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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이주의 이유가 있었을까?

기사승인 2019.08.15  00:2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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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미연합감리교회가 총회 차원에서 회개했던 일이 있다. 아메리카 원주민 학살이다. 미국 감리교인은 더욱 회개해야 했다. 감리교 목사였던 치빙턴(John Milton Chivington, 1821-1894)이 저질렀던 샌드크릭 대학살(Sand Creek Massacre) 때문이다. 오하이오 출신으로 일리노이에서 목회를 했던 치빙턴은 콜로래도로 갔다. 그리고 1864년 의용기병대 대령이 되어 아메리카 원주민을 닥치는 대로 학살했다. 미국 감리교회의 검은 역사다.

미국 위스컨신 주에 미국에서 가장 큰 원주민 교회가 있다. 100명 규모인 이 교회는 오나이다 ‘인디언 보호구역’에 있다. 오나이다(Oneida)는 뉴욕 주에 살았던 이로쿼이(Iroquios) 인디언의 동맹 부족이었다.

1800년 뉴욕 주 백인들이 이들을 내몰기 시작했다. 1816년 캐나다 성공회 선교사 윌리엄스(Elizar Williams, 1788-1858)가 선교를 위해 뉴욕으로 왔다. 그는 인디언 말을 잘 했다. 인디언 박해가 끝나지 않을 것임을 안 그는, 원주민들을 인솔해 위스컨신 그린베이(Green Bay)지역으로 이주했다. 1821년부터 두 해에 걸쳐, 오대호를 끼고 캐나다 지역을 통과해 1600킬로미터를 이동하는 긴 여정이었다.

위스컨신 원주민 메노미니(Menominee) 부족이 이들에게 땅을 제공했다. 그들은 오랜 협의를 거쳐 50만 에이커 땅을 내놨다. 미 정부는 그 땅을 6만5천 에이커로 줄여버렸다. 1838년 오나이다 인디언 654명이 정착해 살았다. 위스컨신에 많은 백인들이 들어오면서 그들은 다시 내몰리기 시작했다. 1845년 주지사는 미시시피 강 서편 땅을 주겠으니 이주하라고 했다. 일부 오나이다 인디언들은 미시시피 강 서쪽으로 이주했지만 나머지는 완강히 반대했다. 인디언들과 함께 행동했던 목회자의 역할이 컸다. 1840년 이들이 세운 교회가 오나이다 연합감리교회(Oneida United Methodist Church)다.

2003년 6월 위스컨신 연회는 특별했다. 당시 감독이었던 샤론 레이더(Sharon Z. Rader)가 연회 특별 순서를 마련했다. 백인들의 인디언 학살을 회개하는 순서다. 오나이다 감리교회 교인들이 와서 개회예배를 인도했다. 그들은 북을 가운데 두고 둘러 앉아, 가는 막대기를 두드리면서 자기 언어로 소리질렀다. 성령의 임재를 기원하는 의식이었을 것이다. 그러자 백인 목사들과 교회 대표들이 일어나 회의장을 나갔는데 수가 적지 않았다.

오나이다 감리교회가 주최한 세미나에 참석한 적이 있다. 2주 동안 아메리카 원주민들과 함께 지내면서 많은 것을 알게 됐다. 의문도 있었다. “보호구역(Oneida Nation)에서 만나는 이들에게서 순수 원주민 혈통은 왜 보이지 않는 것인가?”

목회하는 교회에서 매주 헌금을 계수하던 ‘메어리’가 생각났다. 메어리는 자기 할머니가 인디언이라고 했다. 메어리 할머니는 메어리 할아버지와 혼인하고 마을에서 살았는데, 다른 이들은 보호구역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미국 흑인의 역사가 그렇듯, 아메리카 원주민에게는 죽음보다 슬픈 이야기가 많다. 신학대학 추수감사절 예배 때 각인됐던 ‘사나운 인디언’이 25년 만에 내 머리에서 지워졌다. 오나이다 교인들 덕분이다.

일본인들이 한반도를 식민지 삼고 온갖 짓을 다 했지만, 2차 세계대전 때 미국 본토에 살던 일본인들은 반대 경험을 했다. 1941년 12월 7일 일본 전투기가 하와이를 기습했다. 1942년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는 ‘행정명령 9066’(Executive Order 9066)에 서명했다. ‘적성국민들을 강제적으로 거주지에서 내쫓아 수용소에 강제 수용시키는 법’이다. 미국 내 일본인들은 명령에 따라 임시 수용소에 모인 뒤, 미 전역 10군데 강제수용소(War Relocation Center)로 수용됐다. 나치 때 유대인들처럼 수용자 인식표를 가슴에 달고서.

수용소는 인디언 보호지역과 같은 불모지에 세워졌다. 일본인들은 막사 건설에 동원됐고 자신들이 지은 막사에 갇혔다. 강제 수용된 일본인 12만 명의 3분의 2가 미국 시민권자였다. 이들은 직장을 잃고 학업을 중단해야 했다. 재팬 타운은 유령촌이 됐다.

하와이 일본인들은 워낙 많아서 이주시키지 않았다. 그러나 생업이 통제되고 일본어 사용이 금지됐다. 유럽에서 이주한 독일계와 이탈리아계는 전쟁 범죄자만 수용소에 갇혔다. 전쟁 동안 독일계와 이탈리아계 사람들도 숨죽여 살며 미국인으로서 국가 충성심을 보여야 했다.

“자유를 얻으려면 충성을 바쳐라.”(Liberty and Royalty) 어디서 많이 본 문구다. 나치가 세운 강제수용소 입구마다 붙인 문구가 ‘Arbeit macht frei.’(Work sets you free.)다. 거창한 말 같지만 ‘노동 안 하면 끝장’이라는 뜻이다. 수용된 일본인들이 폭동을 일으키면 가차없이 발포해 진압했다. 특히 태어날 때부터 미국 시민권자였던 2세들은 강제 수용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전쟁이 끝나면서 수용소는 문을 닫았다. 일본인들은 수용소를 떠났지만 삶의 터전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늦은 1988년, 미 정부는 공식 사과하고 개인 당 2만 불씩 배상했다.

연해주 한인 강제이주의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비밀이 해제된 사료에 나오는 공식적인 이유는 일본을 위한 간첩 행위를 차단한다는 것이었다. 다른 이유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소련이 일본과 부딪치지 않으면서 시간을 벌려고 했던 이유, 급격한 인구 감소로 동공화된 중앙아시아에 주민을 이주시키려고 했던 이유, 농업 전문가인 한인들을 이주시켜 수확량을 늘리려고 했던 이유 등.

그러나 어떤 이유로도 ‘집단’ 강제이주를 설명할 수 없다. ‘모두’ 땅을 내놓고 떠나든지 아니면 ‘모두’ 목숨을 내놓으라는데 이유가 있었겠는가. 가해자의 ‘광기’가 있었을 뿐이다. 이유는 갖다 붙인 것이다.

박효원 hyo1956@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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