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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의 패러독스(Jonah’s Paradox)” 요나4장1절~3절

기사승인 2020.08.03  19:52:26

김명섭 kimsubwa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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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의 패러독스(Jonah’s Paradox)” 요나4장1절~3절

 

1. 요나의 분노한 까닭은

 

(1절)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

▶ 니느웨가 하나님의 심판에서 구원받은 놀라운 기적을 보며 <요나는 왜 심히 싫어하고 분노했을까?> 죄인이며 이방인이던 앗수르의 니느웨는 구원받았다. 하지만 의인을 자처하며 택하심을 받은 선민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은 멸망했다. 패러독스(paradox, 逆說)다. 일반적인 원리나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모순이지만 그 속에 중요한 진리를 전하고 있다. 니느웨의 구원은 소위 의인은 구원 받고 죄인은 멸망하며, 구원은 오직 선민에게 보장될 뿐 이방인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통념이 뒤집히는 사건이다. 요나의 신앙상식으로는 죽어 마땅한 ‘죄인’이며 심판받기에 합당한 ‘이방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처분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요나 같이 분노하는 인물이 신약성서에도 등장한다. (눅15:28~32) ‘저가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아버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큰 아들은 탕자의 비유에 등장하는 진짜 주인공이다. 요나처럼 아버지를 향해 분노한다. 불평과 원망을 쏟아낸다. (눅15:1~4)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비유로 이르시되’ 비유가 전하는 핵심메시지는 장자의식과 선민의식, 특권의식과 차별의식에 사로잡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시기와 질투로 인한 불평과 원망. 긍휼과 은혜를 잊어버린 선민 이스라엘을 향한 역설적인 가르침이다.

▶ ‘대반전’이 벌어진다. 아버지 곁에 머물던 충직한 큰 아들은 아버지의 사랑에 ‘의문을 제기하며’ 화를 내며 원망과 불평을 쏟아낸다. 반면에 아버지의 품을 떠났다가 돌아온 탕자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변함없는 사랑에 감격하여’ 기쁨의 눈물을 흘린다. 드라마에 등장하는 반전처럼 처음엔 악당인줄 알았던 캐릭터가 나중엔 의인이 되고, 처음엔 선한 인물이 나중엔 악당으로 드러나는 반전이다. (이방인 니느웨 구원 VS 선민 남유다 멸망, 죄인들은 구원 VS 의인들은 멸망) 왜 이런 반전이 벌어졌나? (롬5:20)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구원은 행위와 공덕이 아니라 회개와 긍휼이다.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자를 은혜와 긍휼로 구원하신다.

▶ (눅15:31~32) ‘아버지가 이르되 애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집을 나가서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탕자도 이렇게 사랑하시는데 집에서 아버지께 충성했던 큰 아들은 얼마나 사랑하실까. 이방인이고 죄인이던 니느웨도 긍휼히 여기신 하나님께서 택하신 이스라엘 백성을 긍휼히 여기지 않으실까. 더 비극적인 반전이 있다. 죄인 니느웨는 회개하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와서 구원을 받았지만, 택하심을 입은 선민이자 의롭다고 자부하던 이스라엘은 결국 하나님의 사랑을 저버려서 멸망했다는 사실이다. 요나서가 전하는 최종메시지다. 요나를 보내신 하나님의 숨은 의도는 이방죄인 니느웨의 구원사건을 통해 스스로 의롭다고 자부하던 선민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으로 돌아오시길 강력하게 촉구하는데 있다.

 

 

2. 기도인가, 원망(생떼와 딴지)인가

 

(2절~3절)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요나의 기도인가, 원망인가! (메시지성경) ‘요나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는 분을 터뜨리며 하나님께 소리를 질러댔다. 하나님! 내 이럴 줄 알았습니다’ 기도의 형식을 빌은 원망(불평)이다. 기도 같지 않은 기도다. 참된 기도는 나의 간구를 넘어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데 있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대부분 요나처럼 내 뜻대로 관철되기를 구하는 요청을 하고 안 되면 원망하고 불평한다. 출애굽광야를 통과할 때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 ‘기도모드’였지만 이스라엘백성은 언제나 ‘원망모드’였다. ‘목이 곧은 백성’, 그 조상의 그 자손이다. 요나는 고집이 소심 줄 같은 인물이다. 유대인들의 완고함은 오늘날까지 예수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율법주의, 특권의식, 선민의식은 마치 유대인들의 DNA처럼 완고하다. 또 다른 반전이 있다. 하나님은 고집스럽고 완고한 자들을 고쳐 쓰신다. 건축 재료로 무겁고 다루기 힘든 돌, 철, 나무를 다듬어 쓰는 것처럼 목이 곧은 유대인, 완고한 사도바울, 고집스런 요나를 들어 쓰신다.

▶ (3절)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차라리 ‘사는 것보다 죽는 게 낫다(?)’는 언뜻 이해하기 힘들다. 수치심일까, 자괴감일까, 목숨을 건 항변일까. 기도의 형식을 취하지만 사실 기도가 아니다.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다’ 말 속에 담긴 요나의 숨겨진 본심은 니느웨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향해 생떼를 부리며 딴지를 거는 반항심이다. 도저히 용납할 수 없으니 내 목숨을 거두어 주옵소서. 우리가 아이들에게 자주 쓰는 ‘땡깡 부리다’는 말은 일본말로 ‘입에 거품을 물고 간질 발작을 하다’는 나쁜 의미로 쓰면 안 된다. 이걸 우리말로 순화시키면 ‘생떼를 쓰다’ 끝까지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고 자기 고집을 부린다는 뜻이다. ‘딴지 걸다’ 씨름에서 장딴지를 걸다는 뜻인데 일이 순순히 진행되지 못하도록 훼방을 놓거나 어기대는 태도다. 내 뜻과 하나님의 뜻이 다를 때, 나의 판단과 하나님의 판단이 다를 때가 있다. 이때 요구된 게 순종이다. 내가 바라던 결과와 다른 결과를 허락하실 때가 있다. 진정한 순종은 ‘결과에 대한 순종’을 포함한다. 비록 이해할 수 없고 원치 않는 결과까지 받아들이는 수용이다. 결과는 하나님의 것이다. 요나는 지금 하나님의 처분, ‘결과에 대한 순종’이 안 되는 거다. 모든 상황에 대한 순종(수용)이 되려면 ‘내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다르고, 내 뜻보다 하나님의 뜻이 더 높고, 내 뜻보다 주님의 뜻이 더 크다. 더 좋은 길로 인도 하신다’는 믿음이 있어야 비로소 가능하다. 이 믿음이 없으면 요나와 같은 반응을 보인다. 그것은 절대불가 합니다! 죽어도 안 됩니다. 틀렸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끝까지 훼방하고 방해한다. 신앙적으로는 ‘교만이 하늘을 찌른다’고 말하고 일반적으로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까부는 격’이다.

 

 

3.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존 러스킨

 

(4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하시니라”

▶ (메시지성경)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대체 무엇 때문에 화를 내는 것이냐?’ 요나의 항변은 이게 과연 합당하냐? 공정하지 않고 부당하다는 주장이다. 요나와 같은 항변이 신약성서에 등장한다. 유명한 포도원 품꾼의 비유다. 포도원 주인이 장터에 나가 품꾼을 부른다. 이른 아침, 제 삼시(오전 9시), 제 육시(정오), 제 구시(오후 3시), 제 십 일시(오후 5시) 문제는 품삯을 받을 때 벌어진다. (마20:8~12)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품꾼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 하니 제 십 일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거늘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저희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받은 후 집 주인을 원망하여 가로되 나중에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하였거늘 저희를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동일한 임금은 부당함을 주장하는 먼저 온 품꾼들의 ‘컴플레인(complaint)’이다.

▶ 포도원 주인의 답변은 다음과 같다. (13~16)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이와 같이 나중된 자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세 가지의 뚜렷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①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그 중 한 사람은 아마도 ‘이른 아침부터’ 제일 먼저 온 사람일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먼저 믿은 자나 나중 온 자나 선민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다. 교회의 직분이나 직임은 차별이 아니라 맡은 역할이 다른 것뿐이다.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에서 존 러스킨은 포도원품꾼의 비유를 통해 생명경제학을 주장한다. 한 데나리온은 하루 노동자의 품삯이다. 하루 먹을 양식은 누구나 동일하게 필요하다. 이것이 진정한 공정과 정의다.

②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포도원주인은 하나님이시다. 삶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시다. 누가 주님이냐? 품꾼이 주인노릇을 하는 월권을 하고 있다. 청지기가 주인의 일을 오래 맡으면 자기 것인 줄로 착각한다. 은혜로 받은 걸 자기 공로인줄 착각한다. 구원은 나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다. 외적인 조건이 아니라 회개에 대한 긍휼이다.

③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마지막 날 우리의 인생을 결산하는 날 벌어질 대반전을 미리 보여준다. 신앙생활은 남과 비교하거나 타인을 정죄하는 수단이 아니다. 신앙생활의 단 하나의 목적은 나 자신을 하나님 앞에 성찰하며 반듯하게 세워가는 데 있을 뿐이다. 먼저 믿은 자답게, 은혜 받은 자답게, 축복받은 자답게, 용서받은 자답게 나에게 맡겨진 사명을 잘 감당할 뿐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김명섭 kimsubwa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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