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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바람의 말을 타고: 조울증의 철학

기사승인 2018.12.08  00:3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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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에는 사랑인 것을-

서평: 『바람의 말을 타고: 조울증의 철학』

 주찬종

 

데파코트, 리보트릴, 리스페달, 렉사프로, 솔리안, 쎄로켈, 아빌리파이, 아티반, 인데놀, 자이프렉사, 졸로푸트, 테프라, 프로이머, 페리돌, 환인탄산리튬 등.

지난 4-5년간 먹어왔던 약들의 일부입니다. 생각나지 않은 것까지 치면 약 20여종정도가 될까요. 증세가 아주 좋지 않을 때, 한 번에 7-8정 되는 약들을 하루 네 번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즉, 하루에 30여 정 되는 약을 먹었던 것입니다. 그 때의 상태야 말하지 않아도 상상할 수 있으실 거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나쁜 상태를 생각하면 딱 그 모습이거든요. 약 부작용도 굉장했습니다. 특정 약물을 복용할 때에는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던 때도 있었습니다. 살아있지만 살아있지 않은 혹은 살고 싶지 않은, 삶이지만 삶이라 이름 붙이기 어려운 상태였죠.

시작부터 너무 절망적인 이야기로 빠지지 않기 위해 그나마 여기서 재미있는 걸 하나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사실, 위에 약들은 일관성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 위의 약들은 강박증 치료제만으로, 조울증 치료제만으로, 조현병 치료제만으로는 분류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강박증 치료제이면서, 조울증 치료제이면서, 조현병 치료제로 분류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강박증, 조울증, 조현증이 ‘한 사람에게서 동시에’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위의 약은 하나의 질환을 치료하는 일관된 약물 처방이 아닙니다. 얽히고설킨 세 가지 질환의 증상을 보고 정도에 따라 용량의 차이를 두어 처방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정신 질환자입니다. 강박증 환자이면서, 조울증 환자이면서, 조현증 환자입니다. 두 번의 자살시도가 있었습니다. 현재도 자살 사고와 충동에 사로잡혀 스스로의 감정과 행동을 조절 할 수 없을 것 같은 때가 찾아오곤 합니다. 어느 덧 죽음과 삶의 간격은 매우 가까워져 버렸습니다.

생각의 절반은 소름끼치도록 잔인한 생각이, 나머지 절반은 눈물이 흐를 정도의 우울한 생각이 가득 차 있습니다. 누군가와 일대일로 대화를 하고 있을 때면 상대방을 의자나 망치로 내려치고 싶다는 충동이 가슴을 방망이질 합니다. 할 수 있는 거라곤 사람을 만나지 않고, 억지로 잠을 청해보는 것뿐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제가 얼마나 많은 약을 먹었느냐가 아닙니다. 또, 제가 얼마나 아프고 고통스러워하느냐가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왜 아프고 고통스러운지를 아는 것이고 그리고 이 아픔과 고통이 나를 집어삼키지 않도록 할 방법을 내가 알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바로 여기서 소개하고 있는 이 책의 첫 번째 가치입니다. 책의 저자 로버트 S. 코링턴은 자신의 경험담을 통해 다음과 같은 진실을 밝혀줍니다.

‘정신 질환은 정확한 진단과 알맞은 처방을 그리고 성실한 약물 복용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의 굳건한 확신을 다시금 반복해서 강조해야 하는데, 리듐(혹은 그에 등가하는 약물)이 없다면, 이 질병의 통합도 있을 수 없다.”(85)

저자는 자신이 ‘정확한 진단’과 ‘알맞은 처방’을 받기까지 얼마나 많은 세월을 허비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 대가가 얼마나 참혹했는지를 책을 통해 상세히 보여줍니다. 동시에, 난치성 질환인 정신 질환에 대한 현실을 절감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조울병에 대한 치유책은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 가능한 난관의 지점들을 우회해 나아가는 전술적 방책들을 무한히 이어갈 수 있을 뿐이다.”(29)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전술적 방책들이 무엇입니까? 바로 전문의를 통한 진단과 처방입니다. 저자는 이를 강력히 권유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정신 질환자들에게는 그것만이 살 길이기 때문입니다. 상투적인 표현이긴 합니다만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습니다. 문자 그대로 이것이 보다 안전하게 살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길입니다.

그렇다면, 정확한 진단을 통한 알맞은 처방 그리고 그에 따른 꾸준한 약물 복용이 정신 질환의 빛나는 해방구일까요? 그러나 아쉽게도 그렇지 않다는 게 저의 소견입니다. 약물 치료는 정신 질환의 증상을 ‘완화’시킬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완전히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정신 질환은 의학의 문제이면서 철학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즉, 정신 질환은 의학과 철학이 중첩되어 있는 부분에 속해 있습니다. 따라서 의학적인 접근과 동시에 철학적인 접근이 필요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철학적 접근이란 해석학적이고 의미론적인 접근을 말합니다. 곧, 정신 질환이라는 문제에 부딪쳤을 때 그 문제를 해석하고, 이해하고 거기서 도출되는 의미를 파악하는 접근입니다.

예컨대, “이 질환을 앓고 있는 나는 누구지?”, “이 질환을 지니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지?”, “이 질환은 무엇이지?”, “이 질환은 어느 정도 치료될 수 있지?”, “이 질환을 앓으면서도 여전히 살아가야 하는 의미가 무엇이지?”

바로 이것이 이 책의 두 번째 가치입니다. 정신 질환은 의학적 관점으로만 바라보았을 때에 그 과정을 반 밖에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의학적 관점과 철학적 관점을 동시에 지니고 바라보아야 나머지 반까지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철학적 작업은 무엇일까요? 바로 개성화(individuation)입니다. 다시 말해, 전일성을 향한 운동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삶의 전체성을 바로 지금 여기의 내 삶 속에서 의미론적으로 획득해 나아가는 과정입니다. 왜 전일성을 향한 운동이 중요할까요? “전일성을 향한 갈망이 조증과 극단적인 우울증의 독이 든 열매들을 모아 변혁시켜 나가기 때문”(31)입니다. 그런데 이 개성화는 어떻게 이루어질까요? 어떻게 전일성으로 향해 나아갈 수 있을까요?

이 물음들에 대한 답을 제공하는 것이 바로 이 책의 세 번째 가치입니다. 저자는 이 철학적 작업 곧, 개성화가 ‘성스러운 접층’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음을 밝힙니다. 성스러운 접층이란 곧 “소외된 자아를 자연의 핵심으로 연결하는 것”(224)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의미 진공”(310)의 상태에 살고 있습니다. 이 상태는 우리 모두를 ‘잠재적 자살자’로 만듭니다. “잠재적 자살자에게는 오직 스스로 시작한 죽음만이 의미”(310)를 가질 수 있죠. 이 때 우리가 살고자 한다면, 그래서 의미 진공에서 태동하는 죽음 충동과 그 죽음 충동이 잉태하는 삶 충동의 역설을 받아들이려 한다면, 성스러운 것과의 접촉이 필요합니다.

공간으로 따지면 ‘간격’이라고 할 수 있고, 시간으로 따지면 ‘휴식기’라고 할 수 있는데, “휴식기는 유기체에게 다시 힘을 북돋워주어, 어떤 파괴적이거나 혁신적인 것과의 새로운 만남을 가능케 해주는 시간”(312)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저 앉아서 의지적 행위로 성스러운 접층과 그 간격을 창조해 낼 수”(314) 없습니다. 그래서 “만일 우리가 의식적인 기술을 사용한다면, 우리는 은총의 역할을 빼앗는 꼴이 되고, 반면에 우리가 은총을 그저 빈둥거리며 기다리기만 한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진정한 인간적 도구들을 활용하지 못하게 될 것”(315) 입니다.

그러나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에게 성스러운 접층을 가능하게 하는 대상들은 편만해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 성스러운 접층 곧, “은총은 자연적 은총, 즉 우리를 둘러싼 세계의 질서들 내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은총이어야만”(333) 합니다. 이는 개성화를 가능하게 하는 은총이 우리 주변에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상태로 만연해 있음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무조건적인 은총을 담보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때론 기다림을 배워야 합니다. 즉 경고 없이 도래할 수 있는 건조지를 견뎌내는 법을 배워야”(335) 한다는 것입니다. 죽음 충동이 삶 충동으로 전환되어 그 견딜 수 없는 에너지가 결국에는 삶의 추동력이 되는 것처럼 죽음에서 삶으로의 변모가 일어나기까지는 방법이 없습니다. ‘견뎌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책을 통한 저자의 혜안을 세 가지 살펴보았습니다. 첫째는 의학적으로 정확한 진단과 알맞은 처방 그리고 꾸준한 약물 복용이 필요하다는 것이었고, 둘째는 정신질환이 의학적 접근이 필요할 뿐 아니라 철학적 접근이 필요하다는 것이었으며, 셋째는 이 철학적 접근이 성스러운 접층 곧 은총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쯤에서 거칠고 어리숙한 질문 세 가지를 던지고 글을 마무리하고 싶습니다. 첫째는 ‘조울증과 천재의 연관성을 밝혀낸 의견의 근거가 한정적이지 않은가? 그래서 이를 일부 조울증 환자들에게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있지 않은가?’라는 것입니다. 저자는 조울증 환자들이 창조성을 지니고 있음을, 더 나아가 조울증 환자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많은 이들이 천재성을 지니고 있음을 다양한 사례와 풍부한 근거들을 통해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자가 스스로 밝히는 것처럼, 저자가 앓고 계신 조울증이 모든 조울증을 대표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모든 조울증 환자가 모두 저자는 아닙니다. 바꿔 말해, 모든 조울증 환자가 천재성을 띠는 것은 아닙니다.

모두가 아시다시피 조울증에는 여러 형태가 있습니다. 지면의 한계로 이를 이곳에 모두 나열할 수는 없지만, 다양한 조울증이 있다는 것은 하나의 범주로 조울증 환자들을 엮는 것이 매우 거친 시도라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문제는 창조성을 띠지 못하는 혹은 천재성을 띠지 못하는 조울증 환자들은 자신의 조울증에 창조성과 천재성을 띠지 못했다는 이유로 극심한 자학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나 우울증 상태에 들어가게 될 때 이 사실은 극심한 스트레스와 극단적이고 충동적인 선택을 하는 기반이 될 지도 모른다는 점에서 염려가 됩니다.

또한, 자신의 천재성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치료를 거부하는 또 하나의 걸림돌이 될 수 있다 사실을 한 번 더 주지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둘째는 앞서 언급한 사실과 연관되는데 ‘이 책의 내용은 조울증 환자들이 자신들의 천재성을 포기하고 전일성을 회복하는데 노력할 동기 부여가 되는가?’입니다. 모든 조울증 환자가 천재성을 띠는 것은 아니지만, 저자가 다양한 사례와 풍부한 근거로 서술한대로 많은 조울증 환자들은 천재성을 띱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자신들의 천재성을 포기하고 전일성을 추구하려 할까요? 존재의 충만함을 느끼는 순간은 약물 치료로 인해 멍해진 그 상태가 아니라 조증의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조울증의 운명인 천재성을 스스로 포기할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아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코링턴 교수님의 고백처럼, “약물치료로 인해 빼앗긴 자아에 대한 애도”(9) 속에 살아갈 이들이 얼마나 될까요? 이 책의 내용의 일부가 전일성을 회복하는데 하나의 작은 걸림돌이 되지는 않을까라는 어리숙한 걱정을 해봅니다.

셋째는 ‘성스러운 접층을 가능하게 하는 기제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입니다. 정신 질환에는 의학적 접근이 반드시 필요하고 동시에 철학적 접근이 필요함을 앞서 계속 말해왔습니다. 더불어 이 철학적 접근이 성스러운 접층을 통해 가능함을 보여왔습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 그 성스러운 접층은 무엇을 통해 가능하냐는 것입니다. 앞서 언급한 대로 기다리는 것, 간격과 휴식을 채우는 무언가가 도래하기까지 기다리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냐는 것입니다. 미안하게도 조울증 환자들 중 몇몇은 충동적 자살을 시도하는 때입니다. 그들에게 단순히 기다리라는 말은 눈앞에서 죽음을 구경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글을 쓰게 된 이유와 아직 삶을 연장시키고 있는 이유에 대해서 잠시 언급하고 서툰 글을 마무리하려 합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저는 자살 사고와 자살 충동으로 인해 고통 받고 있습니다. 사실 죽음이 두렵지는 않습니다. 다만, 죽기 전 나를 사랑했던 사람들에게 제대로 된 인사를 하고 가지 못할까 그게 두렵습니다. 그래서 글을 쓰기 얼마 전까지도 증상이 심해져 의사 선생님께 내 사람들에게 인사할 수 있도록 내가 죽지 않고 며칠만 더 살 수 있게 하는 강력한 약을 처방해달라는 주문을 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런데 죽지 않고 아직까지 살아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는 제가 살아 있어야 할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제 스스로 살아야할 이유를 찾지는 혹은 만들지는 못했습니다. 제가 살아야할 이유를 찾고 만들어준 것은 저를 사랑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무런 의미 없다고 생각했던 제 숨결이 누군가에게는 하루를 살아가는 힘이 됨을 깨달은 뒤 ‘내가 아직 죽을 때는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의미론적인 지평에서 보았을 때 ‘삶’이라는 글자가 살아나기 시작한 거죠. 너무나도 강력한 죽음 충동은 실재로 기존의 상징계를 박살내 버립니다. 그런데 그 충동의 과정 이후에 죽음은 새로운 삶의 도래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무덤이 있어야 부활이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제 삶 충동은 새로운 상징계를 구성하며 살아가야할 환상들을 다시금 생산해내기 시작합니다.

문제는, 바로 죽음 충동에서 삶 충동으로 전환되는 그 전환점입니다. 그 전환점은 어떻게 이루어지고, 그 순간은 어떻게 버텨낼 수 있습니까? 저의 작은 경험으로는 그것이 바로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사랑이 죽음을 삶으로, 모퉁이 돌을 머릿돌로, 버려진 것들을 주체로 변모하게 하는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 믿음을 가지고 충실하게 그 삶을 살아내는 것, 그것이 오늘 제가 삶을 연장하는 이유입니다.

한 철학자의 말을 통해 쓸모없는 글을 끝맺습니다.

“존재할 이유를 갖지 않았던 무엇, 당신에게 하나의 가능성처럼 주어지지 않았던 무엇을 존재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필자소개】 주찬종은 감리교신학대학 휴학 중으로서 해병대 재직 중 증상이 발발해 현재 자신의 증세를 치유하며 삶으로 복귀하기 위해 의미를 찾아가는 중이다.

주찬종 webmaster@dangdang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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