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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마리의 개들의 우렁찬 포효소리

기사승인 2020.08.04  23:55:50

임석한 skygrace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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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복이 지나고 열흘 후면 말복이 다가온다. 지금은 시대가 많이 바뀌어 복날 인기 있는 메뉴가 보신탕에서 삼계탕으로 바뀌었지만 20년 전에는 복날에 보신탕을 먹는 문화가 자연스러웠던 시대였다. 보신탕과 관련하여 내게는 잊지 못할 추억이 있다.

첫 목회시절인 2003년 11월부터 12월까지 2달 동안 강원도 양양의 추운 겨울바람을 맞으며 200여 마리의 개들에게 밥을 주었던 경험이다. 당시 담임전도사였던 내가 개밥을 줄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다. 보신탕집을 개업했던 사연 많은 우리교회의 한 여자성도님의 가정에 어려움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이 여자성도님은 남편의 의처증과 폭력 때문에 집에서 도망쳐 서울에 있는 감리교여성쉼터에서 1년간 보호받고 있다가 그곳에서 예수를 믿고 다시 양양의 집으로 돌아와 우리교회에 등록한 분이었다. 마음도 착하고 성실한 분이었지만 그 남편은 성격이 거칠고 난폭했다. 하지만 이 여자성도님은 자녀들을 생각해서 열심히 살아보려고 애쓰며 예배에 열심히 참석하였다.

2003년 가을 즈음에 이 여자 성도님은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어렵게 보신탕집을 개업했다. 음식솜씨가 좋아서 예전에도 보신탕집을 해 본 경험이 있었고 무엇보다 개를 키워 도축하는 일을 하는 남편이 재료공급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가게를 오픈하고 몇 달 장사가 잘 되었는데 문제가 생겼다. 남편이 갑자기 구치소에 갇히게 되었던 것이다. 알고 보니 이전에 음주운전으로 면허가 취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또 무면허 음주운전을 하다가 체포된 것이다. 그때 알고 보니 이미 전과 8범이었다. 문제 많았던 남편의 구속으로 이 가정에 급박한 문제가 생겼다.

첫 번째 문제는 이 남편이 보신탕집에 재료를 공급해 주어야 여자성도님이 장사를 할 수 있는데 그럴 수 없게 된 것이었고, 또 한 가지 문제는 그 집의 전 재산인 200마리가 넘는 개들에게 매일 밥을 주지 않으면 그 추운 겨울 다 굶어서 얼어 죽게 되는 것이었다. 첫 번째 문제는 다른 공급업자를 찾아서 해결을 했는데 두 번째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200마리의 개들이 얼어 죽으면 이 성도의 가정에 경제적으로 더 큰 어려움이 닥칠 것이니 남편이 구치소에서 나올 때까지 개를 살려야 했다.

수요예배 후 몇 명 되지 않았던 교우들을 모아 회의를 했다. 이 성도의 가정에 생긴 문제를 알리고 언제 남편이 나올지 모르지만 한 달이든 두 달이든 그 남편이 나올 때까지 200마리의 개들에게 매일 밥을 먹이는 일을 담임전도사인 내가 하겠다고 말했다. 전도사가 험한 일을 하겠다고 하니 성도들의 마음이 안쓰러웠는지 여자 집사님 두 분이 동참의사를 밝혔고 새로 등록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60대 초신자인 남자 성도님 한분은 서울에서 대학원까지 나온 젊은 전도사가 그런 일을 하는 것이 감동이 되었다고 하면서 같이 돕겠다고 했다. 그 추운 겨울 200마리 개들에게 밥을 주는 일이 그렇게 시작되었다.

매일 아침 근처 군부대에서 잔밥을 가져와서 오전 11시쯤에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들판에 위치한 개 사육장으로 가져간다. 저 멀리에서 잔밥 냄새를 맡은 200마리의 식용견들이 짖어대기 시작한다. 밥이 왔다고 흥분해서 짖어대는 허기진 개들의 우렁찬 포효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

밥을 줄때마다 참 난처한 상황이 있었다. 밥을 주려면 큰 개집의 문을 열고 바가지로 밥을 퍼서 개밥그릇에 덜어줘야 하는데, 문제는 개밥그릇이 늘 큼직한 개집 안쪽 구석에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 몸을 절반쯤 개집으로 집어넣어 저 멀리 있는 개밥그릇을 바가지로 끌어와야 하는데 그때마다 내 얼굴 바로 옆에서 이 큰 개들이 침을 질질 흘리면서 으르렁대는 상황이 당시로서는 너무 당황스럽고 무서운 상황이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났는데 너무 힘이 들었다. 언제까지 이 일을 계속해야 할지 모르는 것이 더 답답했다. 두 달을 버텼는데 그만둘 수도 없었다. 기도가 저절로 나왔다. “하나님! 저 남편이 하루 빨리 나오게 해 주십시오. 이제 와서 그만할 수도 없습니다” 탄원서를 내고, 경찰서장을 찾아가 사정도 하고 유치장에 찾아가서 심방도 했다. 다행스럽게도 두 달이 넘었을 때 그 남편이 나오게 되었다. 남편도 고마웠는지 후에 교회도 나와 예배도 드리고, 자신의 용접기술로 교회에 필요했던 공사를 해 주기도 했다. 10년쯤 지나서  성도님의 보신탕집은 염소탕집으로 바뀌었고 지금도 여전히 장사를 하고 있다.

삼복은 중국 진나라에서 시작됐다. 연중 무더위가 가장 기승을 부리는 시기로, 어지간히 힘든 김매기도 마무리돼 몸도 마음도 지친 시기이다. 더위도 이기고 몸보신용으로 주위에서 구하기도 쉬운 음식이 바로 개고기였다. 사마천이 지은 사기에 따르면, 진(秦) 덕공(德公) 2년, 기원전 676년에 처음 복날을 만들어 개를 잡아 열독(熱毒)을 다스렸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한국조리학회지에 발표된 논문 '식용견 문화의 변화와 진화론적 고찰'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개고기 식용문화는 신석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구려 벽화에도 개 잡는 장면이 나온다. 중종실록을 보면 당시 권세를 누린 김안로가 개고기를 무척 좋아했으며, 이팽수라는 인물이 김안로에게 개고기를 뇌물로 바쳐 요직에 올랐다는 내용이 나온다. 조선 시대 선조 때 집필을 시작해 광해군 때 발간한 '동의보감'과 헌종 때 쓰인 세시풍속집 '동국세시기'에도 개고기의 효능이 기술돼 있다. ‘동국세시기’에서 복날 개고기를 먹는 까닭을 “개를 삶아 파를 넣고 푹 끓인 것이 개장국이다. 여기에 고춧가루를 타고 밥을 말아서 시절음식으로 먹는다. 그렇게 하여 땀을 흘리면 허한 것을 보강할 수 있다”고 했다. 1800년대 유만공(柳晩恭)은 복날의 풍경을 이렇게 읊었다. "집집마다 죄 없는 뛰는 개만 삶아 먹는다.”

이런 기록을 보면 보신탕은 식용에 대한 찬반 여부를 떠나 오래된 우리 전통 복날 음식으로  서민들이 즐겨 찾던 보양식이었다. 먹을 게 부족하던 시절 더운 농사철 단백질을 섭취해야 하는데 소를 잡을 수 없으니 닭이나 개를 먹었던 것이다. 하지만 개고기를 대체할만한 다른 육류 소비가 늘어난 데다 반려동물 인구가 1,000만 명을 넘어서고 동물권 운동까지 확산하면서 보신탕도, 보신탕 식용에 관한 갑론을박도 이제는 거의 사라져버렸다. 나도 보신탕은 이제 먹지 않는다. 지금도 복날이 되어 보신탕이 머리에 떠오를 때면 그 추운 겨울 칼바람 속에서 200마리의 개들이 우렁차게 짖었던 포효소리가 들려온다.

임석한 skygrace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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