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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구자의 거친 꿈

기사승인 2019.05.04  00: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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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문익환 통일의집을 방문했습니다. 봄비가 내리는 날이었는데 방문객은 저 혼자뿐이었습니다. 올 해가 목사님께서 방북하신 지 30주년이 되는 해인데 1970년부터 1994년 돌아가시기까지 머무르셨던 그 집에서는 방북과 관련된 특별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거실에는 오래된 피아노가 놓여 있었고 왼쪽 작은 방에는 방북당시의 사진과 평양행 비행기 표, 옥중서신 등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저의 관심을 사로잡았던 것은 생각지 못했던 한 줄기 노래 소리였습니다. 그 노랫소리의 출처는 북에서 제작한 방북 당시 영상이었는데 북한 어린이들의 공연에 대한 답가로 방북 길에 동행했던 정경모 선생님과 함께 부른 것 같았습니다.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한줄기 해란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
지난날 강가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선구자/윤해영 작사 조두남 작곡


그 노랫소리는 저를 두 번 놀라게 했습니다. 먼저 목사님이 노래를 너무 잘하셔서 놀랐습니다. 자유롭고 거침없는 이미지, 그분의 헝클어진 머릿결, 덥수룩한 수염과 같은 걸걸한 음성을 생각했는데 너무나도 힘차고, 맑게 정제된 테너 보이스에 깜작 놀랐습니다. 목사님은 마치 이탈리아의 전설적인 테너 베냐미노 질리(1890~1957)처럼 뒷짐을 진 채로 가슴을 활짝 펴고 기품 있게 노래하셨고 마지막 부분에서는 멋들어지게 고음의 화음까지 넣으셨습니다. 타고난 음악성과 노래에 대한 애정 없이는 결코 나올 수 없는 가창이었습니다. 저는 그 노랫소리를 또 듣고 싶어서 무언가에 이끌리듯 며칠 뒤 통일의 집을 다시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테너의 목소리는 남성과 여성을 뛰어 넘는 독특한 영역입니다. 그래서 특별히 더 사랑받습니다. 깨끗한 영혼, 진실함과 용기 가운데 단순함에 이를 수 있어야 테너다운 음성을 낼 수 있습니다. 문목사님은 성악을 공부하며 목소리를 가꾸지 않으셨어도 하나님과 성경과 민족을 사랑하시며 그런 미덕을 가다듬으셨기에 어떤 테너가수 보다 더 아름다운 노래를 할 수 있으셨던 것 같습니다. 

다음으로 문목사님의 노래는 제게 한국가곡의 멋을 새로이 일깨워 주었습니다. 소박하고 서정적이고 선비적인 기품이 있는 한국 가곡만의 독특한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한국가곡의 멋을 잃어버린 이유는 발성에 사로잡혀 ‘시적 가사의 음악적 표현’이라는 노래의 본질을 잃어 버렸던 한국 성악가들 때문이었습니다.

예전에 어떤 유명한 성악가가 성악가들의 노래 가사는 왜 잘 들리지 않느냐는 질문에 좋은 노래를 위해서는 발음을 희생할 수밖에 없다고 대답한 것이 기억납니다. 저는 결코 동의하지 않습니다. 좋은 노래의 핵심은 가사의 표현에 있는 것이지요. 결국 성악가들의 발성에 대한 집착이 아름다운 우리 가곡을 발성 차력 쇼나 노래자랑의 도구로 전락시켜버렸고 대중들도 점점 한국가곡에 등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노래와 전혀 상관없어 보이던 한 노 목사님이 오래된 영상 속에서 한국가곡의 참 멋을 다시금 맛보게 해주셨습니다.

가곡 ‘선구자’는 한국 가곡을 대표하는 노래입니다. 수많은 성악가들이 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문목사님의 노래만큼 감동적인 ‘선구자’는 없어 보입니다. 노래뿐만 아니라 그분의 삶이 ‘통일의 선구자’로 두고두고 기억될 것이기 때문이겠지요. 거실 오른쪽 방, 문목사님이 임종하셨던 그 방에는 목사님과 부인 박용길 여사의 사진이 걸려 있었습니다. 환한 미소 가운데 목사님의 거친 머릿결, 거칠고 깊은 주름 사이로 그분이 품으셨던 거친 꿈이 살아 꿈틀대는 듯합니다. 그 꿈은 지금 어느 곳에서 깊어 있을까요.

사진 앞에서 무릎을 꿇고 큰 절을 올려드렸습니다. 건너 방에서 목사님의 선구자 노래 소리가 들려옵니다. 참을 수 없는 눈물이 넘쳐옵니다. 사람이 없어 다행입니다. 마음껏 소리 내어 울었습니다. 목사로서, 한국인으로서, 성악가로서 너무 부끄럽고 죄송했으며 감사했습니다.

 

조진호 jino-j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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