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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이주 이전 스탈린 체제

기사승인 2019.07.11  22: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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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들의 연해주 이주는 가뭄과 궁핍에서 비롯됐지만 곧 정치적 이유로 옮아갔다. 1917년부터 1923년까지 한인들의 이주가 가장 많았다. 연해주는 독립운동 기지가 됐다. 1920년대 연해주 한인 인구는 8만을 넘었는데, 연해주 전체 인구의 3분의 1이었다.

1922년 적군(혁명군)이 백군(반혁명군)을 장악하고, 일본이 연해주에서 철수하기 시작하자, 완충지대로 만들었던 극동공화국도 소련(소비에트 연방)에 합병됐다. 연해주 한인들은 빠른 속도로 소비에트 체제에 흡수됐다. 이즈음, 소비에트 연방과 볼셰비키 당의 지도력은 변화를 겪었다.

1918년 8월 30일 레닌은 모스크바에서 공장 시찰을 하던 중 턱과 팔에 총탄을 맞는 중상을 입었다. 총을 쏜 사람은 파니 카플란(Fanny Efimovna Kaplan), 사회주의 혁명당(Socialist Revolutionary Party) 당원이었다. 사회주의 혁명당은 좌파였다. 그런데 1917년 10월 혁명 후 당의 활동이 금지되자, 레닌을 혁명의 배신자로 여겼다. 레닌은 생명을 건졌으나 심한 후유증을 앓았다. 그는 다른 병들도 앓고 있었다. 1922년부터 레닌은 점차 권력에서 멀어졌다.

레닌은 스탈린을 의심했다. 1922년말 “대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스탈린을 언급했다. 이 편지는 레닌의 유언과 다름없었다.

“서기장이 된 스탈린 동지는 자신의 손에 권력을 무제한으로 집중시켰다. 그가 언제나 충분한 주의력을 갖고 그러한 권한을 잘 사용할 수 있을지, 나는 확신할 수 없다.” 그리고 1923년 초 추신을 보냈다. “스탈린은 너무 무례하다... 그가 서기장직을 맡은 것은 용납할 수 없다... 동지들이 스탈린을 직위에서 해임하는 것을 생각해 보라고 나는 제안한다.”

레닌은 이 편지가 당대회에서 읽히기를 바랐다.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레닌이 죽으면 레닌의 동지인 트로츠키(Leon Trotsky, 1879-1940)가 권력을 잡을 텐데, 당원들이 그에게서 공포를 느꼈기 때문이다. 트로츠키는 뛰어난 혁명가지만 그를 믿을 수 없었다. 결국 레닌의 유언장이 공산당 중앙위원회 회의에서 공개되자 다수파는 출판 금지를 결정했다.

소련의 국가원수는 최고 소비에트 상임간부회 주석이 맡았다. 그러나 실제 권력은 인민위원평의회(Council of People's Commissars) 주석에게 있었다. 레닌은 인민위원평의회 주석이었다. 서기는 여럿이었다. 서기장(General Secretary of the Soviet Union)직은 1922년부터 스탈린이 사용했다.

레닌이 뇌졸증으로 쓰러져 거동할 수 없게 되자, 스탈린과 지노비에프(Grigory Yevseyevich Zinoviev, 1883-1936)와 카메네프(Lev Borisovich Kamenev,1883–1936)3인이 당을 이끌었다. 삼두체제(三頭體制, Troica)다. 스탈린은 당에서 영향력을 늘려갔다. 소련의 실질적인 권력은 서기장에게 집중됐다. 이때부터 서기장이 소련 공산당 서열 1위인 최고 권력자의 자리가 됐고, 이 전통은 계속 이어졌다.

1936년 숙청이 몰아쳤을 때 지노비에프과 카메네프는 스탈린에게 살해당했다. 레닌의 동지였던 트로츠키도 스탈린을 비판하다가 도망간 멕시코에서 자객에게 암살당했다.

1920년대가 되면서, 유럽사회에 일었던 혁명은 약화되고, 스탈린이 주장한 일국사회주의로 기울어졌다. 일국사회주의는 연속적이고 세계적인 사회혁명보다, 소련이 먼저 사회주의 혁명을 완성하고 다른 나라로 확산시키자는 주장이었다.

스탈린은 당에서 다수 당원들과 연대했지만, 권력을 잡은 후에는 그들을 숙청했다. 그리고 장기 집권을 위한 개인숭배를 시작했다. 정점은 1929년, 생일을 고쳐가며 치른 전국적인 50회 생일 축하행사였다.

1917년 혁명부터 1921년까지 소련의 경제 사정은 나쁠 수밖에 없었다. 적백 내전으로 전쟁 중이었기 때문이다.

볼셰비키 당은 공동체적인 개념의 경제 정책을 만들었다. 거주지와 작업장과 탁아소를 함께 만들고 노동시간을 주 48시간으로 줄였다. 남자 여자 차별 없이 급여도 같이 받았다. 지주에게서 토지를 몰수해 농민들에게 무상으로 분배했고 생산물도 모두 걷어서 분배했다.

과거에 경험해 보지 못했던 공동생산 체제였지만 생산력은 현저히 떨어졌다. 1921년에 굶어 죽는 이들이 속출했다. 충격을 받은 레닌은 신경제정책을 발표했다. 농민들이 재배한 농산물 일부를 스스로 처분하도록 허용하면서 농업을 장려했다. 농업 경제는 돌아가기 시작했다.

공업도 마찬가지였다. 노동자들은 공동으로 생산물을 만들지 못했다. 경영인이 필요하자 레닌은 경영인을 파견했다. 노동자 스스로 경영하지 않는 신경제정책을 다른 공산주의자들은 반대했다. 그러나 공업 경제는 조금씩 돌아가기 시작했다.

1924년 레닌이 죽었다. 권력을 잡은 스탈린은 4년 동안 신경제정책을 유지했으나, 그 다음은 신경제정책을 버리고 경제발전 5개년 계획을 밀어붙였다. 이것은 그가 주장한 일국사회주의와 잘 맞아 떨어졌다.

경제를 집단화 하고, 중공업을 발전시키고, 농업 생산을 안정시키는 것이 주요계획이었으므로, 모든 자원과 생산은 국유화 됐다. 농업을 집단화 하자 노동력이 남았다. 남은 노동력을 도시로 강제 이주시켜 공장 생산 노동자로 만들었다.

1930년대에 들어서 스탈린은 농업을 국유화하는 작업을 강력히 실행했다. 스탈린이 농업을 국유화 할 때, 계획에 의해서, 연해주의 한인들은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한 것이다.

 

박효원 hyo1956@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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