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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시 참변 이전 상황 (1)

기사승인 2019.06.14  00: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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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비참한 이야기가 있다. 니항사건(尼港事件)과 자유시(自由市, 스바보드니) 참변이다.
블라디보스톡 해안선을 따라 북으로 올라가면 아무르(흑룡) 강이 나오고, 강 초입에 니콜라엡스키(Nikolayevsk)라는 도시가 있다. 러시아어인 니콜라옙스크의 첫 음절을 따서 ‘니항’(尼港)으로도 부르고 ‘이항’으로도 부른다. 니항은 사할린 섬 북쪽과 가까운데, 아무르강을 따라 올라가면 하바롭스크가 나온다. 강 따라 내륙으로 가기 쉽고 어업을 하기 좋은 항구여서,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했고 일본 영사관도 있었다. 자연히 반혁명군(백군)과 혁명군(적군)의 싸움이 치열했다.

야코프 트랴피찐(Yakov Tryapitsyn)은 아무르 강변 소도시 소피스크(Sofiysk)에서 태어났다. 1차 세계대전을 참전하고 돌아온 그의 눈에 비친 것은 혐오스런 일본인들이었다. 동지들을 규합한 그는 파르티잔(빨치산)이 된 후, 세력을 키워 1920년 2월 니콜라옙스크로 쳐들어갔다. 그리고 일본인과 백군을 닥치는 대로 죽였다. 일본과 내통한 자본가라며 유대인 400여 명을 아무르 강 얼음구멍으로 쑤셔 넣었다.

1919년 니콜라옙스크에는 한인 빨치산도 있었다. 책임자는 박바실리(박병길, 朴秉吉)였고, 부책임자는 박일리야였다. 이들도 의용대를 이끌고 니콜라옙스크에서 전투를 벌였다.
일본 거류민들도 합세한 일본군의 반격에 트랴피찐은 부상을 입었다. 보복에 나선 트랴피찐은 일본인을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학살했다. 강 얼음이 풀리고 일본군의 반격을 예상한 트랴피찐은 니콜랴옙스크에서 철수하면서 포로들을 모두 죽이고 도시의 모든 것을 불태웠다.

박바실리는 쉴새 없이 사람을 학살하는 트랴피찐에 진저리를 쳤다. 반대하는 자들과 모의해서 트랴피찐과 그의 아내, 지휘관들을 죽여버렸다. 그리고 부대원들을 이끌고 자유시로 가서 ‘자유대대’에 편입했다. ‘자유대대’는 혁명군 내 한인 보병부대였고 지휘관은 오하묵(吳夏默, 1895-1936)이었다. 1921년 박바실리는 오하묵의 비서가 됐다. 트랴피찐의 처형을 못마땅해 하던 박일리야는 박바실리를 초다듬하고 살해했다.
1921년 1월부터 3월까지 거의 모든 항일 무장세력은 자유시로 집결했다. 만주에서 연해주로 넘어온 독립군을 훈련시키고 자유시로 인솔한 자가 박일리야와 이항부대다.

항일투쟁의 기폭제는 둘이었다. 하나는 3.1 독립운동이고, 또 하나는 모스크바에서 창립된 ‘코민테른’이다. 둘 다 올해로 백 년이 됐다. 코민테른(Comintern)은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Com-munist Intern-ational)의 합성어다.
1917년 10월 혁명으로 노동자 나라 소비에트가 시작됐다. 레닌은 러시아 혁명으로 세계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이 시작됐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각 민족의 노동자들을 지원할 목적으로 코민테른을 만들었다.

“만국 노동자여 단결하라!” 1848년 마르크스-엥겔스의 ‘공산당선언’에 나오는 유명한 말이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으로 노동운동은 분열됐다. 코민테른은 노동운동의 분열을 극복하려고 했다. 표어는 러시아어로 ‘민중 속으로!’(v narod)였다. ‘브나로드’는 어디서 많이 들어봤다. 1930년대 초 한국에서 있었던 계몽운동이 ‘브나로드 운동’이다.

1918년 하바롭스크에서 한인사회당이 조직되었다. 중심인물은 이동휘였고, 볼셰비키당에서 파견한 원동인민위원회의 지원을 받았다. 김알렉산드라도 여기에 참여했다.
연해주 한인은 모스크바 창립 때부터 코민테른 회의에 참석했다. 연해주에서도 회의가 열렸는데 참석자 다수는 한인들이었다. 코민테른은 많은 한인들이 혁명군에 입대하고 일본 군대와 치열하게 싸우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만주의 상황이 악화되자 만주 독립군들은 러시아 지역으로 넘어와 항일투쟁을 지속하려고 했다. 코민테른은 한인 독립군을 지원했다. 일본의 진격을 한인 독립군으로 막아보겠다는 심산이었다. 연해주 한인들은 자연히 코민테른과 혁명군을 동지로 여겼다.

 1918년 이동휘가 중심이 되어 결성한 한인사회당은 일찍부터 코민테른에 가입했다. 이동휘는 상해로 가서 임시정부의 국무총리가 되었다. 그는 소비에트 정부와 관계를 강화할 것과 무장투쟁을 주장했다. 이것이 거부되자 임시정부를 탈퇴했다. 한인사회당은 1921년 고려공산당으로 개명했다. 이들을 ‘상해파 고려공산당’으로 부른다.

상해파 고려공산당은 상해 임시정부의 외교독립 노선을 비판했다. 그리고 항일 무장투쟁을 위해서 소비에트 정부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의 볼세비키 노선 또한 싫어했다.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은 민족보다 공산주의 이념을 우선했기 때문이다.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의 우두머리는 박바실리의 상관인 오하묵이었다.

박효원 hyo1956@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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