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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이야기

기사승인 2019.06.08  23:4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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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어머니 이야기>(애니북스)를 흥미진진하게 보는 중이다. 흑백 슬라이드처럼 구성한 만화와 함께 낯선 사투리를 입술에 묻혀가며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깨알 같은 재미가 이런 것이구나, 싶다. 작가 김은성은 북청 사람 어머니의 입담을 그대로 옮기려고 하였다.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은 아니지만, 일제시대 함경도 마을에서 일어난 어느 가족의 풍경은 예스럽고, 구술을 그대로 옮긴 듯한 말투에는 중독성이 있다.

  중년의 딸은 어머니의 88년 삶을 영상으로 작업하던 중 만화로 재구성하였다고 한다. 만화책 네 권에 담는데 무려 8년의 세월이 흘렀다. 자칫 절판으로 끝날 <내 어머니 이야기>는 티브 프로그램 ‘알쓸신잡’에서 누가 “세상에서 사라져서는 안 될 책”으로 손꼽으면서 재판을 찍었고, 사람들의 눈길을 끌어 모았다. 어머니의 이야기는 세상 모든 여성의 이야기이다. 소문을 듣고 겨우 1권 빌려 본 후, 2권은 도서관에 예약을 걸어 두었다.

  이 책에 담아낸 작가 외할머니 이초샘의 ‘예수입문’ 이야기는 압권이었다. 북청 산골 미산촌 시골동네에 처음 교회가 세워지는 동기를 생생히 들을 수 있다. 신앙생활이 이야기를 이끄는 주요 흐름은 아니지만 간간히 주인공 이복동녀 권사님의 말꼬리는 만화를 감칠 맛 나게 하고 있다. 무엇보다 외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딸로 이어지는 여성의 삶과 연대감은 더욱 친밀감을 느끼게 한다. 돌아보면 어릴 적 외갓집 이야기는 늘 동화였고, 드라마와 같았다.

  지내놓고 보면 내 어머니의 이야기도 옛날 옛적으로 거슬러 오른다. 듣고 싶어도 더 이상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유품을 정리하다가 뜻밖의 보물을 발견하였다. 어머니가 손으로 쓴 자전적 기록이었다. 철들면서부터 40대 중반인 1981년까지 정리한 글인데, 15년 전에 적고 나서 그 뒤에 이어 쓰는 것을 잊어버리신 모양이었다.

  다행히 몇 권의 일기가 더 있어 이야기를 보충해 준다. 어머니는 그동안 쓴 일기가 부끄러워 다 태웠다고 했지만, 용케 4권(1987년, 1990년, 1997년, 2003년)이 남았다. 일기는 어머니가 세상에 남겨 둔 그 분의 육성인데, 사후에 나를 향해 말을 건네 오신다. 그리고 몇몇 설교문과 기도문 조각들이 남아있다. 어머니의 시각으로 세상을 내다보자니 보물도 이런 보물이 없다.

  모든 노인이 그렇지만 어머니 역시 치매(癡呆)를 두려워하셨다. 마지막 시간들은 종종 두 개의 세상에서 사시는 듯하였다. 꿈의 세상과 현실의 세상 사이에서 자주 흔들거려 우리 자식들을 어질하게 만들었다. 60세 무렵부터 이런 기도를 하셨다. “죽을 때까지 제 정신을 갖고 장로로서 부끄럽지 않게 해주세요.” 그런 간구대로 어머니는 비교적 깨끗이 자신을 마감하셨다.

  최근 극우성향의 교계단체를 대표한다는 어느 목사의 막말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정말 쥐구멍이라도 들고 싶은 심정이다. 아직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이야기를 할 만한 위인은 못되는데, 젊어서 망상(妄想)은 치매 보다 더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 그의 거친 말투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교회를 한 없이 모독하고, 어진 교인들의 삶을 우습게 보는 태도이다. 

  왜 그 목사가 무지하게 내 모는 교인이라 해서 깊은 속이 없겠는가? 어머니의 일기를 보면 시골 아낙이라고 무시하면 오산이란 생각이 든다. 시골교회 나이 든 여성이 품은 당시 시국에 대한 생각을 엿보는 것은 흥미진진한 일이다. 어머니는 민주주의 운동의 소리 없는 지지자였다.

  “장날이다. 시장에도 안 갔다. 뉴스에 박종철 사건 또 다시 세 사람이 입건되었다.”(1987.5.29.)

  “오늘은 제헌절이다. 정부는 말이 아니다. 이 나라가 어떠케 될랴고, 이렇게 엉망인지 한심하다. 학생은 학생데로 정부는 정부데로 각각 나된다.”(1990.7.17.)

  “새벽 기도 다녀와 밥해먹고 선거하고 왔다. 2번 찍었다. 네 번째 찍는거다.”(1997.12.18.)

  “새벽 3시에 일어나 퇴레비 튼이 김대중 씨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많은 고난 끝에 대통령까지 됐다. ... 김00 집사님이 김대중 씨 대통령 됐다고 5년 동안 어떻게 보느냐고 질알이다.”(1997.12.19.)

  “오늘은 16대 대통령 취임식이다. 인정 받는 대통령 존경 받는 대통령 사랑 받는 대통령 되기 위해 기도했다. 취임식에 전 최귀하, 노태우, 전두환, 김영삼, 김대중 내외 다 모였다. 자기들은 잘했는지, 반성하는 시간이 되길 빌엇다. 김대중 대통령 잘했는이 못했느이 해도 이산가족 만나고 금강산 구경가고 체류탄 냄새업고 학생들 데모업고 귀한 일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통일도 시키고 경제도 성장하고 나쁜 사람이 업는 시대가 되었으면 한다.”(2003.2.25.)

  어머니의 이야기에도 중독성이 있었다. 지난 현충일 비 오는 날에 어머니가 낳은 4남매가 모처럼 광화문에서 만나 한담을 나누며 놀았다. 무엇을 먹을까 하다가 어머니의 손맛을 추억하며 북악산 기슭에 있는 유명한 만두집을 찾아갔다. 빈대떡과 만둣국을 차례로 먹으며 어머니 솜씨와 비교하며 연신 성토하였다. 너무 심심하고 맛이 없다고 투정한 것은 셋째 아들인 나만이 아니다. 어쩌면 우리 4남매는 마음이 칼칼해져 얼큰하게 떠오르는 어머니의 마음을 그리워한 듯하다. 우리는 한 우물을 먹고 자랐구나.

  세상 모든 어머니의 이야기는 깨알처럼 보존 되어야 할 금쪽같은 사연들이다. 어느 새 다섯 달 전에 내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셨지만 “세상에서 사라져서는 안 될 이야기”가 있어 오늘 새삼 마음에 품어두고 싶었다.

송병구 sbkbochu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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