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setNet1_2

우상숭배와 신앙

기사승인 2019.02.07  06:30:40

공유
default_news_ad1

‘물질적인 것이 초자연적 존재의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여 숭배의 대상으로 믿거나 추앙하는 일’, ‘감각적 대상을 숭배하는 것’, ‘보이는 것들의 형상이나 보이지 않는 것들을 형상화한 것을 신으로 믿고 섬기는 일’, ‘우상숭배’를 풀이한 사전적 의미들이다.

배타적 교리를 가지고 있는 기독교는 이 ‘우상숭배’란 단어에 꽤나 민감하다. 이유는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께서 우상숭배를 싫어하실 뿐 아니라 금하기 때문이다. 설날을 보내며, 집집마다 차례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제사를 폄하하려는 의도는 없다. 다만 계제에 우리의 우상숭배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사회학적으로 기독교는 종교로 분류된다. 하지만 종교를 가장 싫어하는 게 기독교다. 예수님 당시 종교인들인 바리새인이나 제사장들이 핀잔을 받은 것도 이 때문이다. 신앙은 우상숭배와 구별되기에 그렇다. 종교와 신앙의 구별은 우상숭배에 달려있다. 신앙은 우상숭배를 용납할 수 없다. 하지만 종교는 우상숭배와 잘 어울린다.

만들어놓은 우상보다 만들어놓지 않은 우상이 더 무섭다. 아는 우상보다 알지 못하는 우상이 더 무섭다. 우상숭배를 하고 있다고 인지하지 못하는 우상숭배가 더 무서운 것은 고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그런 게 있다.

한 화가가 스승을 찾아가 길을 물었다. “저는 평생 그림으로 진리를 이루고 하나님께 이르고자 하였으나 세월이 흐를수록 찾아드는 것은 초조함과 슬픔뿐입니다. 진리도 하나님도 만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자 스승이 말했다. “아, 그렇소. 그렇다면, 당신 작품 좀 봅시다.”

그 화가는 수레에 자기가 그린 그림을 가득 싣고 다시 스승을 찾아와 말했다. “걸작 가운데 걸작만 골라 가지고 왔습니다.” 스승이 다시 화가에게 물었다. “하나님을 꼭 만나고 싶소?” “예, 꼭 그리하고 싶습니다!” “자네의 그 그림으로 오늘 저녁 내 방을 좀 데우게!”

화가는 한 동안 망설이다가 이를 깨물고 일어나, 자기 작품으로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 아궁이에서 자기 생명 같던 작품이 불꽃을 내며 타들어갔다. 화가는 자기 창자가 끊어지고,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고통으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타들어가는 작품을 보면서 차츰 자기 마음의 고통과 어둠과 한계도 사라지는 것이었다.

얼마간 시간이 지나자 화가는 드디어 그 불꽃 속에서 활짝 웃으며 맞이하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 하나님이 웃으시자 화가도 함께 웃었다. 자신의 걸작이 타서 없어질 때 진정한 걸작을 만드신 하나님이 그를 만나 주신 것이다. 자신이 우상같이 여겼던 작품을 버릴 때 진정한 신앙에 이른 것이다.

종교는 자신을 위한다. 신앙은 하나님을 위한다. 종교는 종교의 대상이 희생물이다. 신앙은 내가 희생물이다. 종교는 그를 이용해 나를 채운다. 신앙은 그 때문에 나를 버린다. 우상숭배와 종교는 같다. 우상숭배와 신앙은 다르다.

성경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27) 이 메시지를 따르는 게 신앙이다.

 

   
▲ 김학현 목사

김학현 nazunja@gmail.com

<저작권자 © 당당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4
default_side_ad1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포토

1 2 3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etNet2
default_bottom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