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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브주의와 도스토예프스키 (1)

기사승인 2020.08.08  04:58:26

박효원 hyo1956@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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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국놈들이 요술단을 꾸며 왔어.’ 모화는 픽 웃고 이렇게 말했다. 굿과 푸념으로 사람 속에 든 사귀 잡귀신을 쫓는 것은 지금까지 신령님께서 자기에게만 허락하신 자기의 특수한 권능이었다.” 김동리의 ‘무녀도’에 나오는 대목이다.

경주 지방에서 용하다는 무녀 모화는 어느덧 기세 등등해진 미국 선교사와 예수교인들에게 밀린다. 절에 간다던 아들 ‘욱이’마저 예수꾼이 되어 나타난다. 이들을 이겨낼 수 없음을 모화는 알았다. 그녀는 경주의 두 하천이 만나는 ‘예기소’에서 마지막 굿판을 벌이고 물에 빠져 죽는다.

선교사와 예수교인들이 풍기는 이미지는 깨끗하고 산뜻하고 부유한 반면, 모화와 주변은 더럽고 음침하고 가난하다. 토속 신앙을 상징하는 모화는 밀려드는 외래 종교에 자존심으로 대항해 보지만 쓰러지고 만다.

도스토에프스키(1821-1881)도 김동리와 비슷한 소설을 썼다. ‘악령’(Besy, 악령들)이라는 소설인데 읽기가 만만치 않다. 두꺼운데다가 외우기 힘든 러시아 사람들 이름이 익숙해질 무렵 등장인물들이 죽어버린다. 죽는 이유도 명확하지 않아 독자가 추리해야 한다.

네차예프(Sergey Nechayev, 1847-1882)라는 청년이 있었다. 그는 스위스에서 혁명가들과 교류했던 아나키스트였다. 1869년 모스크바로 돌아온 다음 한 학교에서 비밀결사조직을 만들었다. 혁명가 바쿠닌의 후계자로 자처한 그를 조직원들이 따랐다. 그런데 조직원 이바노프가 네차예프에게 실망하고 조직을 탈퇴하겠다고 말하면서 사건이 터졌다. 네차예프는 잔인했다. 그는 조직원 4명과 학교에서 이바노프를 권총 살해하고 연못에 던져버렸다. 시신이 발견되고, 경찰 조사로 네차예프와 조직원들이 벌인 일들이 드러났다.

네차예프는 스위스로 피신했지만, 친했던 혁명가들은 무자비한 일을 벌인 그를 피했다. 소문은 유럽 전체로 퍼졌다. 1872년 헤이그에서 열린 인터내셔널(국제노동자협회)에서 마르크스가 바쿠닌을 공격할 때 이 사건을 거론할 정도였다. 네차예프는 스위스 경찰에 체포돼 러시아로 돌아왔다. 그는 20년 형을 선고 받고, 상트페테르부르크 감옥(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에서 나이 35세로 죽었다.

1867년부터 독일 드레스덴에 머물고 있던 도스토예프스키는 네차예프 사건에 착안해 새 소설을 구상했다. 그가 이 사건에 꽂혔던 것은 자신에게 비슷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1847년부터 그는 페트라셰프스키(Mikhail Petrashevsky, 1821-1866)의 집에서 열리는 독서모임에 간간이 참석했다. 페트라셰프스키는 초기 사회주의자였던 ‘푸리에’에 경도된 지식인이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독서모임에서 ‘벨린스키’와 ‘고골’이 주고받은 서신을 낭독한 적이 있었다.

벨린스키(Vissarion Belinsky, 1811-1848)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자질을 알아보고 친하게 지내던 비평가였다. 병을 앓았던 벨린스키는 치료 차 독일로 갔고, 거기서 작가 고골(Nikolai Gogol, 1809-1852)과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 편지를 도스토예프스키가 독서모임에서 읽은 것이다. 1849년 도스토예프스키는 페트라셰프스키 독서회원들과 함께 체포됐다. 그리고 체제전복을 도모한 정치모임으로 간주되어 사형을 선고 받았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도심을 가로지르는 ‘네바’ 강 말고도, 도심을 감싸듯 흐르는 ‘폰탄카’라는 강이 있다. 겨울 궁전(예레미타쥐)에서 남동쪽으로 곧게 뻗은 길을 따라가면 폰타카 강과 만나는데, 그곳에 세모노브스카야(Semonovskaya) 광장이 있다. 그곳은 재정 러시아 때 왕궁 수비대원들의 숙소가 있던 곳이고, 죄인을 처형하는 장소였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세모노브스카야 처형장으로 끌려왔다. 세 명씩 총살 당하는데 둘째 줄에 그가 있었다. 첫째 줄 세 명이 총살 당하고 나서 나무에 묶였다. 총알이 날아오려는 찰라, 황제의 특사가 말을 타고 나타나 처형을 중단시켰다. 문학모임에 참석한 정도이니, 풀어주기는 하되 죽음 전 고통을 맛보도록 한 황제의 조치였다.

폐트라세프스키는 동부 시베리아로, 도스토예프스키는 중부 시베리아로 귀양갔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옴스크 감옥에서 4년, 대체복무인 군 사병으로 4년을 마치고 1859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왔다.

사병으로 복무하던 시절 도스토예프스키는 ‘마리야 이사예바’(Maria Isaeva, 결혼생활 1857-1864)를 사랑했다. 그녀는 유부녀였다. 이루어질 수 없을 것 같았던 사랑은 마리야의 남편이 죽고 찾아왔다. 신혼 첫 밤을 지내는데 흥분 탓인지 간질이 발작했다. 결혼 생활은 엉망이 됐다. 9년여 시베리아 생활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변했다. 충실한 정교회 신도가 됐고, 슬라브주의자 즉 민족주의자가 됐다.

악령은 한 비밀결사 모임과 허무주의자 ‘스타브로긴’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사건을 다룬다. 주인공은 스타브로긴이지만 실제 주인공은 ‘표트르’다. 표트르는 스타브로긴의 아래지만 모든 것을 계획하고 행동에 옮긴다. 한 마을을 약탈하고, 조직에 방해가 되는 자들이나 사상 전향을 의심하는 자들을 차례로 죽인다. 진상이 밝혀지자 표트르는 해외로 도주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소설 첫머리에 다음과 같은 푸쉬킨의 시를 적었다.

“나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흔적조차 사라졌으니 이것이 뭔가?
우리는 길을 잃었다. 악령들이 우리 말(馬)들을 홀려서다.
악령들이 우리를 광야로 내모는구나. 그 수가 얼마인가!
악령들은 어디로 떠도는가? 그들이 부르는 음산한 장송곡인가?
악령들은 마녀 결혼을 노래하는 것인가, 아니면 귀신의 장례를 노래하는 것인가?”

이 시 다음에 도스토예프스키는 거라사 지방의 귀신들린 자 이야기인, 누가복음 8장 32-37절을 적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묘사한 악령은 러시아를 배회하는 허무주의이다. 그는 자유와 진보와 혁명의 탈을 쓰고 유럽에서 들어온 악령들이, 러시아인들을 사로잡아 허무주의에 빠뜨린다고 봤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사회주의자를 자본가와 마찬가지 부류로 봤다. 자본주의도 반대했다. 그는 소설에서 돈을 자유롭게 써버리는 인물은 좋게, 돈을 모으려는 인물은 나쁘게 그렸다. 그런 연유인지 자신도 돈을 하찮게 여겼다. 그는 돈이 생기는 대로 다 써버렸다. 저술로 얻은 수입이 적지 않았지만 손에 쥐는 법이 없었다. 돈이 떨어지면 온갖 사람들에게서 닥치는 대로 꿨다. 그러니 빚에 늘 쪼들릴 수밖에 없었다.

1863년 도스토예프스키는 앓는 아내를 두고, 처녀인 수슬로바(Pollinaria Suslova, 1839-1918)와 함께 유럽여행을 갔다. 물론 빚을 냈다. 수슬로바는 지성적이었지만 사치와 낭비가 심했고, 콧대가 높아 도스토예프스키의 사랑을 우습게 여겼다. 그러면서도 도스토예프스키를 자기에게 묶어두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폐병으로 죽게 된 아내를 간호하러 홀로 러시아로 돌아왔다. 아내가 죽자 출판업자에게서 선불을 받아, 다시 애인이 있는 유럽으로 갔다. 스트레스 때문이었을까, 가는 길에 도박장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다.

홀몸이 된 도스토예프스키는 수슬로바를 만나 청혼했지만 거절당했다. 두 사람은 이별과 결합을 반복했다. 수슬로바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에서 거칠고 거센 여자의 모델이 됐다.

박효원 hyo1956@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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