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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가이 오가이 헤가이

기사승인 2019.03.13  22:5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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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 리가이 오가이 헤가이

 

하루도 빠짐 없이 저녁에 만나 세 시간씩 한국말을 가르치자 학생들과 소통할 수 있게 됐다. 소통이 되니 물어볼 수 있었다.

당연히 제일 궁금했던 것은, 적지 않은 한인들이 러시아에서 살게 된 연유였다. 학생들은 조부모와 부모에게서 들었던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 두만강 너머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다시 러시아 곳곳으로 삶을 옮기는 고려인들의 이야기는 슬픈 영화장면 같았다.

사할린 동포 이야기는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1937년 가을 강제이주 사건은 모르고 있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다. 강제이주를 경험하고 알았던 고려인조차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것은 터부였다. 비밀문서들이 해제되어 실상이 많이 알려진 지금도, 고려인 3세를 넘어가면 태반이 모른다.

이 사건은 처참해서 숨 고르며 해야 하고, 시대의 전후를 살펴가며 해야 할 것 같다.

또 궁금했던 것은, 고려인의 성이 ‘가이’로 끝나는 것이었다. 김씨 성과 박씨 성은 ‘킴’과 ‘팍’ 그대로인데, 이씨는 ‘리가이’로, 오씨는 ‘오가이’로, 허씨는 ‘헤가이’로 부른다. 그렇게 된 연유는 186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연해주가 러시아 땅이 되고서 러시아 정부는 등록을 실시했다. 관리가 물었다. “성이 무엇?” “이가(李家)요.” 이렇게 대답하면 ‘리가이’(Ligai)가 됐고, “이(李)요.” 이렇게 대답하면 ‘리’(Li)가 됐다.

김씨나 박씨나 최씨처럼 ‘ㅁ’이나 ‘ㄱ’, ‘이’로 끝나는 성은 러시아 남자 성과 비슷하니까 그대로 뒀다. 가이는 한국인의 성을 러시아인의 성처럼 고치려고 붙인 어미인 셈이다.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미국에 살았던 독일 이민자들이 ‘mann’으로 끝나는 성을 ‘man’으로 고친 것과 다르지 않다. 차이는 본인 선택이냐 강제냐였을 뿐이다.

사립 대학교는 설립허가로 충분하지 않았다. 정식 대학으로 자리매김하려면 정부가 정한 요건을 구비하고 심사를 두 번 더 받아야 했다. 사립대학교 설립이 러시아에서 가능해졌다지만 그것은 넘기 힘든 벽이었다.

대학교 이름을 ‘디트리히 본훼퍼’로 지은 것은 독일 교회의 지원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독일 사람들은 러시아와 가까이 살았다. 발틱(Baltic) 해에는 일찍이 한자 동맹(die Hanse) 도시들이 번성했고, 독일어권 사람들은 옛 모스크바 공국과 활발하게 거래했다.

독일의 전신인 프로이센은 발틱 해안에 있었다. 독일 기사단(Deutscher Orden)이 세운 라트비아(Latvia)는 러시아 땅과 이웃하고, 임마누엘 칸트가 평생 떠난 적 없다는 쾨닉스베르크(Königsberg)는 지금 러시아 땅이다. 칼리닌그라드(Kaliningrad)가 그곳이다.

삼백 년 전 스웨덴인과 폴란드인들을 몰아낸 표토르 대제(Peter the Great)는 발틱 해 네바(Neva) 강 하류에 상트페테르부르크 도시를 건설했다. 수도도 모스크바에서 그곳으로 옮겼다. 그리고 독일, 네덜란드, 프랑스, 이탈리아의 문화와 기술을 왕성하게 흡수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도시와 네바 강변에는 독일 사람들이 꽤 살았다. 그들을 위한 루터 교회도 여러 곳에 세워졌는데, 그 교회들은 공산주의 시절 문을 닫았다.

‘넵스키 프로스펙트’(Nevsky Prospect)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도심의 주도로다.거기에는 정교회만 있지 않고 루터 교회와 가톨릭 교회도 있다.

재미있는 것은, 서유럽 신구교 교회들이 거리로부터 수십 걸음 들어간 곳에 빼꼼히 서 있다는 사실이다. 독일도 마찬가지다. 독일 감리교회는 하나같이 큰 도로에서 들어간 곳, 아니면 작은 도로변에 서 있다. 나라마다 정책이 그랬다.

넵스키 프로스펙트에 있는 루터 교회(die Petrikirche)는 1937년 문을 닫고 두 목사는 총살당했다. 1962년에는 위아래 층을 뚫고 콘크리트를 부어 수영장을 만들어 버렸다.

소련이 무너지고 교회를 되찾은 독일 교회는 건물 수리에 골머리를 앓았다. 집채만한 콘크리트 더미를 완전히 떼어내지 못하고 마무리한 예배당은 지금 가 봐도 퀭하다. 독일 교회는 많은 돈을 썼을 것이다.

독일 교회를 회복하는 일도 아니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이름만 독일어인 대학교를, 독일 선교사도 아니고 한국 선교사가 하는 러시아 선교를 독일 교회가 선뜻 후원할 리 만무했다.

이번에는 학교 이름을 대구에 있는 ㄱ대학으로 변경했다. ㄱ대학교의 지원을 받는 분교처럼 운영할 꿈을 꾼 것인데, 꿈이었다. 러시아 당국의 심사를 넘을 수 없었던 대학교는 결국 안개처럼 사라졌다.

여남은 재학생들은 한국으로 가서 ㄱ대학교에 단체 편입했고, 대부분 한국이 좋다며 거기서 산다는 소식이다. 나는 한국을 떠났는데 그들은 한국으로 돌아갔다. 내가 여기 있음을 알고 연락하는 학생도 있다. 중년이 된 그네들 말에 묻어 나오는 한국 소식은 아득한 옛이야기 같다.

친구 목사와 약속한 일년이 다가오자 나는 독일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박효원 hyo1956@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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