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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sacrifice)인가, 쇼(show)인가! (아모스 4장)

기사승인 2020.03.08  22:5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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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sacrifice)인가, 쇼(show)인가! (아모스 4장)

 

 

0. 코로나19가 던지는 세 가지 질문

 

① ‘재난이 닥치면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흔들린다. 돌연한 발병이나 죽음, 국가적 재앙, 사회적 대혼란, 개인적 상실, 전염병, 홍수나 가뭄에 의한 참사를 만나면, 평소 하나님에 대해 아무 생각 없이 살던 사람도 단번에 신학자가 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풍문이 떠돈다. “하나님은 없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셨다”, “하나님께서 나를 미워하신다”, “하나님은 무능하시다”, “그동안 많이 참으신 하나님께서 이제 폭발하셨다.” 예언자의 직무는 바로 이런 재앙의 순간에 일어나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어떤 일을 하시는지 사람들에게 명확하게 밝히는 것이다. 좋은 예언자, 다시 말해 진정한 예언자는 그 재난을, 사람들을 죄에서 해방시키고 하나님 앞에서 자유롭게 살 수 있게 하는 성찰의 기회로 삼는다. (중략) 요엘의 예언자적 설교는, 우리의 일상을 흔드는 크고 작은 모든 일들이 궁극적으로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음을 밝힌다.’ (유진 피터슨, 메시지성경 요엘 머리말 중에서)

 

②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와 한국기독교언론포럼은 ‘코로나19 관련 개신교인 대상 여론조사’ 결과를 지난 2월27일 발표했다. 현재 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개신교인의 71%가 코로나19 확산으로 ‘주일 예배를 중단해야 한다는 견해’를 나타냈다. 주일예배 중단에 반대하는 ‘예배강행’에 대한 의견은 24%에 그쳤다.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한국교회는 확산방지라는 공공선을 위해서 ‘예배중단(온라인예배대체)’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일성수(예배강행)’이라는 해답을 내놓고 무엇이 옳은 선택인지에 대해 논란을 벌이고 있다.

 

③ <선지자 아모스라면 어떻게 했을까?>, 이 질문을 아모스에게 묻는 이유는, 아모스가 ‘북이스라엘에 내린 재난’이라는 상황에서 ‘재난 속에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예언’을 수행했기 때문이다. 아모스는 우리의 생각과 사뭇 다른 관점으로 재난을 해석한다. 우리는 재난으로 인한 ‘예배중단’이냐, ‘예배강행’이냐의 예배의 형식을 고민하지만, 이와 달리 아모스는 모든 재난의 원인을 타락한 예배(우상숭배)에서 찾는다. 잘못된 예배 때문에 재난이 찾아왔다는 해석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친히 재난을 보내서 북이스라엘이 행하던 잘못된 예배(우상숭배)를 중지시킨 것이라고 해석한다. 한걸음 더 나가서 정통을 자처하던 남 유다도 ‘타락한 예배’를 회개치 않으면 북이스라엘과 같은 운명을 맞이할 것을 경고한다. 예배의 형식이 아니라 예배의 본질에 대한 성찰을 요구하고 있다. ‘예배가 무엇인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는 무엇인지, 잘못된 예배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자세히 증거 한다. 토저는 <예배인가, 쇼인가!>에서 ‘하나님이 받으시지 않는 예배’가 있다고 역설한다. 하나님이 받지 않으시는 예배행위는 도리어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는 일이라고 경고한다.

 

 

1. 예배인가, 쇼인가! (A.W 토저)

 

① (4절~5절) “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며 아침마다 너희 희생을, 삼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며 누룩 넣은 것을 불살라 수은제로 드리며 낙헌제를 소리 내어 광포 하려무나 이스라엘 자손들아 이것이 너희의 기뻐하는 바니라 이는 주 여호와의 말씀이라”

▶ ‘벧엘’(야곱이 돌단을 쌓고 예배했던 하나님의 집)과 ‘길갈’(여호수아가 요단강을 건넌 믿음의 기념비)은 과거에는 위대한 신앙의 역사적인 명소였지만 지금은 우상숭배의 소굴로 변질되고 타락했다. ‘아침마다 희생을’, ‘삼일마다 십일조’를 드렸다. 요즘으로 바꿔 말하면 매일새벽제단을 쌓고 온전한 십일조를 철저하게 지켰다. 북이스라엘의 죄는 예배를 ‘안 드린 게’ 아니라 예배를 ‘잘못 드린 것’이다. 헛된 제사, 형식적인 예배를 드린 것이다. ‘누룩 넣은 수은제’는 외식으로 드리는 예배다. 바리새인의 누룩은 외식 곧 사람에게 보이기는 위한 위선이다. 예수께 바리새인의 누룩을 경계하신 이유는 그들의 철저함이 아니다. 나는 옳고 자신과 다른 타인을 틀렸다고 여기는 정죄였다.

▶ ‘소리 내어 광포하는 낙헌제’는 하나님께 받은 은혜와 감사가 아닌 자신의 공로와 공덕을 내세우는 수단으로 삼는 행위를 가리킨다. 예배의 본질은 자기부인, 곧 희생(sacrifice)인데 도리어 자기과시와 자기자랑을 드러내는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쇼(show)로 전락했다. ‘이것이 너희의 기뻐하는 바니라’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가 아니라 자신의 기쁨을 위한 예배를 드렸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께 자기부인으로 드리는 희생의 예배인지, 아니면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자기과시를 위한 쇼인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예배인지, 사람들의 기쁨을 주는 수단인지에 대한 깊은 반성과 성찰을 요구한다. ‘예배인지, 쇼인지’는 재난의 순간 그 정체가 드러낸다.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자기과시를 위한 쇼(show)는 그칠 것이고, 하나님께 드려지는 자기부인의 예배(sacrifice)는 계속될 것이다.

 

 

2. 삶의 주관자 되신 주님

 

① (6절~8절) “또 내가 너희 모든 성읍에서 너희 이를 한가하게 하며 너희 각처에서 양식이 떨어지게 하였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또 추수하기 석 달 전에 내가 너희에게 비를 멈추어 어떤 성읍에는 내리고 어떤 성읍에는 내리지 않게 하였더니...너희가 내게 돌아오지 아니하였으니라”

▶ ‘왜 이런 재난이 벌어졌는가, 재앙의 원인은 무엇인가’ 앞서 소개했던 코로나19 관련 개신교인 대상 여론조사’에서 전체 응답자의 65%가 ‘단순한 전염병일 뿐이다’고 답했으며, ‘기독교를 박해하는 중국 정부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란 답은 7%에 그쳤다. ‘인간의 탐욕을 반성하고 나의 죄,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성찰할 기회’라는 답은 28%였다. 재난이 찾아온 원인에 대한 선지자 아모스는

▶ ‘내가’라는 단어가 11절까지 7번 반복된다. ‘모든 문장의 주어’다. ‘내가’는 하나님 자신을 가리킨다. ‘주님(LORD, 아도나이)’은 주인이라는 의미를 넘어 하나님이 삶의 주관자이심을 선포한다. 비를 내리게도 멈추게도 하시고 양식이 떨어지는 기근을 내리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고 생명, 건강, 물질, 전염병을 주관하시는 삶의 주관자라는 의미다. 주일예배 중단은 의미심장한 이유는 주일예배는 주님의 날, 주님께서 삶의 주관자 되신다는 믿음을 고백하는 것이 예배이기 때문이다.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나는, 지키고 보호하심을 믿지만 혹 전염병에 걸려도, 그리 아니하실 것을 믿지만 혹 전염병 확산의 주범이 되더라도 ‘거기에도’ 삶의 주관자 되신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여전히 믿는다. 재난 중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고 재난 중에도 여전히 함께 하심을 믿는다. 두려움과 불안의 진짜 원인은 입술로만 주님, 주님 부르면서 정작 ‘삶의 주관자’되신 주님을 온전히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② (9절~10절) “내가 풍재와 깜부기 재앙으로 너희를 쳤으며 팟종이로 너희 많은 동산과 포도원과 무화과 나무와 감람나무를 다 먹게 하였으나 너희가 내게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너희 중에 염병이 임하게 하기를 애굽에서 한 것처럼 하였으며 ”

▶ (메시지성경) ‘나는 농작물을 쳐서 병들게 하고 너희 과수원과 농장들을 말라 죽게 했다. 메뚜기들이 너희 올리브나무와 무화과나무를 다 먹어치웠지만 그래도 너희는 나를 무시했다. 하나님의 포고다. 나는 전에 이집트에서 일어난 전염병이 너희를 찾아오게 했고 너희 뛰어난 젊은이들과 최상급 말들을 죽였다. 진영 안에서 어찌나 썩는 냄새가 진동하는지, 너희는 코를 막고 다녔을 정도다. 그런데도 너희는 여전히 내게 주목하지 않았다. 계속 나를 무시할 뿐이었다. 하나님의 포고다’ 또 하나의 중요한 문장이 반복된다.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 였느니라’ 재난에도 불구하고 경외해야 될 하나님을 무시하고 돌이켜 회개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이런 재앙을 내리신 분명한 목적이 있다. 주의 지팡이로만 보호하시지 않고 주의 막대기로 바른 길로 인도하시기 위함이다. (히12: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③ (11절) “내가 너희 중에 성읍 무너뜨리기를 하나님 내가 소돔과 고모라를 무너뜨림 같이 하였으므로 너희가 불붙는 가운데서 빼낸 나무 조각 같이 되었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 ‘불붙은 가운데서 빼낸 나무 조각’은 감리교운동의 창시자 존 웨슬리의 어린 시절 별명이다. 큰 화재에서 살아난 체험을 통한 고백이었다. 누구나 삶에서 만나는 위기와 재난을 피하고 싶지만, 재난을 통과하면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성숙해진다. 눈앞에 재난이 원망스럽지만 뒤집어 생각해보면, ‘오늘의’ 재난을 보내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면 ‘지난 날’ 풍년과 건강을 누린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였다. 일상을 잃어버리면 비로소 일상의 소중함을 깨닫듯이 삶에서 만난 재난은 까맣게 잊고 살던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금 기억하는 소중한 기회라는 사실이다.

 

 

3. 재난에 대처하는 믿음의 자세

 

① (12절) “그러므로 이스라엘아 내가 이와 같이 네게 행하리라 내가 이것을 네게 행하리니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라”

▶ <삶에서 만나는 위기와 재난에 어떻게 이 재난에 대처할 것인가?> 재난에 대하는 세 가지 태도가 있다. 첫째, 타인에 대한 정죄와 비난이다. 재난이 오면 탓할 대상을 먼저 찾는 부류가 있다. 요란스레 호들갑 떨며 적당한 타겟을 삼아 자신의 두려움과 불안의 책임을 전가시킨다. 중국의 기독교박해 탓, 우한과 중국정부 탓, 우리 정부의 잘못된 대응 탓, 이단 신천지 탓, 이제는 예배중단하지 않은 교회들 탓인가, 타인에게 책임을 전가시키는 태도는 손쉽지만 가장 비겁한 선택이다. 둘째, 재난을 단순히 우연하게 벌어진 사건이라고 여기는 태도다. 얼핏보면 의연한 듯 보이지만 속내는 삶의 주관자 되신 하나님을 철저하게 무시하시는 오만이다. 해결할 수 없는 삶의 재난을 통해 인간이 얼마나 무기력하고 연약한 존재임을 자각하게 된다. 세 번째, 하나님 앞에서 나 자신을 성찰하는 기회로 삼는 것이다. 아모스가 이 모든 재앙을 하나님이 내리신 것이라고 분명히 밝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네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라’ 재앙의 목적은 하나님 앞에서 회개와 성찰이다. 삶의 주관자 되신 하나님 앞에 바로서길 힘써야 할 때다.

 

② (13절) “대저 산들을 지으며 바람을 창조하며 자기 뜻을 사람에게 보이며, 아침을 어둡게 하며 땅의 높은 데를 밟는 자는 그 이름이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니라”

▶ 하나님께서 재난을 내리시는 목적을 세 가지로 분명하게 증거 한다. 첫째, ‘자기 뜻을 사람에게 보이며’ 고난에는 뜻이 있고 재앙에는 메시지가 있다. 빨리 지나가고 회복되기만을 바랄 게 아니라 그 속에 담긴 뜻과 메시지를 깨달아 변화와 성숙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둘째, ‘땅의 높은 데를 밟는 도다’ 인간의 오만을 꺾으신다. 재난은 오만불손한 이들을 겸손하게 만든다. 인생은 풀과 같고 그 영광은 들의 꽃과 같다. 한줌의 재로 돌아갈 존재다. 재난을 통해 일상의 소중함을 깊이 자각한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신다. 셋째, ‘그 이름이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니라’ 왕 노릇하던 헛된 우상들을 무너뜨리신다. 우상숭배는 하나님이 아닌 것들을 하나님처럼 섬기는 것이다. 우상은 이단 신천지의 교주만이 아니다. 물질과 건강, 명예와 권세가 얼마나 부질없는가를 철저하게 깨닫게 하신다. 오직 하나님만 하나님 되심을 나타내신다. 코로나19의 재난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르지만 부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성찰하고, 오만을 버리고, 헛된 우상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삶의 주관자로 인정하는 기회가 되길 바랄 뿐이다.

김명섭 kimsubwa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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