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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밀리아 데이

기사승인 2019.05.25  00:0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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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자들을 가리키며

“보아라, 나의 어머니와 나의 형제들이다”(마12:49) 하신 주님,
날마다 주님의 가족이 된 기쁨을 누리며 살고 싶습니다.
주님의 꿈을 우리 꿈으로 삼고 해산의 수고를 다 하겠습니다.
우리를 주님의 몸으로 삼아주십시오. 아멘.

어머니를 상기할 때마다 내게 떠오르는 느낌은 따스함과 고요함이다. 엔도 슈사쿠가 <깊은 강>에서 고백하고 있는 것는 바로 나의 고백이기도 하다. 그는 소년 시절부터 자신이 믿을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어머니의 따스함뿐이었다고 말한다. “어머니와 손을 잡았을 때의 그 따스함, 안아 주셨을 때의 체온의 따스함, 사랑의 따스함, 형제들에 비해 특히 모자랐던 나를 돌보아 주시던 따스함!“ 엔도는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어머니의 따스함의 근원에 있었던 것이 하나님의 한 부분이라는 사실을 자각했다고 말한다.

시인 정호승은 벽에서 빼낸 구부러진 못에서 늙어버린 아버지의 모습을 본다. 시인은 벽에서 빼낸 구부러진 못을 차마 옛날처럼 망치로 억지로 펴서 다시 벽에 쾅쾅 박지 못하고, 헝겊으로 닦아놓는 까닭은 그 못이 아버지처럼 보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시인은 뇌경색으로 쓰러진 늙은 아버지를 모시고 공중목욕탕에 가 때밀이용 침상 위에 눕혀 드리고,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본다. 때밀이 청년이 벌거벗은 아버지를 아무리 펴려고 해보아도 되지 않았다. “아버지도 한때 벽에 박혀 녹이 슬도록/모든 무게를 견뎌냈으나/벽을 빠져나오면서 그만/구부러진 못이 되었다“(<못> 부분).

가족의 희망과 절망, 기쁨과 슬픔의 총량을 온 몸으로 견뎌내고 이제 세월의 뒤안길로 쓸쓸히 퇴장하고 있는 늙은 아버지를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이 애잔하다. 구부러진 아버지의 등은 어쩌면 가족들을 위해 그가 평생 감당해야 했던 희생과 헌신의 징표인지도 모르겠다. 가족이 무엇이길래 부모들은 그렇게 희생적인 사랑을 보이는 것일까? 어떤 이는 가정을 ‘둥지’ 혹은 ‘품’으로 표현한다. 그에게 가정은 세상살이에 지친 그를 품어주고 세상에서 받은 상처와 스트레스를 해독해주는 곳이다. 반면 가정을 ‘감옥’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하라’와 ‘하지 말라’는 말이 쉼 없이 울려 퍼지는 가정은 벗어나고픈 질곡이 되기도 하는 법이다.

예수님도 가정에 대해 양가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혼인을 부정하지 않았다. 주님은 갈릴리 가나의 혼인 잔치에 참석하셔서 새롭게 탄생하는 가정을 축복하셨고,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킴으로 잔치의 흥이 사라지지 않도록 하셨다. 하지만 예수님은 가정이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라는 목표를 추구하지 못하도록 사람들을 가두는 차꼬 역할을 한다는 사실도 간과하지 않으셨다. 역사 변혁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일하는 사람들을 귀하게 여기면서도, 내 자식은 그 일에 끼지 않았으면 하는 게 부모 마음이다. 그렇기 때문일까? 주님은 먼저 가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도록 허락해 달라는 어느 제자의 요청에 “죽은 사람들을 장사하는 일은 죽은 사람들에게 맡겨두고, 너는 가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여라”(눅9:60) 하고 말씀하셨다. 너무 매정한 말씀처럼 들린다. 심지어는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일 것”(마10:37)이라고도 말씀하셨다. 사실 가정은 우리를 사사로운 정리와 인정에 묶어두어 보편적인 가치나 공공성을 추구하지 못하도록 할 때가 많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집을 떠나셨다. 유대사회에서 그것은 부덕한 행위였다. 주님은 한 집안의 장남이셨고, 장남은 아버지를 대신 해 가족들을 건사할 책임이 있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예수가 ‘미쳤다’, ‘귀신들렸다’는 소문이 고향 마을에까지 이르렀으니, 가족 모두에게 큰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가족들이 예수님을 찾으러 온 것은 당연한 일이다. 가족들은 주님이 계신 집 안에 들어갈 생각도 못하고 사람을 보내 그를 불렀다. 사람들이 “보십시오, 선생님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바깥에서 선생님을 찾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자, 예수님은 아무도 예상치 못한 말씀을 하셨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 그리고 주위에 둘러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고 말씀하셨다. “보아라, 내 어머니와 내 형제자매들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다.”(마12:46-50)

주님은 가족에 대한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신다. 혈연관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대한 태도야말로 진정한 가족의 기준이라는 것이다.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의 말을 빌어 말하자면 주님은 혈연으로서의 가족을 ‘탈영토화’ 해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새로운 가족으로 ‘재영토화’ 하라고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셈이다. 교회 혹은 신앙 공동체는 주님의 그런 뜻에 부응하여 형성된 새로운 가족이다. 세상에는 가난한 사람들, 위험에 처한 사람들, 난민이 되어 떠도는 사람들 곁에 머물면서 그들의 가슴에 자존감과 희망을 심어주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이들을 섬기기 위해 몸과 마음을 다 바친 사람들, 그들에게 주어지는 명예로운 호칭은 ‘파밀리아 데이Familia Dei‘ 곧 하나님의 가족이다.

김기석 vorblick@dreamw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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