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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둥이 무너지면

기사승인 2019.05.12  14:4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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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둥이 무너지면
잠23:22-25
(2019/05/12, 부활절 제4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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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를 낳아 준 아버지에게 순종하고 늙은 어머니를 업신여기지 말아라. 진리를 사들이되 팔지는 말아라. 지혜와 훈계와 명철도 그렇게 하여라. 의인의 아버지는 크게 기뻐할 것이며, 지혜로운 자식을 둔 아버지는 크게 즐거워할 것이다. 너의 어버이를 즐겁게 하여라. 특히 너를 낳은 어머니를 기쁘게 하여라.]

∙어머니날의 뿌리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해마다 5월 둘째 주일을 우리는 어버이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가정에 대해 생각해보는 주일이기도 합니다. 미국 사람들도 ‘어머니날’을 지킵니다. 며칠 전 신문기사를 통해 그 날의 유래를 알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날은 미국에서 1868년 앤 리브스 자비스라는 여성이 조직한 ‘어머니 우애의 날’이 효시로 꼽힌다“고 합니다. 자비스는 남북전쟁이 끝난 지 3년이 되는 해에 양쪽 참전 군인들을 초청해 동병상련의 아픔을 나누고 화해를 도모하는 행사를 열었습니다. 전쟁으로 찢긴 이들의 마음을 어머니의 마음으로 어루만지고 평화라는 인류의 목표를 지레 포기하지 말자는 것이 그날의 설립 취지인 셈입니다(한겨레, 2019/5/8, 안영춘 논설위원의 유레카, ‘어버이날의 오염’).

프랑스의 화가인 조르주 루오는 제1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목격한 후 ‘미제레레’라는 제목의 판화집을 냈습니다. ‘미제레레’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뜻입니다. 58점의 판화에는 인간의 죄로 인해 수난의 길을 걷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과 아울러, 인간을 수단으로 삼는 세상의 무정함과 폭력성이 담겨 있습니다. 첫 번째 작품의 제목은 “하나님, 자비가 크시오니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이고 마지막 작품 제목은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음을 입었다”입니다. 자비를 구하는 외침으로 시작하여 은총에 대한 감사와 찬미로 끝나는 셈입니다. 그 가운데 마흔 두 번째 작품 제목은 ‘어머니들이 미워하는 전쟁’입니다. 그 작품은 전쟁의 참상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고개를 숙인 채 고요히 앉아 있는 어머니의 모습과 어머니 무릎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기도를 올리는 것 같은 아이의 모습이 담겨 있을 뿐입니다. 어머니와 아이의 모습은 너무나 고요해서 누구도 그 고요함을 깨뜨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루오는 전쟁을 추상화하려고 그런 작품을 만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전쟁이 이런 평온함을 깨뜨려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드러내려 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머니의 날’ 혹은 ‘어버이의 날‘은 이런 뜻을 되새기는 날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자식들에게 평화로운 세상을 물려주고 싶은 것은 모든 부모의 한결같은 염원입니다. ‘어머니 우애의 날‘을 제안했던 자비스는 자기의 뜻과 무관하게 그 날이 자본의 마케팅으로 오염되고 있음을 보면서 어머니날의 폐지를 청원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지금도 어버이날은 백화점, 식당, 선물 가게, 꽃가게의 효도 마케팅에 이용되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십계명의 다섯 번째 계명은 “너희 부모를 공경하여라. 그래야 너희는 주 너희 하나님이 너희에게 준 땅에서 오래도록 살 것”(출20:12)이라고 말합니다. 젊은이들은 이 말을 기성세대의 옆구리 찔러 절 받기쯤으로 여기면 안 됩니다. 부모 공경이란 자기 뿌리에 대한 존중입니다. 세상에는 부모답지 못한 부모가 있는 게 사실입니다. 자식들에게 고통스러운 기억을 안겨주고,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히는 사람들 말입니다. 차마 그런 이들까지 공경하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런 예외적 경우가 있다 해도 부모는 기본적으로 생명의 전달자입니다. 그들을 함부로 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존경을 잃어버린 세대
사람이 사람답게 되는 것은 존중해야 할 대상들을 존중할 줄 아는 데 있습니다. 저는 우리 시대의 영적 빈곤은 존경의 대상을 잃어버린 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확신합니다. 우리 시대에 존경이라는 단어가 오염된 것도 사실입니다. 여야 국회의원들이 서로를 향해 소리를 지르고 마치 모욕 경쟁을 하는 것 같으면서도 말끝마다 서로 ‘존경하는 ~ 의원님’ 하고 지칭하는 것을 보면 ‘이건 뭐지?’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경은 포기되어서는 안 되는 가치입니다. 바울은 성도들에게 “형제의 사랑으로 서로 다정하게 대하며,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십시오“(롬12:10)라고 권고합니다. ‘존경‘이라는 말이 거리감을 느끼게 만든다면 ‘귀히 여김’ 혹은 ‘아낌’으로 바꾸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 바울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성도들에게 “자기보다 서로 남을 낫게 여기십시오”(빌2:3)라고 말합니다. 짐짓 그러라는 말이 아니라 정말 그렇게 여기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그 마음을 배우기 위해 주님 앞에 있습니다. 그 공부의 뿌리 혹은 기초가 부모 공경입니다. 반칠환 시인이 ‘어머니’라는 시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즌데만 디뎌온 것이 아니었으리라. 더러는 마른 땅을 밟아보기도 했으리라. 시린 눈발에 얼기만 한 것은 아니었으리라. 더러는 따스한 아랫목에 지져보기도 했으리라. 구멍 난 흙양말을 신기만 한 것은 아니었으리라. 더러는 보드라운 버선코를 오똑 세워보기도 했으리라. 종종걸음만 친 것은 아니었으리라. 더러는 덩실 어깨춤을 실어보기도 했으리라./열무김치에 물 말아 자신 밥상 너머 물 날은 몸뻬 밑으로, 아니 혼곤한 낮잠 사이로 비어져 나온, 뒷꿈치가 풀뿌리처럼 갈라진.”

시인은 낮잠을 주무시고 계신 어머니의 풀뿌리처럼 갈라진 뒷꿈치를 보며 어머니의 일평생을 가늠해봅니다. ‘아니었으리라’와 ‘했으리라’는 단어가 반복되고 있습니다. ‘아니었으리라‘는 대개 삶의 곤고함을 나타내는 상황과 연결됩니다. 젖은 데를 디디며 산 것, 시린 눈발에 꽁꽁 언 것, 흙물이 든 구멍난 양말을 신은 것, 종종걸음 친 것 등이 그것입니다. 반면 ‘했으리라’는 따뜻하고 행복했던 시간과 연결됩니다. 그런데 교차하는 이 두 단어는 묘하게도 어머니가 견뎌온 삶의 곤고함을 애닯아하는 시인의 마음을 더욱 도드라지게 드러내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행복한 시간은 짧고, 견뎌야 했던 시간은 길었음을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을 위해 부모는 많은 것을 포기하며 삽니다. 철없는 사람들은 그걸 당연하게 여깁니다. 당연의 세계에는 감사가 없습니다. 감사는 사람의 성숙함을 나타내는 징표 가운데 하나입니다. 정호승 시인은 ‘햇살에게’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이른 아침에/먼지를 볼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이제는 내가/먼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그래도 먼지가 된 나를/하루 종일/찬란하게 비춰주셔서 감사합니다"

늘 이런 마음으로 살 수 있다면 좋겠지만 현실은 그런 우리를 마구 흔들어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들은 잃어버리기 쉬운 그런 마음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줍니다. 그런 의미에서 좋은 시인들은 예언자입니다. 김현승 시인은 ‘감사하는 마음, 그것은 주인이 누구인지를 아는 마음’이라 말했습니다. 그 마음을 잃는 순간 우리는 욕망의 노예가 되기 쉽습니다.

∙진리를 사되 팔지 말아라
유대인 부모들의 책임 가운데 하나는 자손들에게 신앙의 기억을 전달해주는 것이었습니다. 부모는 ‘기억의 전승 매체’였다는 말입니다. 부모가 자식들에게 주어야 할 최고의 유산이 있다면 그것은 재산이 아니라 왜 사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일깨워주는 일입니다. 오늘 본문은 좋은 부모의 가르침을 짤막하게 요약합니다. “진리를 사들이되 팔지는 말아라. 지혜와 훈계와 명철도 그렇게 하여라”(잠23:23).

진리를 사들이라는 말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스카이 캐슬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서는 많은 투자가 필요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참된 삶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대가를 지불하라는 말입니다. 본회퍼 목사는 ‘값싼 은혜’에 탐닉하는 세태를 비판했습니다. 값싼 은혜란 ‘회개 없는 용서의 설교’, ‘공동체의 징계가 없는 세례’, ‘죄의 고백이 없는 성찬’, ‘개인의 참회가 없는 죄 사함’, ‘본받음이 없는 은혜’, ‘십자가 없는 은혜’, ‘사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은혜’입니다. 값비싼 은혜는 밭에 숨겨진 보화 혹은 귀중한 진주입니다. 그 보화를 얻기 위해서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본회퍼는 “은혜가 값비싼 것은 따르라고 부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디트리히 본회퍼, <나를 따르라>, 김순현 옮김, 복 있는 사람, 2016년 9월 19일, p.31-32). 진리를 사들이라는 말은 이렇게 대가를 치른다는 의미일 겁니다.

그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진리를 팔지 않는 것입니다. 진리는 은혜가 그러하듯이 파는 것이 아니라 선물입니다. 세상에는 곡학아세曲學阿世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밥벌이를 위해 자기 소신을 접는 순간 그는 더 이상 신앙인도 지식인도 아닙니다. 이익에 마음이 팔리는 순간 그는 정의에 대한 관심을 버리고 강자들에게 복무하게 됩니다. 미가는 “입에 먹을 것을 물려 주면 평화를 외치고,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면 전쟁이 다가온다고 협박”(미3:5)하는 예언자들에게 임할 무서운 심판을 예고한 바 있습니다. 뇌물을 받고서야 다스리는 지도자들, 삯을 받고서야 율법을 가르치는 제사장들은 그야말로 진리를 파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떳떳하게 살지 못합니다. 떳떳한 아버지 어머니를 둔 자식, 떳떳한 자식을 둔 부모가 참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돈보다 중요한 것이 떳떳함입니다. 떳떳한 영혼만이 참된 자유를 누리는 법입니다.

∙예수의 가족
이제 엉뚱한 질문을 하나 해보겠습니다. 예수님은 부모님을 공경했나요? 어찌 보면 주님의 삶은 불효처럼 보입니다. 공생애 이후에는 가난한 가정살림에 보탬이 되지 않았고, 그가 택한 삶이 어머니의 마음을 아프게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이 돌자 어느 날 마리아는 다른 자녀들과 예수를 찾아갑니다. 어머니가 찾아오셨다는 전갈을 들은 예수님은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고 물으시고는 둘러앉은 사람들을 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보아라, 내 어머니와 내 형제자매들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다"(막3:33-35). 참 매정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새겨들어야 합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이 가족 이기주의를 강화하라는 말로 이해되어선 곤란합니다. 진정한 효도는 가족주의를 넘어서는 큰 정신이 되는 데 있습니다. 가족주의에 철저한 이들일수록 다른 이들의 고통에 둔감한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낯선 이들 혹은 마음에 내키지 않는 이들과 더불어 ‘새로운 가족‘이 될 용기를 내라고 이르십니다.

지난 5월 7일 우리는 어두운 세상에 은은한 빛을 비추던 한 인물과 작별했습니다. 그는 ‘라르쉬 공동체’(L’Arche community)의 창시자인 장 바니에입니다. 라르쉬란 ‘방주’를 뜻하는 프랑스어입니다. 그는 영국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젊은 시절 해군 장교로 군에 복무하기도 했습니다. 성직자가 되기 위한 훈련도 받았지만 그는 30대 중반의 나이에 프랑스의 어떤 보호시설을 방문했다가 깊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곳은 폭력과 소란으로 인해 혼돈 그 자체였습니다. 차꼬에 채워진 이들은 원을 그리며 빙빙 돌고 있었고, 그들이 내지르는 비명소리는 견디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그는 고통 중에 있는 인류를 치유하는 일에 자기 삶을 바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 결과물이 정신 지체 장애인들과 함께 사는 라르쉬 공동체였습니다.

라르쉬 공동체는 지금 38개 나라에 154개의 공동체로 성장했습니다. 워싱톤 포스트지의 부고(obituary) 전문 기자인 에밀리 랭어는 장 바니에의 부고 기사 제목을 “지적 장애인들에게 가정과 존엄을 돌려주었던 장 바니에가 9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다”(Jean Vanier, who gave homes and dignity to the intellectually disabled, dies at 90)로 뽑았습니다. 누군가에게 가정을 제공한다는 것, 세상에서 존중받지 못하는 이들에게 살 권리를 돌려준다는 것, 이보다 더 아름다운 일이 또 있을까요? 바니에는 그런 삶을 희생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은총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이들과 함께 지내려면 세상에 대한 우리의 생각과 꿈,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선입견들을 내려놓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나를 내려놓으면 세상이 달리 보이는 법입니다. 그것이 연약한 이들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입니다(Emily Langer, The Washintonpost, 2019/5/7 기사 참조). 바니에 같은 위대한 혼들이 있어 세상은 여전히 살만합니다.

존경해야 할 누군가가 없는 삶은 마치 기둥이 무너진 집에 사는 것처럼 위태롭습니다. 존경할 사람이 없는 게 문제가 아니라, 교만에 빠져 존경할 줄 몰는 우리 영혼이 더 큰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모를 공경하라 이르신 것은 우리 삶에 기둥 하나를 마련하라는 초대가 아닌가 싶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마음이 타자에 대한 사랑으로 확장되고, 아름다운 세상의 꿈과 연결될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은총으로 기울어진 혹은 무너진 우리 삶의 기둥이 곧게 일으켜 세워지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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