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setNet1_2

모호한 삶 앞에서

기사승인 2020.08.02  13:24:00

당당뉴스 webmaster@dangdangnews.com

공유
default_news_ad1

모호한 삶 앞에서
욥기 29:11-20
(2020/08/02, 성령강림후 제9주)
음성으로 듣기

   
 

 [내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내가 한 일을 칭찬하고, 나를 직접 본 사람들은 내가 한 일을 기꺼이 자랑하고 다녔다. 내게 도움을 청한 가난한 사람들을 내가 어떻게 구해 주었는지, 의지할 데가 없는 고아를 내가 어떻게 잘 보살펴 주었는지를 자랑하고 다녔다. 비참하게 죽어 가는 사람들도, 내가 베푼 자선을 기억하고 나를 축복해 주었다. 과부들의 마음도 즐겁게 해주었다. 나는 늘 정의를 실천하고, 매사를 공평하게 처리하였다. 나는 앞을 못 보는 이에게는 눈이 되어 주고, 발을 저는 이에게는 발이 되어 주었다. 궁핍한 사람들에게는 아버지가 되어 주고,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의 하소연도 살펴보고서 처리해 주었다. 악을 행하는 자들의 턱뼈를 으스러뜨리고, 그들에게 희생당하는 사람들을 빼내어 주었다. 그래서 나는 늘 '나는 죽을 때까지 이렇게 건장하게 살 것이다. 소털처럼 많은 나날 불사조처럼 오래 살 것이다. 나는, 뿌리가 물가로 뻗은 나무와 같고, 이슬을 머금은 나무와 같다. 사람마다 늘 나를 칭찬하고, 내 정력은 쇠하지 않을 것이다' 하고 생각하였건만.]

∙욥의 아리아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벌써 8월의 첫 주입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휴가 일정을 잡은 분들도 즐겁고 유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 복잡한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 마음에 켜켜이 쌓인 허섭스레기들을 말끔하게 씻어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세상이 너무 소란스러워 고요함이 그립습니다.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휴대 전화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뭔가를 하느라 배터리를 소모하듯이, 우리는 가만히 있어도 피곤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일이 많아서라기보다는 우리 마음을 쉬지 못하게 하는 일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고요함과 한가함을 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알베르 카뮈의 말이 떠오릅니다. “동양의 한 현자는 흥미로운 시대에 살지 않도록 자기를 구원해 달라고 늘 신께 기도했다. 우리는 현명하지 못하므로 신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주시지 않았고, 그래서 우리는 흥미로운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오늘 저는 욥기에 나오는 욥의 탄식을 길잡이 삼아 우리 삶의 방향을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욥기의 서막은 “우스라는 곳에 욥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는 흠이 없고 정직하였으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을 멀리하는 사람이었다”(욥1:1)라는 구절로 시작됩니다. 멋진 소개이긴 하지만 왠지 불안합니다. 옛말에 달도 차면 기운다(월영즉휴月盈則虧)는 말이 있습니다. 노자 도덕경 58장에도 비슷한 말이 나옵니다. 화에는 복이 기대고 있고(화혜복지소의禍兮福之所倚), 복에는 화가 엎드려 있다(복혜화지소복福兮禍之所伏). 누가 그 지극함을 알 수 있겠는가?(숙지기극孰知其極). 오랜 삶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지혜입니다.

아시다시피 그렇게도 완벽했던 욥은 큰 시련에 직면합니다. 불과 며칠 사이에 재산과 자식을 다 잃고, 성한 데가 한 군데도 없을 정도로 몸이 망가졌습니다. 가장 행복했던 사람의 가장 참담한 전락입니다. 너무 극적이어서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지만 사실 이런 일은 현실 속에서도 더러 일어납니다. 굳건하리라 믿었던 삶의 토대가 다 무너지고, 가까이 계신 것 같았던 하나님은 아니 계신 것 같다고 느끼는 것이 어디 욥뿐이겠습니까? 욥은 하나님의 계심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영문을 알 수 없는 현실에 대해 하나님의 설명을 듣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깊은 침묵 속에 계십니다. 모든 것을 상실했다는 고통도 견디기 어렵지만 더욱 견디기 어려운 것은, 친밀하게 지내던 사람들이 등을 돌리는 현실입니다. 인생무상입니다. 욥기29장에서 31장은 욥의 아리아입니다. 그는 자기 삶을 돌아보며 변해버린 세상인심을 탄식합니다. 절창입니다.

∙염량세태
그는 뼈를 깎는 아픔과 뼈가 쑤시는 아픔이 그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마치 하나님이 그의 옷자락을 세게 잡아당기셔서 진흙 속에 내던지신 것 같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불러보아도 하나님은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세상은 그를 조롱하고 잉여 인간 취급을 받던 이들조차 그를 노골적으로 비웃습니다. 염량세태炎涼世態입니다. 상황이 바뀌니 인심도 변합니다. 자기가 돌보아 주었던 이들조차 그를 외면합니다. “고난받는 사람을 보면, 함께 울었다. 궁핍한 사람을 보면, 나도 함께 마음 아파하였다. 내가 바라던 행복은 오지 않고 화가 들이닥쳤구나. 빛을 바랐더니 어둠이 밀어닥쳤다”(욥30:25-26).

욥에게 닥쳐온 이런 불행은 그가 악인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는 자기 삶을 차분하게 돌아봅니다. 잘 살았습니다. 부유하다고 해서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지 않았습니다. 어려운 처지에 빠진 사람들을 보면서 게을러서 그렇다고 비난하지도 않았습니다. 자기 집 대문 앞에 누워 있던 거지 나사로를 모른 척 했던 누가복음 16장의 그 부자와도 달랐습니다. 그는 가난한 동족들을 인색한 마음으로 대하지 말라는 율법의 명령을 따라 살았습니다. 도움을 청하는 가난한 사람들을 외면하지도 않았고, 의지할 데 없는 고아들을 잘 보살펴 주었습니다. 과부들의 고통을 덜어주려고 노력했습니다. 비참하게 살다 죽는 사람도 욥을 축복했습니다. “나는 늘 정의를 실천하고, 매사를 공평하게 처리하였다”(욥29:14). 정의(쩨데크 tsedeq)와 미슈팟(mishpat)은 하나님이 세우신 세상의 기초입니다. 욥은 그 두 기둥을 꼭 붙들고 살았습니다. 악을 행하는 이들을 응징했고, 그들에게 희생당하는 사람들을 빼내 주었습니다. 그는 의를 이루는 자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를 칭송했습니다. 마치 농부가 단비를 기다리듯이 그의 말을 기다렸고, 농부가 봄비를 기뻐하듯이 그의 말을 받아들였습니다.

욥은 이만하면 내가 잘 산 것 아니냐는 뿌듯한 자부심을 품습니다. 죽을 때까지 그렇게 행복하고 당당하게 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기력이 쇠하지 않을 거라고 기대합니다. 20절에 나오는 ‘생각하였건만’이라는 구절은 그러한 기대가 파탄이 난 상황을 씁쓸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현실은 그러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현실은 이처럼 부조리합니다. 몸과 마음은 만신창이(滿身瘡痍)가 되었고, 삶의 의미는 희미해졌습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요? 선하게 산 결과가 이런 거라면 누가 굳이 선한 삶을 선택하겠습니까? 인과응보의 원리가 무너진 것 같습니다. 그에게 닥쳐온 불행은 영문을 알 수 없는 운명의 타격이었다 해도, 어찌하여 그렇게 욥을 따르고 존경하던 이들이 싸늘하게 등을 돌린 것일까요? 그게 죄 가운데 사는 인간의 모습이라고 말하면 간편한 것 같지만 그래도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습니다.

∙성육신의 신비
저는 여기서 입장의 동일함이야말로 관계의 최고 형태라는 말을 떠올립니다. 서 있는 자리가 같지 않으면 진정한 관계가 만들어지기 어렵다는 말입니다. 일방적으로 도와주는 사람과 도움을 받는 사람은 동등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도와주는 사람이 조금도 젠체하지 않는다 해도 상황이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은 동일한 지평에 서 있지 않습니다. 남에게 줄 수 있는 자격을 얻기까지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말 속에 진실이 있습니다. 욥은 스스로 ‘주는 자’, 어려운 처지에 빠진 이들을 ‘돕는 자’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하지만 도움을 받은 사람들은 한편으로는 고마워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뭔가 복잡 미묘한 감정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습니다. 인생이 참 어렵습니다. 남을 배려한다고 한 행동이 상대방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경우도 있으니 말입니다. 욥을 보고 조롱했던 사람들은 물론 좋은 사람 혹은 성숙한 사람들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게 현실임을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여기서 떠오르는 것이 성육신 사건입니다. 빌립보서 2장은 예수님의 성육신의 신비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빌2:6-7a). 은총의 신비는 하나님의 철저한 비움 속에서 드러납니다. 오래 전에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이 들려주신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어떤 사람이 재래식 화장실에 빠졌습니다. 어떤 사람은 더럽다고 그 자리를 얼른 떠납니다. 어떤 사람은 그의 상황을 지적하며 빨리 거기서 나오라고 권합니다. 그런데 장일순 선생님은 자기라면 그 속에 풍덩 뛰어들어 잠시 그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여기는 냄새가 좀 고약하니 함께 밖으로 나가서 이야기를 나누자”고 말하겠다고 했습니다. 그의 입장이 되어 보는 것입니다. 죄 없으신 주님이 죄인인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함께 하늘을 살자고 초대하셨습니다.

바울도 역시 같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는 율법 아래 있지 않았지만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을 얻으려고 율법 아래 있는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율법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마치 율법 없이 사는 사람같이 되었습니다. 약한 사람을 얻으려고 약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입장의 동일함을 추구한 것입니다. 그를 보고 줏대 없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는 변통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을 그리스도라는 중심에 연결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습니다. 서로 만날 수 없던 하나님과 사람들을 연결하여 만나게 하고, 서로 불신하고 미워하던 이들이 손을 맞잡게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확장입니다. 어떤 예배학자는 예전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예전은 ‘관련성’에 관한 것이다. 다시 말해 관계 맺기, 즉 연결되는 것, 그리고 연결을 만드는 것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예전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과 사람과 지구에 연결되고, 또한 공간과 시간, 문화와 역사에 연결되며, 나아가 다름과 타자성에, 그리고 기억과 기대에 연결되는 것을 말한다.”(네이선 D. 미첼, <예배, 신비를 만나다>, 안선희 옮김, 바이북스, 2014, 21쪽)

심오한 말이지만 조금 어렵게 느낄 수도 있습니다. 에베소서는 주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공동체의 신비를 좀 더 분명하게 요약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건물 전체가 서로 연결되어서, 주님 안에서 자라서 성전이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도 함께 세워져서 하나님이 성령으로 거하실 처소가 됩니다”(엡2:21-22). ‘연결되다’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이런 연결이 튼튼하면 우리는 어떤 어려움 속에서라도 일어설 수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교회로 불러주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성령이 거하실 처소가 되라는 것입니다. 연결되는 것을 가리켜 요한1서는 코이노니아 곧 ‘사귐’이라 말합니다(요일1:3).

∙연결을 만든다는 것
코로나19 시대에 가장 절실한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입니다. 며칠 전 신문에서 읽은 지휘자 구자범의 선생 컬럼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독일에서 지휘 공부를 할 때 스승인 아르프는 지휘자가 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감각에 충실해야 한다면서 그림, 시, 요리, 와인, 향수 등 온갖 것들을 가르쳤습니다. 급기야는 에스프레소를 내려 카푸치노를 타주기까지 했습니다. 그 덕분에 구자범은 카푸치노를 꽤 잘 탈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좋은 선생님이 몇 년 전 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워도 만날 수 없게 된 것이지요. 이듬해 자기 생일 날 0시 정각에, 근 20년간 연락 없이 지내던 옛 하겐극장의 동료 지휘자 프리치로부터 생일 축하 겸 안부를 묻는 긴 문자가 왔습니다. 놀란 구자범은 ‘어떻게 내 전화번호와 생일을 알았냐‘고, ‘웬일로 독일에서 한국으로 0시에 맞추어 문자를 했냐‘고 묻자 놀라운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아르프 선생님과는 음악콩쿠르 심사위원으로 만났다는 것이었다. 우연히 구자범 이야기가 나왔는데, 곧 세상을 떠날 것을 예감한 아르프가 ‘수십년간 빠짐없이 자범 생일마다 문자를 보냈었는데, 내가 세상을 떠나면, 혹시 당신이 대신 깜짝 문자를 보내줄 수 있겠느냐’라고 부탁하셨다는 것이었습니다.(구자범, ‘맛을 기록하는 법’, 한겨레신문, 2020년 7월 23일 자)

연결을 만든다는 것은 이런 세심한 노력이 필요함을 배웠습니다. 이런 노력이 한 사람의 생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합니다. 아름다운 관계는 마치 의례를 거행하듯 꾸준히 반복적으로 정성을 다할 때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삶에는 어느 경우에나 통용되는 정답이 없습니다. 삶의 상황이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모호함투성이인 삶을 살면서도 방향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같은 곳을 바라보며 길을 걷는 동료들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넘어지면 다가와 일으켜주고, 걸음이 느려지면 기다려줄 줄 아는 사람들 말입니다.

누구도 욥을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그는 자기 나름의 최선을 다했습니다. 어려운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았고, 정의와 공평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불행은 도움을 받은 사람은 많았지만, 친밀하게 연결된 벗들이 많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의 특색 중 하나로 꼽는 것이 ‘밥상 공동체’입니다. 주님은 사람들과 음식을 나누는 일을 소중히 여기셨습니다. 그 자리에는 초청받지 못한 사람, 손을 씻지 않은 이들도 있었습니다. 모두에게 열린 식탁이었던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아가페 잔치 곧 애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자주 만나고, 음식을 나눠 먹고, 함께 기도하고 찬양을 바치고, 함께 땀을 흘리는 이들이 많아질 때 우리 삶의 토대는 든든해집니다. 신앙생활은 고립을 넘어서려는 용기입니다. 다른 이들을 내 삶 속으로 맞아들이고, 나 또한 기꺼이 다른 이들의 삶의 이야기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 이야기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교회가 이런 다양한 만남의 출발점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당당뉴스 webmaster@dangdangnews.com

<저작권자 © 당당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4
default_side_ad1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포토

1 2 3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etNet2
default_bottom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