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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회퍼처럼?

기사승인 2019.06.13  00: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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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트리히 본회퍼는 “악을 보고 침묵하는 그 자체가 악이다. 하느님은 그런 우리를 죄 없다 하지 않으실 것이다!”라고 말하며 나치의 히틀러에 맞서 저항하다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독일 고백교회의 목사입니다. “값싼 은총은 교회의 치명적인 적”이라며 기복신앙에 기댄 채 복음을 실천하지 않는 기독교를 싸구려 은총을 추구하는 천박한 종교라고 비판했던 본회퍼는 정의와 평화를 위한 그리스도인의 책임을 강조하며, 불의와 불공정에 저항하고 약자들을 감싸고 복음으로 그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것이 교회의 역할이라고 주장했습니다.

1933년 나치가 집권하자 독일교회는 히틀러를 그리스도로 숭배했습니다. 하지만 본회퍼는 히틀러에 대한 우상숭배의 위험성을 경고하며 나치에 저항했고. 이로 인해 그가 교장으로 있던 핑켈발데 신학교는 1937년에 폐쇄됐습니다. 이후 친구인 폴레민의 주선으로 미국 유니온 신학교 교수직을 제안받고 미국으로 떠난 본회퍼는 미국에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아 “나는 유니언 신학교의 학장인 코핀 박사의 집 정원에 앉아서 나의 상황과 민족의 상황을 생각하고 기도할 기회를 가졌다. 그리고 그때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분명해졌다. 미국에 온 것은 잘못된 결정이었다. 우리 민족이 수난당하고 있는 이때 나는 독일의 그리스도인들과 운명을 함께해야 한다. 만일 이 때에 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지 않는다면 전쟁이 끝난 후 나는 독일의 재건에 참여할 권리를 가질 수 없을 것이다.”라며 독일로 돌아왔습니다.

국가의 악행에 의한 희생자를 돕는 것을 넘어서 국가의 악행을 저지하고, 나라를 나라답게 만드는 것이 교회의 역할이라고 믿었던 본회퍼는 독일로 돌아 온 후 나치 저항운동에 앞장섰습니다. 그는 “어떤 미친 운전자가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인도에서 차를 몰아 질주한다면 내 임무는 희생자들의 장례나 치르고 유족을 위로하는 것으로 책임을 다했다고 할 수 없다. 만일 내가 그 자리에 있다면 그 자동차에 올라타서 그 미친 운전자에게서 핸들을 빼앗아버려야 한다”며 히틀러 암살계획에 가담했다가 1943년에 체포되고, 1944년 9월 22일에 교수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리고 1945년 4월 9일 “죽음은 끝이 아니라, 영원한 삶의 시작이다.”라는 유언을 남긴 채 39살의 나이에 본회퍼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엊그제 전광훈 한기총 회장이 20세기의 예언자이자 순교자이며, 목사이자 신학자인 본회퍼를 운운하며 본회퍼의 각오로 문재인 정부 타도에 앞장서겠다며 목숨을 건(?) 1일 릴레이 단식을 선언했습니다. 모두가 알고 있듯이 한기총은 전두환 독재정권의 정보기관이 NCCK를 무력화하기 위해 한경직 목사 등 기독교계 수구인사들을 사주해 만든 집단입니다. 그동안 한기총은 권력자와 가진자들의 불의와 약자들의 아픔에는 눈을 감은 채 친일부역자를 두둔하고,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등 독재자를 ‘위대한 지도자’로 칭송하는 행태를 계속해 왔습니다. 그런 점에서 나치에 저항했던 본회퍼의 독일 고백교회와는 정 반대의 성격을 가진 집단입니다. 그런 마당에 소위 ‘빤스 목사’로 불리며 온갖 추악한 행태를 일삼고, 불의와 불공정에는 눈감은 채, 친일과 독재 찬양에 앞장 서 온 집단의 수장인 전광훈이 자신을 본회퍼에 견주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을 넘어 본회퍼에 대한 모독입니다.

 

박경양 kmpeace@chol.com

<저작권자 © 당당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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