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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인내의 시간

기사승인 2020.05.25  17:0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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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주시는 고마운 선물과 부르심은 철회되지 않았습니다.”(롬11:29)

주님의 평화가 우리 모두를 포근하게 감싸주시기를 청합니다. 
한 주간 동안도 잘 지내셨는지요? 입하立夏에서 소만小滿을 향해 가는 절기입니다. 온화하고 따뜻하여 지내기 참 좋습니다. 검은등뻐꾸기 울음소리가 자꾸만 떠오릅니다. 5월의 숲을 걷다 보면 이따금 들려오는 그 새소리가 제게는 보리타작할 때 사람들이 불렀던 ‘옹헤야’ 타령 중에 나오는 후렴구 ‘어절씨구’처럼 들렸습니다. 가끔은 검은등뻐꾸기가 ‘어절씨구’하고 선소리를 매기면 ‘옹헤야’하고 받아주곤 했습니다. 그 타이밍이 절묘해서 마치 자연과 내통하는 것 같은 흥겨움을 느낄 때도 있었습니다. 장미꽃도 도처에 흐드러지게 피었습니다. 비 온 후, 말갛게 씻긴 얼굴로 우리를 대하는 꽃들을 보면 저절로 벙싯 미소가 떠오릅니다. 자연 세계는 이렇게 청량한데 사람들이 사는 땅은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고 하지만, 공평함이 없는 세상은 차이를 만들어냅니다. 사람들은 그 차이를 얼른 차별과 혐오의 근거로 삼습니다. 억울한 죽음이 끊이질 않고, 모멸감에 치를 떠는 이들이 도처에 있습니다. ‘갑질‘이라는 부끄러운 말이 일상다반사가 되고만 이 사회를 생각하면 암담할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투덜거리거나 절망할 수 없습니다.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은 척박한 역사의 대지를 갈아엎고 정의를 뿌리고 평화를 거두라고 명하십니다. 이 명령을 엄중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왜 사는지 아는 사람은 어떻게든 살 수 있다지요? 가야 할 곳을 분명히 알고 가는 사람은 지는 해를 원망하지 않는 법입니다. 제가 이렇게라도 흰소리를 치는 까닭은 ‘코로나 블루’라는 우울감에 지고 싶지 않아서입니다.

사실 지난주 11주 만에 열린 대면 예배를 앞두고 많이 설렜습니다. 두 달여 못 만났던 교우들과 얼굴을 마주할 생각에 살짝 들뜨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마스크가 우리 사이의 소통을 차단했습니다. 피차 눈께 어린 미소로 반가움을 표현하기는 했지만 왠지 서글펐습니다. 행여 공동체에 누가 될까 서둘러 교회마당을 벗어나는 교우들의 모습을 보니 가슴 한편이 휑해졌습니다. 이런 일에도 익숙해져야 하는 것일까요? 저도 모르게 입에서 탄식시편 시인들의 탄식이 흘러나왔습니다. “주님, 언제까지입니까?”

대면 예배를 딱 한 번 재개했는데 또다시 우리는 영상예배로 전환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이태원 클럽을 진원지로 하여 바이러스가 지역사회로 빠르게 번져가는 이 상황에서, 대면 예배를 고집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우려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영상예배에 익숙해지다 보면 교회 공동체로 모이는 일이 오히려 번거롭게 여겨질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교회됨은 ‘서로 지체’가 되는 데 있습니다. 서로 다른 이들이 모여 각자에게 분유된 은사들을 나눔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교부들은 “교회는 인류가 그 일치와 구원을 되찾는 곳”, “화해를 이룬 세상”, “주님의 십자가의 돛을 활짝 펴고 성령의 바람을 받아 이 세상을 잘 항해하는 배”라고 말합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 선 단독자이지만 홀로는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모습이 그리스도의 현존의 징표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만나야 하고, 함께 걸어야 하고, 함께 울고 웃어야 하고, 말씀을 듣고 성례전에 참여하고, 봉사의 일을 해야 합니다. 당장은 아니지만 그 때는 반드시 올 것입니다. 도약을 위해 잠시 몸을 도사리는 개구리처럼 지금 우리는 도약을 위해 움츠린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조바심이 나기도 하지만 지금은 인내가 필요한 시간입니다. 제라드 맨리 홉킨스(Gerard Manley Hopkins, 1844-1889)는 ‘인내’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인내, 어려운 것! 기도하고 청해서 얻기도
어려운 것이 인내로구나! 인내는 그것을 구하는 이에게
전쟁을 원하고, 부상을 원한다. 그의 시간, 그의 임무에 지치게 하며
없이 살아가고, 숱한 낙마를 감수하고, 복종할 것을 원한다.”

구하는 이에게 ‘전쟁‘과 ‘부상’을 원하는 인내, 우리가 감당해야 할 임무에 지치게 하는 인내이지만, 인내의 목적이 우리의 파괴에 있지는 않습니다. 인내의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우리 삶의 토대는 작은 타격에도 허물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홉킨스는 그래서 그런 인내를 ‘귀한 인내’ 혹은 ‘자연스런 마음의 담쟁이’라 부릅니다. 그 담쟁이는 “우리의 좌초된 옛 목적의 폐허를 가려 준다”는 것입니다. 시어이기에 다소 어렵게 느껴질 수 있지만 인내가 주는 선물이 적지 않다는 말일 겁니다. 때로는 절망의 어둠이 우리 옷자락을 잡아당기기도 하지만 그때마다 ‘반항적인 의지’를 가다듬어 하나님을 향하여 우뚝 서야 합니다.

여러 해 전, 우리 교회 옆에 이주노동자들의 쉼터가 있었습니다. 주로 아프리카계 노동자들이었는데 그들과 몇 해 지내는 동안 참 많은 일을 겪었습니다. 어느 해 성탄절 무렵 교육관에서 그들과 예배를 드리는 데 그들의 예배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예스, 지저스”, “아멘”, “할렐루야” 소리로 예배는 시종 활력이 넘쳤습니다. 삶이 곤고했기에 그들은 더욱 절망 속에 표류하지 않으려고 자기 속의 활기를 이끌어냈던 것입니다. 그 자리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어떤 에너지가 느껴졌습니다.

어려운 시절일수록 보다 긴밀하게 소통해야 합니다. 허튼소리라도 나누면서 ‘저만치에 나의 사랑하는 벗이 있구나’ 느끼게 해 줄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어려운 시절을 보내고 있는 교우들에게 사랑의 인사를 전해주십시오. 목회실 식구들은 모두 잘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떠신지요? 교회 마당에 흐드러지게 핀 장미꽃들이 여러분께 인사 올립니다. 군산에서 옮겨온 첫해 풍성하진 않아도 소박한 꽃을 피운 찔레꽃도 여러분께 인사를 올립니다. 한 주 동안도 최선을 다해 행복을 누리십시오. 주위 사람들에게 지옥을 맛보게 하지 말고, 천국의 맛을 전해주며 사십시오. 작고 사소한 행복을 귀히 여기십시오. 바야흐로 소만 절기가 다가옵니다. 여러분 모두를 주님의 은혜 안에 맡깁니다. 주님, 우리를 지키소서.

김기석 vorblick@dreamw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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