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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동 은천교회

기사승인 2020.07.12  02:3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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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부산의 명물이 된 감천동은 대표적인 달동네이다. 70여 년 전, 피난민들이 정착한 언덕배기는 오래도록 가난을 대표하는 도시의 불편한 상징이었다. 메트로폴리탄 부산의 활기찬 이면에 감추어 두고 싶은 도회 속 그림자이지만, 지금은 놀랍게도 ‘문화마을’로 불리게 되었다. 동네와 골목은 알록달록한 색깔로 상처를 감춘 채 부산을 찾아온 관광객들의 시선을 한 몸에 모으고 있다.

  전쟁에 참전하러 온 미군들은 처음 부산항에 도착했을 때 멀리 캄캄한 어둠 속에서 층층이 빛나던 감천동 일대의 불빛을 보면서 거대한 빌딩 숲을 연상했다고 한다. 이국만리 전쟁터로 끌려온 서양 젊은이들이 본 터무니없는 환상은 어쩌면 그들이 기대하던 전쟁 속 안녕이었을 것이다. 몇 시간이 지난 후 확인한 대낮의 판자촌 풍광은 그들을 얼마나 낙심시켰을까?
 
  김성칠 교수는 <역사 앞에서>를 통해 피난민으로 부산에 도착한 첫날밤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부산에 닿았다. 바다가 바라보이는 조선의 남쪽 끝이다. 손발은 꽁꽁 얼고 얼굴은 때투성이가 되어 피란 보퉁이를 안고 부산바닥에 내렸으나 당장 오늘 하룻밤을 드샐 곳이 없다”(1950.12.23.). 이 책은 ‘한 사학자의 6.25 일기’라는 부제를 붙여 전쟁 40년 후에 발간되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기억의 시렁에 올려 둔 옛 이야기를 재구성하게 마련이다. 70년 전 부산을 거슬러 고단한 역사를 회고 할 때 지독한 가난과 불안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물론 그 역사는 ‘국제시장’이란 영화를 통해서나 현대인들에게 소비될 뿐, 그때와 오늘 70년이란 간격을 좁히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런 까닭에 3년 동안 피란임시수도로서 부산이 간직한 건축과 문화자산들을 모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려는 움직임은 환영할 일이다.

  이 즈음 적절한 대표적 유산으로 아미동 은천교회(서구 해돋이로 237-6)를 손꼽는 일은 참으로 가당한 일이다. 은천교회는 피난민으로 부산에 온 한명리, 송진천 장로부부가 세운 감리교회이다. 감리교 불모지인 부산에서 그들이 떠나온 모(母) 교회를 그리워하며 개척했을 것이다. 1952년 12월 20일에 창립했으니, 비록 비참한 전쟁 상황이라도 이젠 일상 속에 길들여진 그런 시절이었다.

  교회가 있는 아미동은 감천동에 이웃한 산비탈로 지금도 비석마을로 유명하다. 당시 은천교회 일대는 일본인 공동묘지가 있던 곳인데, 피난민들은 묘지의 봉분을 깎아내고 그 위에 집을 짓고 살았다. 놀라운 것은 그런 난감한 처지에서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공간을 마련해야겠다는 믿음과 신실함이었다. 사람들은 피란지 부산에 떠밀려 왔지만, 역시 피난처 되시는 하나님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아미동 은천교회는 그 산비탈 바위 아래 여전히 68년째 존재하고 있다. 전쟁 직후인 1955년에는 돌을 쌓아 견고하게 예배당을 지었다. 한 장로의 딸이 미국에서 보내준 100달러가 밑천이 되어 한 켜 한 켜 쌓아 올렸는데, 대도시의 빠른 변화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옛 상흔을 간직한 아미동의 현재와 함께 자리를 지키고 있다. 피난임시수도의 흔적을 증언할 건축물 중에 이만한 기념물을 찾을 수 있을까?

  최근 감천동의 변화와 함께 아미동도 개발이 진행 중이다. 부산도시공사가 교회 위쪽으로 행복주택 대단지를 조성하면서 도로를 확장할 계획을 세웠는데, 은천교회 대지 180평 중 절반이 수용되었고 돌로 지은 예배당은 잘려나갈 위기에 놓이고 말았다. 담임 목사는 근대문화유산으로서 예배당 건물의 가치를 동네방네 호소하고 있으나 아직은 달가운 소식을 듣지 못하고 있다. 물론 최후의 방법으로 남은 대지 위에 돌 예배당을 고스란히 이전시킬 의지를 품고 있지만 비용은 보상비를 훨씬 초과한다.

  어떤 눈 밝은 이들은 교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부산대학병원과 그 아래 자갈치 시장이란 입지 때문에 경제적 가치를 미리 셈하면서 더 나은 조건으로 이주를 권하지만, 박현규 목사는 현재의 자리를 고집하면서 예배당을 지키려고 한다. 그가 지키려는 것은 재산이 아닌 믿음의 유산이고, 고백의 자리이다. 전쟁의 와중에도 가난과 비참이란 삶의 자리 위에 고백한 “하나님은 나의 피난처”란 바로 그 믿음인 것이다.

송병구 sbkbochu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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