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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테스탄트 공동체

기사승인 2020.06.25  23:4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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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원(修道院)을 직역하면 ‘도를 닦는 거처’다. 한국 가톨릭에서는 수도원이라는 낱말을 주로 사용하지만, 개신교에서는 공동체라는 낱말을 더 많이 사용하는 것 같다. 수도원에 가장 가까운 영어는 ‘애비’(abbey)이고, 공동체에 가장 가까운 영어는 ‘홀로 삶’(monasterion)이라는 어원을 가진 ‘모나스테리’(monastery)이다. 모나스테리는 카리스마를 가진 지도자가 은둔하며 수행하는 곳에, 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지금은 뜻이 와전되어, 교파나 교단에 속한 수도원을 가리키는 낱말이 됐다.

교파나 교단에 속한 수도원은 ‘애비’(abbey)이다. 본래 교회 건물에 달려있는 건물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원장(abbot)이 지도하고 분원을 거느린다. 분원은 ‘프라이어리’(priory)라고 부른다. 애비는 모나스테리보다 작은 수도원이었지만, 지금은 큰 수도원을 가리킨다. 애비와 같은 여자 수도원은 콘벤트(convent)로 불린다. 클로이스터(cloister)는 교회 건물 안에 있는, 4면 벽에 붙은 회랑을 가리키는 낱말이었는데, ‘닫혔다’는 뜻 때문에 수도원과 같은 뜻으로 쓰인다.

종교개혁자들에게 수도원은 대단히 부정적이었다. 수도원을 가톨릭의 부패와 죄악이 들끓는 곳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동으로 사는 삶은 인류가 늘 추구했던 이상이었다. 서로 신앙을 고백하고 사는 신앙인들에게 공동체는 삶의 희망이었고 신앙의 귀결이었다. 인쇄된 성경을 누구나 가질 수 있게 되자, 프로테스탄트들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공동생활에 주목했다.

종교개혁 후 독일 땅에서는 가톨릭 영주와 프로테스탄트 영주가 벌이는 영토 전쟁이 그칠 날 없었다. 가톨릭 영주는 모든 신생아들에게 가톨릭으로 세례를 주게 했고, 프로테스탄트 영주는 그 반대였다. 유아세례는 신앙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영주의 통치 수단이었다.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틈바구니에, 유아세례를 거부하는 프로테스탄트들이 있었다. 그들은 성경에 없는 유아세례를 거부하거나 무효로 돌리고, 세례를 다시 베풀었다. 그것도 성직자 없이 베풀었다. 성경에 쓰인 대로다. 그들에게 세례는,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용서받았다는 믿음이 있어야 베푸는 의식이었다. 아울러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는 첫 의식이었다. 그러나 영주의 지시에 따라 가톨릭 신부나 프로테스탄트 목사가 이미 베푼 세례를 무시하고 다시 베풀었다는 것은, 사형에 해당하는 행위였다. 사람들은 그들을 재세례파(Ana-Baptist)로 불렀다. ‘아나’(ana)는 그리스어로 ‘다시’라는 뜻이다.

재세례파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스 양쪽으로부터 박해를 받았기 때문에, 자신들의 공동체와 국가를 철저하게 분리했다. 국가가 요구하는 전쟁을 거부했고,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어떤 강제도 거부했다. 현재도 그렇다. 그들은 평화주의자이지만, 신앙과 신념 때문에 국가와 교회로부터 박해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프로테스탄트들은 가톨릭의 박해에 맞서 싸우며 신앙을 지켰다. 토마스 뮌쩌(Thomas Müntzer, 1489–1525)같은 재세례파는 봉기하여 투쟁했으나, 재세례파 대부분은 박해를 감내했다. 이들은 초대교회 공동체로 돌아가려 했으므로 박해를 당연하게 여겼다. 그리고 초대교회 순교자처럼, 임박한 그리스도의 재림을 고대하며 박해를 이겨냈다.

공동체를 유지했던 독일계 재세례파는 세 그룹이다. 지금 체코와 슬로바키아 접경에서 시작한 ‘후터형제단’(Huterische Brüder, Hutterites), 독일 슈투트가르트 남쪽 흑림(Schwarzwald)에서 살던 ‘아미쉬공동체’(Amische Gemeinde, Amish), 그리고 네덜란드 북부 프리슬란트(Frisland)에서 시작해 동쪽으로 뻗어나갔던 ‘메노나이트’(Menonites)이다. 현재 이들은 대부분 미국과 캐나다에서 공동체를 이루며 살고 있다. 셋 중에서 가장 급진적인 공동체는 후터형제단이다. 이들의 공동체 이름인 ‘브루더호프’(Bruderhof)는 ‘형제들의 처소’(place of brothers)라는 뜻이다.

25년 전 독일에 있을 때 이야기다. 책을 보다가 개신교 공동체에 관심이 갔다. 방학 때 직접 찾아가 살아보기로 하고 재세례파 공동체를 찾았다. 영국에 있는 브루더호프로 서신을 보냈더니 답장이 왔다. 나치 때 독일을 떠난 후터형제들 중 100명이 미국에서 돌아와 공동체를 시작했으니, 영국까지 안 와도 된다고 했다. 미하일스호프(Michaelshof) 공동체는 쾰른과 프랑크푸르트 사이 국도에 있었다. 편지를 하니 환영한다는 연락이 왔다. 방학이 되자 가족과 함께 한 달 살기 여행을 떠났다.

구성원들은 신발만 빼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했다. 속옷도 공동소유다. 아침과 저녁에 예배를 드리고, 오전과 오후에는 흩어져 공동작업을 했다. 나는 지체부자유 아동을 위한 기구를 만들었다. 기구 판매는 공동체의 유일한 수입원이었다. 다른 브루더호프도 비슷하다.

입회한 지 얼마 안 된 중년부부와 대화를 나누었는데, 행복이 넘치는 것 같았다. 공동체에 입회하려는 사람은 구성원 모두의 동의를 얻고, 자신의 재산을 모두 팔아 처분한다. 그리고 성인 세례를 받는다. 세례는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정식으로 입회하는 의식을 겸한다.

전화수화기에서 나오는 음성을 증폭해서, 미국 공동체와 함께 드리는 예배는 늘 엄숙했다. 모두 무릎을 꿇은 채 기도를 하고, 장시간 부스럭거림 없이 지도자의 음성을 경청했다. 그런 엄숙한 시간을 제외하고, 구성원들은 친절하고 얌전하고 수줍음을 잘 타는 것 같았다. 오후 일이 끝나고 식사를 마치면 대개 숲으로 산보를 가거나, 아이들과 놀거나 독서를 한다. 가족끼리 초대하고 방문하기도 한다. 조용하고 평화롭다.

묵었던 건물에 20대와 30대 두 명이 더 있었다. 산보는 이들과 했다. 30대는 산보하면서도 한껏 심각한 표정이었고, 20대 토마스는 나와 얘기하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둘 다 세례를 앞둔 예비신자였다.

시간이 흘러 서로 익숙해지자 산보를 하던 토마스가 물었다. “함께 공동생활을 해 보니 어떠냐?” 괜찮다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꿈꾸는 공동생활을, 이상으로만 여기지 않고 실천하는 사람들이 있다니, 의미 있는 것 같다.” 그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어느 날 일하고 있는데 총무 격인 지도자가 찾아왔다. 일을 마친 후 제일 높은 지도자가 따로 만나기 원한다고 했다. 일을 마치고 큰 나무 아래 약속 장소로 가서 지도자 다섯 명과 둘러앉았다. 제일 높은 지도자가 말했다. “당신은 얼마 전에 이런저런 얘기를 했는데 사실이냐?” 나는 당황했다. 그것은 함께 일하는 사람과 나눈 사적인 이야기였다. 내용은 내가 한 이야기가 자신들의 공동체 정신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지적을 받고서 변명할 이유는 없었다. “내일 떠나겠다.”

공동체 구성원은 사소한 것이라도 지도자에게 보고하는 것 같았다. 공동체의 정신을 조금이라도 흔드는 말이나 수상한 행동은, 지도자가 보고를 받고 조처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것은 조직에 해가 될 싹을 자르고 조직을 지키려는 방어기재였을 것이다.

숙소로 돌아온 그날 밤 토마스가 조용히 나를 찾아왔다. “내일 떠난다고 들었다. 당신의 자동차에 나를 태워달라. 나는 세례를 받지 않겠다.” 그는 재산을 다 처분해서 가진 것이 없었다. 난처했지만 태워주겠다고 했다. 내일 아침 식사 전 작별인사를 하고 출발할 테니, 고샅에서 보이지 않게 기다리라고 했다.

다음 날 아침 차를 몰고 약속 장소로 가서 토마스를 태웠다. 멀리 자동차 거울에 지도자와 몇 사람이 손을 크게 흔들며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토마스의 탈출 계획은 이미 새어나간 것이 분명했다. 나는 못 본 척 자동차 속도를 높였다.

공동체에 입회하는 마지막 마당에 무슨 갈등이 그리 컸던 것일까? 이미 자기 소유를 팔아 처분했고 남은 것은 ‘세례’뿐인데, 그것이 그렇게 심각했던 것인가? 토마스는 말이 없었다. 쾰른 역에 도착해서 집까지 가는 기차표를 끊어주고 토마스와 작별했다.

1988년에 시작한 미하일스호프 사람들의 조상은 독일인이다. 이들의 처음 조상은 이탈리아에서 체코 모라비아로 온 야콥 후터(Jakob Hutter, 1500-1536)였다. 그를 따르는 자들이 1533-1535년에 모라비아에서 브루더호프 공동체를 세웠으니, 역사는 종교개혁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후터는 성인 세례를 역설하고 직접 세례를 베풀다가 잡혀서 가족과 함께 화형 당했다.

재세례파들은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고 공동체를 이루며 살았지만, 나치 게슈타포의 박해는 결정적이었다. 1937년 그들은 고국을 떠나 미국으로 이주했다. 50년 후 미국에서 돌아와 조상의 땅에 정착하려 했지만, 고향 사람들은 그들을 반가워하지 않았다. 재세례파였기 때문이다. 미하일스호프 공동체는 알텐키르헨(Altenkirchen) 지역 주민의 은근한 반대로 공동체에 필요한 건물을 지을 수 없었다. 내가 그곳을 방문했을 때가 1994년 여름이었고, 그들이 모든 것을 처분하고 영국으로 떠났을 때가 1996년이었다.

박효원 hyo1956@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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