 죽기 살기로 신성일의 양복 자락을 잡고 늘어졌다.

이쯤 되자 엄앵란의 엄마가 나서서 “신 서방! 참아! 참아! 얼마야?” 하더니 핸드백을 뒤졌다. 신문값을 주더니 “앞으로 신문 넣지 마!”라며 빽 소리를 질러서 “안 넣어요!”라고 큰 소리로 대꾸를 했다.

16살의 내가 그때 왜 그랬을까? 당시의 나는 '막가파'였다. 저속한 막가파가 아니라 고상한 막가파. 당시는 내 인생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순수할 때였다. 비록 신문 배달을 하고 있지만 음악도 클래식만 듣고 소설도 고전만 읽으면서 이상 속에 살던 때였기 때문이다. 사실 신성일이 출연하는 유치한 청춘물 수준의 한국 영화는 전혀 보지도 않았다. 평소에 좋아하지도 않는 배우가 고등학생이라고 나를 우습게 보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고교를 졸업할 때 나는 졸업생 468명 중에서 미진학자로 분류된 4명 중 한 명이었다. 고학으로 학교를 다니다가 등록금이 2기분이나 밀려서 자퇴를 결심하고 학교에 가지 않아서 가까운 친구들이 1기분, 급우들이 1기분을 걷어서 다시 학교에 다니도록 해 준 일도 있었다. 졸업식 날 사진도 찍지 않고 옥상에 올라가서 쓸쓸하게 학교 정원에서 졸업 사진을 찍고 있는 인파를 쳐다보고 있던 나를 찾아낸 한 친구가 꽃다발을 내게 주면서 “우리가 졸업을 한다는 것은 별로 축하할 일이 못되지만 네가 졸업을 한다니 정말 기쁘다.”고 했었다.

 

   
 

 

돈이 없어서 고생을 하기만 한 것 뿐 아니라 선생들로부터 매도 많이 맞았다. 불량 학생도 아니고 정확한 모범생이었지만 ‘정체불명의 반항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국어선생이 새로 왔는데 실력도 있고 가르치기도 잘하고 인품도 있어 보여 좋아했었다. 어느 날 수업 시간에 내가 옆 친구와 이야기를 하다가 웃은 모양이다. 선생이 앞으로 나오라고 하더니 “너 나를 비웃었지?”라고 하면서 불이 나게 귀싸대기를 올려붙이는 것이다. 속으로 좋아하던 선생이었는데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나는 아니라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아니라고 하면 더 길길이 뛰면서 제 성질이 풀릴 때까지 뺨을 때렸다. 후일 선생이 외국어 대학교 부총장이 되었는데 86년도에 기독학생회 초청을 받아 강연 후 부총장실을 찾아가서 “그때 왜 때리셨습니까?”하고 물었더니 본인은 기억도 하지 못했다.

고3이 되어 겨울 방학 전에 편집을 끝낸 교지가 방학 동안 인쇄되어 배포된 후 담임이 교무실로 오라고 했다. 담임은 글 전체를 읽어 보지도 않고 도입부에 주인공이 학교의 비리에 대하여 항의를 했다는 소재만 보고 나를 개 패듯이 패기 시작했다. ‘황야의 무법자’라는 영화를 보다가 걸렸는데 학생 출입 금지 영화를 봤다고 때려서 그 영화를 보는 것이 왜 문제냐고 항의했다가 체육 선생에게 떡이 되도록 맞기도 했다.

어려서부터 세상살이가 어렵다는 것을 몸으로부터 느끼게 되면 적응 아니면 부적응으로 나타나게 된다. 적응하면 악바리가 되는 것이고 부적응하면 소년원이나 정신병원으로 가게 된다. 후자의 대표적 경우가 '지존파 사건'이라고 볼 수 있겠다. 여기에 제3의 길도 있다. 메시아 컴플렉스에 빠지는 길이다. 이 병은 순수한 십 대에 잘 걸리는 병으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자신이 뭔가를 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드는 병이다. 이런 증세를 가진 사람들이 스님, 수도자, 목사들이 되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기도 하다. 나는 후자의 경우이다.

 

   
 

 

부모의 관리를 전혀 받지 않고 자유로운 프리 레인지(방목 상태)로 자랐다. 가정 생활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밖으로만 돌았지만 세상에 대한 좌절과 반항심이 다행히도 파괴적으로 표출되지 않고 신앙 때문에 숨겨져 있었다. 현실에서 어떤 희망도 발견할 수 없으니까 오히려 극단적으로 비현실적인 생각을 하게 되었다. 평화스럽지 못한 집안 환경이 오히려 나를 피안의 세계로 떠밀어 수도자가 되는 꿈을 꾸게 되었다.

한창 대중문화에 관심을 갖는 청소년기에도 친구들이 팝송을 들으며 가사를 옮겨 적고 했었지만 한 번도 관심을 가진 적이 없었다. 수도사가 되기로 해서 성인전에 관심이 많았던 나에게 사랑이니 이별이니 하는 팝송의 내용들이 관심을 끌 수가 없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일찍 허무주의에 빠져서 한 방에 인생을 끝내고 싶은 생각도 항상 하고 있었다. 단기적으로는 ‘화끈하게 살다 죽는 것’이고 장기적으로는 수도사가 되는 것이었으니 현실은 내 문제를 내가 해결해야 하는 고학생의 처지이면서도 생각은 어차피 현실도피적이었던 것이다.

위험한 행동을 하는 사람을 향해서 “이 사람이 죽고 싶어서 환장을 했나?”라고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나는 원래 죽고 싶어 환장한 사람이었다. 어렸을 적부터 ‘화끈하게 죽는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주로 영화 속에서는 깽들, 흑인들이 화끈하게 죽는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은 조현아나 양진호처럼 성질은 더러워도 지킬 것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양처럼 순해도 잃어버릴 것이 없는 사람이다. 잃어버릴 것이 없으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절망에서 나오는 용기’라고 한다면 그 시절 나는 그런 용기로 무장하고 있을 때이었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다’라는 생각 때문에 불안도 없었다. 그래서 주로 팔레스타인이나 무슬림 세계에 벌어지는 자살 테러 사건에 대한 나의 느낌은 남다르다. 실제로 하루하루를 아무런 희망도 없이 살아가는 팔레스타인의 젊은이들이 ‘화끈하게’ 살다가 죽는 자살 테러를 지원한다. 사회가 위험해지는 것은 핵무기 때문이 아니고 절망 바이러스가 퍼지는 것이다.

지성수 sydneytaxi@hanmail.net

<저작권자 © 당당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4
default_side_ad1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포토

1 2 3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etNet2
default_bottom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