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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군 자유시 참변 배경 (2)

기사승인 2019.06.21  00:0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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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3월 니콜라옙스크(니항, 이항)에서 있었던 일본인 학살은 일본군의 보복으로 이어졌다. 4월 일본군은 블라디보스톡의 혁명군과 연해주 한인 거주지들을 습격했다. 이때 우스리스크에 있던 최재형도 변을 당했다.

최재형(崔在亨, 1858-1920)은 연해주의 한인 역사에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인물이다. 그는 많은 재산을 모았고 명망 높은 러시아 귀화인이었다. 러시아 황제를 두 차례 알현했고 러시아 훈장을 다섯 개나 받았다.

최재형은 항일 독립운동에 모든 것을 쏟아 부었고, 동포를 위해서라면 모든 일을 했다. 직접 의병을 일으켜 함경도로 넘어가 일본군을 무찔렀을 뿐 아니라, 학교들을 세워 교육했고, 협회를 만들고 신문을 발행해 민족의식을 고취했고, 한인 노동자들을 돌보았고, 독립군의 자금과 무기를 댔다. 안중근의 거사 배후에도 최재형이 있었다.

그는 상해임시정부 초대 재무총장에 뽑혔으나 사양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는 최재형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일본군은 그를 체포해 고문하고 처형했다. 가족에게 시신조차 내어주지 않았다.

반혁명군(백군)을 지지하는 체코군이 몰려와 블라디보스톡을 점령한데다 일본군이 분탕질하며 발악하자, 혁명군(적군)은 연해주 북쪽으로 후퇴해 빨치산으로 전환했다. 한인 무장부대들도 같이 움직였다.

1920년 10월 한반도 주둔 일본 정규군이 만주 간도로 밀려왔다. 독립군 소탕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독립군은 간도를 떠나 밀산(密山)을 거쳐 연해주로 이동하고 있었다. 독립군이 사라진 간도는 일본군의 학살장이 됐다. 간도 한인들이 몇 명 죽었는지 아직도 모른다. 박은식은 3016명이라고 했으나 수만 명이 죽었을 것이다.

블라디보스톡에서 하바롭스크까지 가는 철길만큼 시베리아 쪽으로 더 가면 자유시(自由市)가 나온다. 러시아어 스바보드니(Svobodny)가 ‘자유시’인데, 혁명군이 알렉세옙스크(Alexeyevsk) 도시를 완전히 점령하고 붙인 이름이다.

1921년 거의 모든 항일 독립군은 해방구인 자유시로 모였다. 가장 활발한 독립군은 박일리아가 이끄는 이항(尼港, 니콜라옙스크)부대였다. 이 부대는 ‘극동공화국’ 군대에 배속돼 있었다. 극동공화국(또는 원동공화국/치타공화국, 1920-1922)은 소비에트 정부가 일본과 완충지대를 만들기 위해 급조한 위성국이다. 영토는 바이칼호 동쪽부터 연해주까지였고, 곳곳에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극동공화국 한인부는 상해파 이동휘계 인물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이들은 박일리아의 이항부대를 자유시로 보내면서 ‘사할린 의용대’로 이름을 바꿨다. 그리고 자유시에 집결한 모든 한인 무장군을 ‘사할린 의용대’로 재편하려 했다. 박일리아는 모든 한인 부대들이 상해임시정부의 독립군이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또 다른 한인 보병부대인 오하묵의 ‘자유대대’는 이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1919년 상해 임시정부 수립 때, 이동휘는 레닌(Lenin)의 도움을 빌리러 공산주의 단체를 결성했다. 중심은 1918년 하바로프스크에서 조직한 ‘한인사회당’ 사람들이었다. 1921년 5월 ‘고려공산당 대표자회의’를 소집했는데, 이들을 ‘상해파 고려공산당’이라 부른다. 상해에서 고려공산당이 출범했기 때문이다.

1920년 1월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에 공산당 고려부서가 생겼다. 코민테른 동양비서부는 시베리아 거주 소수민족의 사회주의 운동을 관장하는 조직이었다. 1920년 7월 이르쿠츠크 대표회의에서 ‘전로고려공산당’(全露高麗共産黨)가 결성됐다. 이들을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이라 부른다. 실권은 군정위원장인 오하묵에게 있었다.

상해파 고려공산당과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은 서로 정통성을 주장하면서 레닌에게 접근했다. 그러나 민족 해방과 사회주의 혁명의 방법에서 양측은 노선이 달랐다. 상해파는, 먼저 민족을 해방하면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으로 발전할 것이라 했다. 그러므로 부르주아라도 항일 독립 세력이 될 수 있다고 봤다.

이르쿠츠크파는, 러시아와 같은 혁명을 한반도에서도 실행해야 한다고 했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민족 해방보다 먼저다. 그러므로 시베리아의 한인들을 사회주의 혁명이론으로 무장시키고, 볼셰비키 혁명에 동원해서 소비에트 건설에 진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로 맞선 상해파 고려공산당과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은, 한인 군사조직을 둘러싸고 쟁탈전에 들어갔다. 일본은 항일 독립군의 무장을 해제시키라고 소비에트 정부에 강하게 요구했다. 연해주와 시베리아 곳곳을 일본군이 헤집는 상황에서, 볼셰비키 공산당은 일본의 요구를 무시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나온 방도가, 항일 독립군을 볼셰비키 혁명군 부대로 흡수하는 것이었다.

1921년 초여름, ‘사할린 의용대’(이항군)와 ‘자유대대’는 정면으로 충돌했다. ‘자유시 참변’(흑하사변, 黑河事變)이 일어난 것이다. 항일 무장독립군은 극동공화국 소속 사할린 의용대에 많았지만, 볼셰비키 당의 직접적인 지원은 오하묵의 자유대대로 쏠렸다.

상해파는 연해주에 한인 자치지역을 만들고, 항일 독립군을 결집해서 한반도 일본군을 몰아낼 희망을 품었다. 볼셰비키 공산당이 이것을 받아들였을까? 턱없는 소리다.

박효원 hyo1956@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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