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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스크랜턴, 한국기독교의 기반을 이루도록 헌신한 분임을 기억해야 합니다.(Ⅱ)

기사승인 2020.09.15  13:49:06

곽일석 iskwag@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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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헌신과 열정으로 서민들을 섬긴 시란돈(施蘭敦)의 의료선교활동을 기억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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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에서 한국은행 방향으로 300m 정도 길을 따라가면 오른쪽에 빌딩이 보입니다. 멀리서 보면 교회 십자가가 보이지만, 가까이 가면 쇼핑센터 간판 및 복잡하게 들어선 가게들만 보여서 교회가 어디인지 놓칠 수 있습니다. ‘왜 이런 시장 한복판에 교회가 있나?’ 하는 의문도 듭니다. 그 의문은 상동교회 7층에 마련되어 있는 자그마한 역사자료전시실을 둘러보면 해결됩니다. 역사자료가 전시되어 있는 곳에서 쉽게 만나는 이름은 전덕기와 윌리엄 스크랜턴입니다.

윌리엄 스크랜턴이 ‘선한 사마리아인 병원’ 계획을 수립하고 성문 밖 세 곳에 시약소를 개설한 것은 의료시설을 넘어 교회 설립까지 내다본 것이었습니다.

“이 모든 시약소에는 장차 예배당으로 사용할 부지가 포함되어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그런 목적을 갖고 부지를 매입하였습니다. 이처럼 시약소를 많이 세우는 목적은 이들 시약소가 삼림 속에 들어가 벌채하는 역할을 해서 미래의 목적에 사용되도록 땅을 개간하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바는 10년 안에 이들 부지를 예배당 용도로 넘겨주고 우리 의사들은 아직 복음이 들어가지 못한 지역에 들어가서 병원을 세우는 것입니다”(“윌리엄 스크랜턴의 선교보고서”, 1889. 9. 3).

스크랜턴은 세 곳의 시약소에 의약품만이 아니라 성경과 전도책자도 비치해 놓고 남녀 전도인을 상주시켜 환자와 주민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하게 하였습니다. 1893년부터 정동 시병원의 시설과 장비를 옮겨 1895년 봄부터는 상동에서 본격적인 진료를 시작하였습니다. 또 부지 안의 한옥 한 채를 예배실로 꾸며 주일 집회도 시작하였습니다. 윌리엄 스크랜턴은 1895년 4월, “상동교회에 100명의 교인이 출석하고 있다”고 보고하면서 장차 1천 명이 예배드릴 수 있는 교회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고 전했다. 1896년 여름에는 출석 교인이 300명에 이르렀습니다.

* 스크랜튼이 정동에서 1885년 6월 15일 개설한 정동병원과 의료선교, 여성교회 선교활동은 곧 서울지역으로 확장되어 나갔다. Rev, Dr W.B. 스크랜튼(施蘭敦) 목사는 정동병원(施病院:Universal Relief Hospital)과 정동여성병원(保救女館)에 이어 1888년 12월에는 애오개(Aogai)에 “시약소”(Dispensary)를 설립했고(Report M.E.S,1885. p238, 1889. p293), 1888년 9월부터 남대문 부근에 병원과 교회 부지를 사들여, 1889년 “상동병원”을 열었다.(Report M.E.S 1891, p275)

또한 Dr, 스크랜튼 목사는 1886년부터 동대문 인근을 찾아가 진료하였고, 1887년도에는 동대문 진료소(Dispensary)을 개설할 계획 세웠으며, 1891년 1월 14일에는 동대문에 “여성병원”(保救女館)을 설립하고, 여성교회와 합세하였다.(Report M.E.S 1891, p273)

스크랜튼 목사의 계획은 원대하였습니다. 즉 찾아가는 의료선교처 “진료소”(시약소)들 뿐만 아니라, 정동병원과 진료소들을 집결한 종합병원인 “선한사마리아인 병원”(Good Samaritan Hospital)으로 확장할 원대한 계획을 1887년에 구상하고 있었고(MEC Report1887,p316), 우선 1888년에 서민들이 왕래하기 편리한 남대문 일대의 건물과 토지 2,200여 평을 매입하였습니다.(MEC Report 1889, p293) 남대문 병원은 1891년 10월 중순에 완공 되었습니다.((MEC Report 1891,맥길 의사의 보고.p275.) 어머니인 메리 스크랜튼 선교사도 달성궁을 매입하여 전도부인 양성소를 설립하였습니다. 남대문 일대는 서울 동서남북 인근지역과 지방선교를 통괄하는 또 하나의 감리교 여선교회 선교기지가 되었습니다.

스크랜튼家의 모자(母子)는 정동에서 서대문, 남대문, 동대문 지역에 순회 진료소를 세우고, 교회를 세워 동서남북 지역으로 선교사업을 확장 시켜 나갔으며, 서울지역은 오늘날 정동교회, 아현교회, 상동교회, 동대문교회 등으로 설립되어 국내선교는 물론 세계선교의 사명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초기 한국선교에서 먼저 Dr,스크랜튼 목사의 헌신과 열정으로 서민, 평민을 향한 의료선교활동이 있었기 때문이란 점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장로교 첫 선교사인 알렌 박사(Dr, H.N. Allen)는 초기 감리교 선교사들의 활동에 놀라고 부러워하고 시샘할 정도였습니다. 알렌은 일기에 스크랜튼 목사가 정부병원(광혜원)에 협조하지 않고 자신의 길로 간 이유를 “순수한 福音傳道 사업이 아니기 때문에 고집을 굽히지 않고 완고했다.”고 쓰고 있으며(알렌일기 1885.6.28.자, p90), 선교편지에도 감리교를 부러워하며 보고하고 있습니다.

“감리교도들은 처음에 우리에게 아주 조그만 대지를 구입했습니다. 우리는 별 생각 없이 의기양양했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 그들은 지금까지 사방으로 대지를 구입하여 초가집으로 이루어진 마을을 사들였습니다. 이 마을은 도시 성벽에 붙은 언덕 위 가장 좋은 택지에 있습니다. 그들은 심지어 길도 인수했습니다. 그들은 곧 현재 시야를 가리는 집을 허물고 그 길을 막아 외국인 학교와 기숙사, 제가 알기로는 병원을 건축하려고 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엘리우드 박사께, 1885. 8. 16. 서신. p96)

우리는 스크랜튼 家의 활동에서 병원과 학생, 교인들이 형성되었음을 주시해야 합니다. 우리는 스크랜튼 박사가 의료선교를 통해 첫 복음전도를 열고, 선교사업 시작을 일으키고, 메리 스크랜튼 여사는 “여 학교”와 “여성병원”, “여성교회”와 “전도부인양성소” 등을 설립하여 한국기독교의 기반을 이루도록 헌신한 분임을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윌리엄 스크랜턴

윌리엄 벤턴 스크랜턴(William Benton Scranton, 1856~1922) 선교사는 미국 북감리교회에서 한국에 파송한 선교사로 서울 시병원과 아현교회, 상동교회, 동대문교회 등을 설립하였고 전덕기를 비롯한 많은 교회 지도자들을 길러냈습니다. 한국어로는 시란돈(施蘭敦)이라는 이름을 썼습니다.

 

출신

윌리엄 벤턴 스크랜턴(William Benton Scranton)은 1856년 5월 29일 미국 코네티컷주 뉴헤이븐에서 출생했습니다.

 

가족환경

그의 부모와 가족환경에 대해서는 자세한 내력을 알 수 없습니다. 뉴헤븐에서 제조업을 하던 평범한 인물이었던 아버지(William T. Scranton)는 그가 열 여섯되던 해인 1872년 별세하였습니다. 반면 어머니 메리 스크랜턴(Mary Fletcher Scranton, 1832.12.9∼1909.10.8)은 뿌리깊은 감리교 가정출신이었습니다. 메리의 부친(E Benton)과 오빠도 감리교 목사였습니다. 매사추세츠주의 감리교회 목사 집안의 딸로 태어나 1855년에 뉴헤븐의 윌리엄 스크랜턴과 결혼하여 둘 사이에 외아들을 두었으며 나이 40세가 되던 해에 남편과 사별하였습니다. 메리는 감리교 목사 가정에서 자랐기 때문에, 믿음이 깊었고 해외 선교에도 관심이 깊었습니다. 그래서 결혼한 후에도 해외 선교 기금을 헌금하는 외에 지역 해외선교회 모임의 임원으로도 활약하였습니다.

 

선교사 파송

스크랜턴은 어려서부터 이런 어머니에게 신앙적·사상적 영향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스크랜턴은 처음부터 선교사를 목적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1878년에 예일 대학교를 졸업했고 뉴욕 의과대학에 진학, 1882년에 졸업했습니다. 졸업하던 그 해, 그는 룰리 와이드 암즈(Loulie Wyeth Arms)와 결혼하였고 클리블랜드에서 병원을 개업했습니다. 그러던 중 1884년 여름, 일본에 있던 감리교 선교사 매클레이(R. Maclay)를 통해 한국 정부가 병원과 학교 설립을 허락했다는 소식이 미국에 알려졌습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미국 감리교회에서는 한국 선교를 적극적으로 검토하게 되었고 선교사 물색에 나섰습니다. 그때 매클레이가 클리블랜드로 스크랜턴 가족을 만나러 왔습니다. 당시 상황을 스크랜턴 부인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습니다.

“1884년쯤인가 제 생각으론 매클레이 박사인 것 같은데, 선교사 한 분이 클리블랜드에 있는 어머님을 뵈러 왔습니다. 그는 홀에서 나를 만나서는 한국에 개신교 선교사로 가는 게 어떻겠느냐고 물어왔습니다. 나는 놀라서 그를 쳐다보았습니다. 나는 해외선교에 대해선 전혀 아는 게 없었습니다. 국내 전도나 아메리카 토착민 선교에 관련해 조금 일을 하고 있을 뿐이며 국내 전도인들을 돕고 있는 정도였습니다. 내 대답은 '어이구머니! 안될 말이에요'였습니다. 그러자 그는 '그렇다면 가지 않는 게 좋겠군요'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달랐습니다. 스크랜턴 부인의 계속된 증언입니다.

"그 해 초여름, 스크랜턴 박사가 지독한 장티푸스 열병에 걸렸습니다. 그때 아이까지 심하게 앓고 있어 남편을 돌볼 틈이 없었고 어머님이 그를 간호하였습니다. 남편이 회복된 후 우리는 자동차로 드라이브를 나갔습니다. 그때 남편은 내게 놀라지 말라고 당부하면서 자신은 중앙 아프리카를 제외한 어느 곳이든 선교사로 나가 자신을 헌신하기로 하였다고 밝히는 것이었습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 나는 '당신이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저도 가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한참 있을 후 '거기에 제 뼈를 묻겠어요'하였습니다. 나는 결혼하던 날 결심한 것 중의 하나가 무슨 일이 있어도 남편을 거역하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열병에 걸려 투병 생활을 하는 동안 스크랜턴은 선교사로 여생을 헌신할 것을 결심한 것으로 보이며 그 과정에서 병간호를 맡았던 어머니 스크랜턴 대부인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모자가 함께 선교사로 헌신할 결심을 한 것입니다. 이러한 스크랜턴 모자의 병상 결심은 미감리회 해외선교부와 해외여선교회에 통보되었고 그에 따라 먼저 어머니 스크랜턴 대부인이 1884년 10월에, 아들 스크랜턴이 1884년 12월에 한국 선교사로 각각 임명받았습니다.

 

선교 활동

아펜젤러 목사 부부·아내·어머니와 함께 1885년 2월 3일 출발, 인천에 도착했으나 갑신정변으로 조선 정국이 불안하여 잠시 일본 요코하마로 건너가 거기서 수신사 박영효에게서 한국 말을 공부하였습니다. 그 해 5월 3일 한국에 도착하였고 의사이자 장로교 선교사인 앨런 박사가 설립한 광혜원에서 6주간 근무한 후 정동에 집 한 채를 마련하여 1886년 병원을 세우고, 고종 황제로부터 '시병원'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았습니다. 그의 어머니 스크랜턴(Scranton.M.F) 여사는 이 집에서 이화학당을 시작하였습니다.

1895년 콜레라가 유행하였을 때, 에이비슨 박사와 함께 많은 환자들을 치료해 주었습니다. 그 후 감리교 선교부의 간부로 성서 한역 통일회 회장이 되어 성서 번역에도 힘썼습니다.

1907년 선교 정책을 둘러싸고 친일파인 해리스 감리교 감독과 의견 충돌을 일으켜 선교사직과 함께 감리교 목사직을 사임하고, 성공회로 교파를 옮겼으며, 평신도로서 서울과 평북 운산, 충남 직산, 중국 대련 등지에서 의사로 활동하였습니다.

 

죽음

1917년 일본 고베로 건너 간 후 1922년 별세하였습니다. 그는 고베의 로코산(六甲山) 외국인묘지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상기 내용에서 인용된 월리암 스크랜튼과 관련한 자료는 백석대 성백걸 교수(한국역사신학연구소)의 허락을 받아 인용하였습니다.

 

2030 메소디스트 포럼(Methodist Forum)

총무 곽일석 목사(iskwag@naver.com)

 

곽일석 iskwag@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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