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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은 그에게로 가는 것

기사승인 2018.12.02  14:4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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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은 그에게로 가는 것
요 6:48-51
(2018/12/02, 대림절 1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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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생명의 빵이다. 너희의 조상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다. 그러나 하늘에서 내려오는 빵은 이러하니, 누구든지 그것을 먹으면 죽지 않는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나의 살이다. 그것은 세상에 생명을 준다."]

∙기다린다는 것
오늘도 우리의 손과 발을 빌어 이 땅에 오고 계신 주님의 은총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교회력으로 한 해의 시작이 기다림으로 시작된다는 것이 매우 의미심장하게 다가옵니다. 장엄한 빛의 창조를 전한 창세기 기자가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라고 말했던 것이 떠오릅니다. 아침이 활동을 위한 시간이라면 저녁은 돌아봄의 시간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도 물론 중요하지만 돌아봄 혹은 성찰이 인간의 근본이라는 말일까요? 우리는 지금 무엇을 기다리고 있나요? 시인 황지우의 ‘너를 기다리는 동안’은 기다림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인상 깊게 보여줍니다.

“너를 기다리는 동안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들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기다리는 사람은 그 대상을 막연히 기다리지 않습니다. 그가 올 자리에 미리 가서 그를 맞이하려 합니다. 기다림은 그리움이기도 합니다. 그리움이란 어떤 대상이 온통 우리 마음을 차지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리워하던 대상과 만날 수 있다는 기대는 우리를 들뜨게 만듭니다. 그렇기에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들’이 가슴에 쿵쿵거리는 겁니다. 시인은 ‘바스락거리는 나뭇잎/하나도 다 내게 온다’고 노래합니다. 그리움은 이처럼 사람을 예민하게 만듭니다. 그리워하는 이들은 온몸이 귀가 되어 어떤 기척에든 반응합니다. 기다림이 길어질 때는 초조함도 깊어집니다. 시인은 마침내 ‘기다림은 너에게로 가는 것’이라고 노래합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이들은 막연히 기다리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리움을 품고 주님이 오실 길을 닦는 사람입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였던 세례자 요한은 주님 오실 길을 닦는 것을 자기의 소명으로 삼았습니다. 높은 곳은 낮추고, 우묵한 것은 돋워주고, 구부러진 것은 바로 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기다림의 자세입니다.

∙예수의 자기 이해
정말 주님 오심을 기다리고 계신지요?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에 나오는 ‘대심문관’은 재림하신 주님을 지하 감옥에 가둔 후 당신은 오시지 말았어야 했다고 말합니다. 우리끼리 잘 하고 있는데, 당신이 와서 질서를 교란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자유가 아니라 빵을 원하고, 덤덤하고 한적한 평화보다는 신비를 원하고, 평화로운 공존보다는 권력을 원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옛날 광야에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실 때 주님이 거절하셨던 바로 그것이 보통 사람들에게는 복음이라는 말인 셈입니다. 어쩌면 이게 적나라한 우리의 실상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주님은 어떤 분입니까? 오늘 본문을 통해 다시 한번 이 질문에 대해 답해보면 좋겠습니다.

광야에서 한 소년이 바친 보리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 넘는 이들이 배불리 먹은 사건을 경험한 후에 사람들은 예수를 억지로 모셔다가 왕으로 삼으려 했습니다. 물질적 궁핍으로부터 자기들을 건져줄 존재로 인식했기 때문일 겁니다. 하지만 예수는 그런 기대를 저버리고 혼자서 산으로 물러나셨다가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를 건너고 있을 때 물 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다가가셨습니다. 주님이 배에 오르시자 배는 가려던 곳에 당도했습니다.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은 육로를 통해 주님 일행을 찾아왔습니다. 어떤 절박함이 그들을 그 자리로 이끌었던 것이겠지요. 하지만 주님은 그들에게 다소 냉정하게 들릴 수도 있는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먹고 배가 불렀기 때문이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일하지 말고, 영생에 이르도록 남아 있을 양식을 얻으려고 일하여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줄 것이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자를 인정하셨기 때문이다.”(요6:26b-27)

주님은 그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먹을 양식이 아니라 삶의 의미 혹은 보람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싶어 하십니다. 당장 주린 배를 채울 빵도 필요하지만, 인간은 영생에 이르도록 남아 있을 양식을 구할 때 사람다워진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그들에게 그 양식을 주겠다고 말하자 사람들은 모세를 통해 내렸던 만나를 떠올리며 가시적인 표징을 요구합니다. 주님은 재차 “하나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6:33)이라고 말합니다. 여전히 말귀를 알아듣지 못한 그들은 그 빵을 달라고 청합니다. 그때 주님이 하신 말씀은 충격적입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내가 줄 빵은 나의 살이다. 그것은 세상에 생명을 준다.”

이 말처럼 예수님의 삶을 잘 요약한 말이 또 있을까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은 어떤 신비한 실체가 아니라 예수님의 삶 그 자체가 바로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입니다. ‘살아 있는 빵’은 ‘살리는 빵‘입니다. 빵은 먹힐 때 비로소 자기 존재 목적을 달성합니다. 예수님은 남을 복되게 하고 살리기 위해 자기 자신을 먹이로 세상에 내주셨습니다. 바로 그것이 성찬(聖餐)의 신비입니다. 하늘로부터 내려온 생명의 빵을 먹는 사람은 예수의 꿈을 자기의 꿈으로 삼고 살아야 합니다. 주님의 삶은 한 마디로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데 바쳐진 삶이었습니다. 주님은 병든 이들을 치유하고, 귀신을 쫓아내 온전케 하고, 소외감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벗으로 사셨습니다. 또한 겨자풀이 어깨를 겯고 서로의 버팀목이 되어주는 것처럼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하나님 나라의 시작임을 사람들에게 일깨워주셨습니다. 우리가 정말 주님을 기다린다면 그런 삶을 여기서 시작해야 합니다. 바로 그것이 진실한 기다림이요 그분에게로 가는 것입니다.

∙이중섭의 천도 복숭아
구상 선생은 가까운 벗 이중섭 화백과의 일화를 ‘비의’(秘儀)라는 시 속에 담아냈습니다. 이중섭이 병이 깊어 죽음의 문턱 가까이 다가섰을 때 시인도 결핵으로 피를 토하며 시신처럼 누워 지내야 했다고 합니다. 하루는 그가 불쑥 나타나서 애들 도화지 한 장을 내밀었습니다. 거기에는 애호박만큼 큰 복숭아 한 개가 그려져 있었고, 그 한가운데 씨 대신 죄그만 머슴애가 기차를 향해 만세!를 부르는 그런 시늉을 하고 있었습니다. 구상은 그것을 받으며 “이건 또 자네의 바보짓인가, 도깨비 놀음인가?” 하고 픽 웃었더니 그도 따라서 씩 웃으며 말했습니다.

  “복숭아, 天桃 복숭아
  님자 常이, 우리 具常이
  이걸 먹고 요걸 먹고
  어이 빨리 나으란 그 말씀이지”

이중섭은 그렇게  흥얼거리더니 획 돌쳐서 나갔습니다. 그게 끝이었습니다. 이중섭은 얼마 후세상을 떠났고 구상은 살아남았습니다. 10년 쯤 지난 후 구상은 다시 큰 수술을 받고 자리에 누워 있었습니다. 마침 복숭아 철이었는지 食床엔 복숭아가 자주 올라왔습니다. 시인은 그것을 집어들 때마다  “복숭아 天桃 복숭아/님자 常이, 우리 具常이/이걸 먹고 요걸 먹고/어이 빨리 나으란 그 말씀이지“ 했던 仲燮의 天桃 생각이 나서 ‘그의 말씀을 가만히 되뇌이기도 하고 되씹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천진스런 가락이 영절스러운 축문처럼 변하더니 어느 결에 또 다른 한 분의 음성과 겹쳐졌습니다. “이것은 내 몸이니 받아 먹으라./이것은 내 피니 받아 마시라./나를 기억하기 위해/이 禮를 행하라.” 자기도 죽음의 문턱에 있으면서 아픈 친구를 위해 그림을 그리는 마음이 그리스도의 마음과 닮았습니다.

성찬은 이런 것입니다. 우리도 누군가의 기억 속에 이렇게 하늘을 떠올리게 하는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누군가의 시린 손을 잡아주고, 눈물 흘리는 이들 곁에 머물고, 누군가가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것을 제공하려고 노력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상기시키는 이가 될 것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을 먹는 사람들마다 우리 이웃들에게 생명의 빵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삶이야말로 진실한 기다림이며, 오시는 주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일입니다. 이 거룩한 부름에 응답하여 우리의 나날이 하늘의 평강과 기쁨으로 가득 차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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