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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부활

기사승인 2019.04.14  01:5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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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부활

  벌써 5년 전 일이 되었다. 그해 4월 16일, 세월호는 온 국민의 마음에 깊이 빠진 채 여전히 깊이 잠겨 있다. 그 때 일을 회상하는 것은 참 용기가 필요하다. 어김없이 세월은 흐르지만, 어찌 세월호를 잊을 수 있을까? 자식을 둔 국민은 모두 같은 마음의 부모였다.

  그날은 고난주간 금요일이었다. 4월 18일, 완전히 뒤집힌 세월호에서 구조될 가능성은 희박한데, 방송은 앵무새처럼 골든타임만 반복하고 있다. 성 금요일기도회에 참석한 어느 부부가 노란 리본을 옷깃에 달고 왔다. 낯선 일이기에 물었더니 세월호 실종자들의 구조를 희망하는 마음이었다. 2007년 안양YMCA가 처음 시작한 일이었다고 한다. 곧 이어 노란 리본은 전국적 현상이 되었다. 구원의 상징은 점점 좌절의 상장(喪章)이 되어갔다.    

  5월 9일에는 광화문 세종대왕상에 올라갔다가 연행된 감신대생 8명을 면회하러 동대문경찰서에 다녀왔다. 신학생들은 세월호 사건에 대해 대통령의 각성을 촉구하면서, 국민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유치장에 수감된 학생들은 할 도리를 했기에 아주 당당했고, 밖에서 지켜보는 부모도 이 일로 별로 근심하지 않는 듯하였다.   

  동대문경찰서에서 나오는데 청운동에서 긴급한 연락이 왔다. 당시 KBS 보도국장이 세월호 사건에 대해 왜곡된 언사를 한 일로 안산에서 올라 온 부모들이 오랜 시간 주저앉아 농성 중이라고 한다. 늦은 봄볕에도 길바닥은 이글거릴 만큼 뜨거웠다. 소식을 듣고 찾아가니 방송사 사장이 대신 사과한 후 막 해산하는 중이었다. 청와대 길목의 진입을 막고 있는 경찰버스에 붙인 무수한 노란 종이배들이 인상적이었다. 오색풍선을 단 조각배는 세월호의 꿈이었다.

  이른 봄, 우리 집 대문 옆 우편함 안에 이름 모를 새가 둥지를 틀더니 일곱 개 알을 낳았다. 날마다 이를 지켜보는 것은 익숙한 일상이 되었다. 행여 눈치 없는 우체부가 우편물을 그 곳에 넣을 까봐 입구도 테이프로 봉해 두었다. 우편함을 둥지 삼은 ‘손님 새’ 이야기를 사진과 함께 공유하곤 하였다.

  새끼들은 하루가 다르게 부쩍 자랐다. 그날 아침에 보니 입을 벌리고 먹이를 달라던 갓난 새끼들은 이미 우편함이 포화상태일 정도로 컸다. 그리고 오후에 집을 나서면서 우편함을 들여다보니 새끼들은 비상(飛翔)연습을 하려는지 모두 둥지 옆 빈 공간으로 자리를 이동하였다. 이제 곧 떠나려는 몸짓처럼 느껴졌다. 평소처럼 우편함 윗부분을 아주 가볍게 두드리며 안부를 전했다. 그리고 등을 돌리는 순간, 아내가 “앗!”하고 소리를 질렀다.

  갑자기 일곱 마리 새끼들이 서툰 날개 짓을 하며 차례로 우편함의 작은 구멍으로 비상(非常)이륙을 하는 것이다. 그 작고 동그란 구멍은 어미가 수시로 들며날며 새끼들에게 먹이를 물어다 주던 늘 열려있는 문이었다. 새끼들은 대부분 첫 비행에 성공하지 못했다. 제대로 날지 못한 채 이리 저리 겅중거리며 흩어졌다. 혼비백산이 이런 풍경일까?

  새끼들은 금새 보이지 않았지만, 대문 옆 감나무 가지에서 내려다보던 어미 새의 처연한 눈빛은 아직도 심산하다. 새끼들이 처한 곤혹한 처지를 불안하게 내려다보던 어미 새는 벌레를 물고 있었다. 그 시간 이후 우편함은 텅 비었다. 아무 새도 날아오지 않았다. 일곱 마리 새끼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지, 며칠 째 두리번거리던 내 눈빛도 심란하였다. 5월 14일 오후, 안산 화랑유원지에 분향소가 설치되었다기에 조문하러 나서던 길이었다. 무슨 징조 같아서 두고두고 마음이 내려앉았다.

  그해 세월호는 마음의 빚이었다. 9월 15-16일에는 전국에서 모인 목회자들과 광화문 광장에서 하룻밤을 지샜다. 내 가슴에는 ‘127번. 김승환’이란 명찰을 붙였는데, 단원고 2학년 6반이었다. 어느 늦가을, ‘고난모임’이 안산분향소 옆 기도실에서 현장기도회를 한다고 여러 사람을 불러 모았다. 이젠 그곳에도 찾아오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마침 비가 와서 더욱 을씨년 스러운 주일 저녁이었는데 기대보다 많이 모였다. 멀리 김포 문수산성교회에서도 21명이 참석하였다. 이젠 70대 중반이 된 권사님들이 모두 찾아왔다. 반가워하던 그 얼굴은 희망이었다.

  그리고 12월 17일부터 2박 3일간 전라도 강진읍에서 진도 팽목항까지 걸었다. 해마다 하던 연례행사의 방향을 그 해에는 세월호를 따라간 것이다. 눈이 몹시 내렸고, 바닷바람이 거셌다. 눈앞에 펼쳐진 섬들은 너무 가까웠다. 팽목항은 두려울 만큼 멀었고, 또 가까이 존재하였다.

  5년은 세월호를 회고하기에 너무 짧은 시간이지만, 기억하기에는 너무 먼 시간이다. 비록 가슴마다 노란 리본을 떼어낸 지 오래이나, 어찌 그 날의 참람함을 잊을 수 있을까? 고난주간 그날에 지난주 개봉한 영화 ‘생일’을 보기로 약속하였다. 여전히 할 말은 없지만,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숙제로 남았다.

송병구 sbkbochu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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