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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에 합당할 열매를 맺고” 요나3장 8절~10절

기사승인 2020.07.28  21:52:16

김명섭 kimsubwa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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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에 합당할 열매를 맺고” 요나3장 8절~10절

 

 

1. 회개는 자백이다

(8절 전반부)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를 입을 것이요”

▶ 구원(용서)의 조건은 ‘회개’다. 회개하는 깊이만큼 새롭게 하신다. 지난 시간, 요나의 전도를 들은 니느웨 백성들과 왕을 통해서 회개의 자세(태도)를 묵상했다. 분석해보면 세 가지다. 회개는 보좌에서 내려와 재에 앉는 것, 즉 주님을 그리스도(왕)로 모셔 들이는 것이다. 회개는 옷을 갈아입는 것, 즉 하나님 앞에서 인생이 풀과 같은 한 줌의 재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헛된 존재임을 자각하는 것이다. ‘먹지도 말 것이요 물도 마시지 말 것’ 금식기도의 정신은 ‘주여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데 있다. 니느웨의 회개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진다. 회개를 통한 구원의 길은 쉽고 단순하지 않다. 마치 오랜 습관으로 고착된 만성질환처럼 치유의 과정이 어렵고 길다.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참혹하게 고통당하시고 물과 피를 흘리신 까닭은 우리의 죄악이 그토록 무겁고 무섭기 때문이다. 더러워진 걸레를 세탁할 때도 많은 물과 세제, 수고와 햇살, 건조시간이 요구되는 것과 같다. 본문은 계속해서, 온전한 회개를 위한 필수 조건을 세 가지로 증거 한다.

▶ (8절 중반부) “힘써 여호와께 부르짖을 것이며” 회개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자백하는 것이다. (요일 1: 8~10) ‘만일 우리가 죄 없다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자백(고백, confession)은 죄를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다. 누구나 자신의 수치와 허물을 감추려고 하는 게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병들었음을 인정할 때 치유가 시작된다. 더러움을 인정할 때 깨끗함이 시작된다. 무지를 인정할 때 배움이 시작된다. 거짓을 인정해야 진실이 드러난다. 죄를 인정할 때 비로소 용서가 시작된다. 자백은 반드시 입으로 시인해야 한다. (롬8: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자백은 마음속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말과 글로 해야만 한다. 말과 글은 마음(중심)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로마가톨릭은 중보자인 신부를 통한 ‘고해성사’의 전통을 고수하지만 개신교는 다른 중보자의 도움 없이 하나님 앞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의 죄를 직접 고백한다. 이 둘의 공통점은 입으로 자신의 죄를 시인한다는 점이다. 진정한 회개는 속에서 그치지 않고 밖으로 꺼내서 공개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 입술과 글로 써서 죄가 드러날 때 죄의 참람한 실상을 정직하고 객관적으로 직시하게 된다. 마치 세균이 태양광선에 노출될 때 박멸되듯 죄의 특성은 그 정체가 드러날 때 소멸한다. 때문에 회개의 자백은 구체적으로 낱낱이 고해야 한다. 타인에게 저지른 과오를 사죄할 때도 이와 동일하다.

 

 

2. 회개의 합당한 열매

 

(8절 하반부)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

▶ 회개는 말을 넘어 구체적인 삶으로 열매 맺어야 한다. (눅3:7~9) ‘요한이 세례를 받으러 나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물세례(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받으면 저절로 새로워지는 게 아니다.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 회개의 조건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외적인 기준이 아니라 삶으로 열매 맺는 준행으로 판가름 난다. (눅3:10~14) ‘무리가 물어 가로되 그러하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대답하여 가로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라 하고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가로되 정한 세 외에는 늑징치 말라하고 군병들도 물어 가로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가로되 사람에게 강포하지 말며 무소하지 말고 받는 요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묻는 이들에게 세례요한의 응답은 여러 가지가 아니라 한 가지다.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 것이다. 회개의 합당한 열매는 저마다의 삶에서 구체적인 실천이다.

▶ (눅19:8~9)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세리 삭개오는 예수님을 집으로 영접한 데 그치지 않고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었다.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 갚는 것’은 말씀대로 준행하는 삶의 전환이다. 그의 구체적인 결단으로 그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 회개는 이렇게 하는 것이다. (요8:10~11)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현장에서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을 용서하신 예수님께서는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명하셨다. 주님께 회개하고 용서받으면 다 끝난 게 아니다. 그 은혜에 부끄럽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한다. 주님께 치유 받았으면 치유에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야 한다. 주님께 축복을 받았으면 축복에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야 한다. 뉘우치고도 또 다시 허물과 잘못을 반복하는 까닭은 진정으로 뉘우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3. 용서는 은혜다

 

(9절) “하나님 혹시 뜻을 돌이키시고 그 진노를 그치사 우리로 멸망치 않게 하시리라. 그렇지 않을 줄 누가 알겠느냐 한지라”

▶ ‘혹시...누가 알겠느냐’ 멸망치 않게 하실지 멸망 하실 지는 오직 하나님의 권한에 달려 있다. 회개한다고 무조건 용서가 보장되는 게 아니다. 용서는 회개에 따른 당연한 보상이 아니다. 용서는 나의 회개(공로)에 의해 부여되는 결과물이 아니다. 용서는 뉘우치는 가해자의 정당한 권리가 아니라 피해자의 눈물겨운 선처다. 영화 <밀양>(이청준의 소설 ’벌레 이야기‘)이 기독교의 용서에 대해서 던지는 의문이다. 자신의 회개를 전제로 타인에게 용서 베풀기를 강요하는 건 억지이고 폭력이다. 그런 용서는 없다. 기독교의 용서는 무조건적인 용서가 아니다. 마태복음18장이 전하는 용서의 원리는 ’죄를 뉘우치거든’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라도 받아주라는 데 있다. 기독교의 용서는 회개하면 지은 죄가 눈 녹듯이 사라져버리는 값싼 용서가 아니다. 죄를 지었으면 죄 값을 달게 받는 것이 마땅하다. 진정한 회개는 값싼 용서를 구하는데 있지 않고, 죄 값을 철저히 치르겠다는 자세에 있다. 우리도 죄를 뉘우치고 하나님의 선처를 구하며 기다릴 뿐이다. 타인에게 상처와 아픔을 주었으면 그에 따른 마땅한 죄 값을 치러야 한다. 피해자가 용서할 때까지 선처를 구할 뿐이다. 오늘날 나는 내 할 도리를 다했으니 너는 이제 용서를 내놓아야 한다고 강요하는 뻔뻔한 이들이 너무 많다.

▶ 탕자의 비유는 ‘회개’의 자세에 대해 반복하며 중요한 메시지를 강조한다. (눅15:18~22)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내가 이제 돌아왔으니 모든 것을 복권시켜달라고 뻔뻔하게 권리를 내세우는 적반하장의 태도가 아니다. 우리는 회개할 뿐 회개한 우리를 다시 복권시키시는 것은 아버지의 전적인 은혜다. (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깨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회개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고 회복시키시는 것은 아버지의 몫이다. 코로나 팬데믹은 온 인류를 향해 삶의 방식을 돌이킬 것을 강제하고 있다. 인류가 이제라도 돌이키면 전 지구적인 재난과 위기가 해결될지, 안 될지 누구도 단언할 수 없다. 과연 하나님께서 다시 기회를 주실지 의문이다. 오래 참으시지만 영원히 참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다만 아직 기회가 있을 때 너무 늦기 전에 돌이켜 회개하길 바랄뿐이다.

 

 

4. 물세례와 성령세례

 

(10절) “하나님이 그들의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감찰하시고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시리라 말씀하셨던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 이방 대제국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Nineveh)가 구원받았다. 반면에 아브라함의 자손 유다의 예루살렘(Jerusalem)은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 놀라운 역설이다. 회개할 때 용서하시고 구원을 베푸신다. ‘그들의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감찰하시고’ 회개는 중심을 돌이키는 ‘회심’, 입술로 시인하는 ‘자백’, 삶으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과정의 진정성을 정확하게 ‘감찰(in-spect)’하신다. 우리의 중심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 앞에 감추거나 속일 수 없다. ‘눈 가리고 아웅 하는 회개’가 통할 리 없다. 몇 해 전, 보수기독교단체인 한기총이 주관한 사학법 시위 때 출연했던 바퀴달린 십자가처럼 십자가를 지는 시늉, 죽는 시늉을 한다. 씨를 뿌리는 수고를 감당하지 않고 씨 뿌리는 시늉만 했는데 어찌 아름다운 열매가 맺히길 바랄까. 한 알의 밀알로 썩어지지 않고 죽는 시늉만 했는데 많은 열매를 무슨 수로 맺을 수 있으랴. 오늘날 이처럼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신앙’이 한국교회와 성도들을 병들게 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행하는 바리새인의 누룩, 외식이 판을 치고 있다.

▶ 회개할 때 성령이 임하신다. 진정한 회개의 여부는 성령의 임재로 드러난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 웨슬리회심, 평양대부흥운동 공히 회개에 의한 성령의 역사로 이어졌다. 지금 한국교회는 ‘회개’할 때다. 구원의 시작은 나의 회개에서 출발하지만 구원의 완성은 성령께서 친히 이루신다. 물세례는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다. 회개로 죄 사함으로 용서 받지만 구원의 출발일 뿐, 구원은 ‘불세례’로 완성된다. 불세례는 ‘성령세례’다. 나의 노력이나 공덕을 쌓아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부어주시는 능력’,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은혜다. ‘물세례’는 단 번에 순간적으로 이루어지지만, ‘성령세례’는 지속적이고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 회개한 이들에게 약속하신 성령을 부으셔서 날마다 새롭게 하시는 성화를 통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게 하신다.

김명섭 kimsubwa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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