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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 꼬무날까

기사승인 2019.03.20  23:5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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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반에 모인 학생들은 매일 나만 바라보며 한국말을 배웠다. 한자도 배웠다. 그 중 세 명은 함께 간단한 주일예배도 드리고 성경공부도 했다.
독일로 돌아갈 채비를 하다가 생각을 바꿨다. 고려인을 위해 더 일해보자. 계속 수입 없이는 러시아에서 살 수 없었다. 후원을 받을 수 있는 선교사로 일하는 것이 좋겠다 싶었다.

새 비자도 필요했다. 비자를 만들러 귀국해 광화문 감리교본부에 들렀다. 선교국을 찾아가 대뜸 파송해 달라고 했다. 보름 후 돌아갈 때까지 해 달라는 부탁도 곁들였다.
선교국 총무였던 조승혁 목사님은 기가 막혔다. 말없이 서 있으니까 조건을 걸었다. 선교파송위원회가 모이도록 해볼 테니 후원교회를 찾아서 후원약정서를 채워 가져와라. 그때는 선교사 교육이 없었다.
어느 교회가 선교사를 후원하겠다고 불쑥 나서겠는가? 도와주려는 선배와 친구 목사는 있어도 급하게 후원약정서에 서명할 교회는 없었다.

고맙게도 궁정교회 조영민 목사님이 나서서 북방선교회에 연락을 하고, 그 선교회가 지원하겠다는 구두 약속을 받았다. 서명 없는 후원약정서와 구두 약속만으로 선교파송위원회 회의에 갔다. 러시아로 떠나기 이틀 전이었다.
파송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모임은 끝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위원장인 이종복 목사님이 후원약정서에 서명해주는 것이 아닌가. 그 목사님은 초면이었다. 그렇게 해서 선교사가 됐다.
이런 일은 한국 교회에서나 가능하지, 미국 교회나 독일 교회에서는 일어날 수 없다. 행정은 부족할지 모르나 사람을 믿고 후원하는 열정은 한국 교회가 남다르다.

태백산맥에 나오는 글로 기억한다. “사나이로서 해 볼만한 일이다.” 아버지 김사용이 소신대로 살아보겠다며 작별 인사차 들른 아들 범준에게 한 말이다. 지주의 아들 김범준이 가려는 길은 생소한 이념이었고 위험한 길이었다. 그런데도 김사용은 아들에게 용기를 준다.
나도 그런 경험을 했다. 왜 하필 소련이냐? 공산주의 종주국인데 왜 거길 들어가냐? 소련은 해체됐어도 사람들 생각은 여전했다. 수개월 동안 러시아의 혼란을 경험했던 나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시 망설임이 왔다. 그때 자교교회 이승호 목사님이 걸걸한 목소리로 말했다. “선교사로서 해 볼만한 일이다.” 걱정하는 말보다 용기를 불어넣는 말 한마디가 중요함을 새삼 깨달았다.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오니 저녁반에서 공부하던 고려인들은 신났다. 대학교 교실을 떠나야 했으므로 당장 새 장소가 필요했다.
큰 방 하나와 작은 방 하나, 긴 복도와 부엌이 있는 아파트를 찾았다. 가스와 물은 들어왔다. 화장실은 배수구만 있고 칸막이가 없었다. 아파트의 외벽은 1미터나 됐다. 90년대에는 그런 아파트들이 많았고 지금도 적지 않다. ‘꼼무날나야 크바르티라’라고 부르는 공동주택인데 그냥 ‘꼬무날까’라고 부른다.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하고 러시아의 수도로 삼은 표토르 대제는 모스크바에 사는 귀족들을 강제로 이주시켰다. 벽이 두텁고 사오 층 높이인 도심 건물은 대개 귀족이 살았던 집들이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고 구성된 노동자 대표 평의회인 소비에트(Soviet)는 공동생활(commune)이라는 이상을 실천하려 했다.
그러나 혁명 후 일어난 내전으로 집들이 훼손된데다 주택들은 턱없이 부족했다. 혁명이 마무리되고 새로 권력을 잡은 스탈린은 공동생활이라는 이상보다 꼬무날까를 택했다.
당국은 가족 수에 따라 귀족들의 방을 나눠줬다. 큰 귀족 집은 복도를 막아 둘이나 셋으로 나누고 다른 출입문을 냈다. 거기에 서너 가구가 모여 살았다. 같이 살면서 서로 감시하도록 할 의도였다.
화장실도 하나 부엌도 하나였으니 불편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소리치고 싸우고, 이웃들과 관계도 좋지 않았다. 게다가 집은 개인 소유가 아니라 정부로부터 49년씩 무상으로 빌려 쓰는 것이니, 깨끗할 리 만무였다.

공산주의가 끝나자 거주자들은 소유권을 인정받았다. 그때 잽싸게 움직인 사람들이 꼬무날까에 사는 사람들을 유혹했다.
너의 가족이 사는 방을 변두리에 있는 작은 아파트 한 채와 바꾸도록 해주겠다. 지긋지긋한 꼬무날까를 떠나고 싶었던 사람들은 너도나도 집을 바꿨다. 사람들이 떠난 꼬무날까는 거창한 수리를 거쳐 시장에 매물로 나왔다. 거기에 신흥부자들이 들어와 살았다.
아직도 꼬무날까를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변두리에 위치한 아파트이거나, 상태가 좋지 않은 아파트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은 새 아파트로 이주할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빌린 아파트는 꼬무날까였고 수리하지 않은 상태였다. 변기를 놓고 칸막이를 해 화장실을 만들었다. 천정을 회로 칠하고, 긴 복도를 흰 종이로 도배했다. 거기는 어린 학생들의 그림 그리기 놀이터가 될 것이었다.
걸상이 있으면 공간이 좁아지므로, 바닥에 앉아 사용할 책상을 주문해서 짰다. 그리고 카펫을 깔았다. 학생들은 바닥에 앉아 등을 벽에 대고 한국어를 배웠다.
학생 수가 늘면서 교사가 필요하자,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 학위과정에 있던 유학생 몇이 거들었다. 이름들이 기억난다. 최윤락 안지영 최종술. 지금 한국 어느 대학교에 있을 것이다.
한국어 기초 네 반에 매일 삼사십 명 고려인들이 몰려들자, 복도와 부엌도 교실이 되어야 했다. 주일이면 교실에서 열 명 미만이 모여 앉아 예배를 드렸다.

박효원 hyo1956@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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