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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의 호사

기사승인 2020.09.16  20:06:07

황은경 hallofreund@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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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맑다. 파란 하늘과 흰색 구름의 조화가 참 예쁘다. 여름의 끝을 지나 가을의 초입에 서서 요즘 하늘 보는 것이 즐겁다. 이런 날씨의 호사는 농촌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긴 장맛비에 결실의 속도는 더디게 가도 들녘은 어느새 조금씩 익어가고 있다.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해도 계절의 수레바퀴는 서서히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처서가 지난 이후부터 저녁이면 창 밖 뒤안에서 가을 곤충들의 노랫소리가 귀를 즐겁게 한다. 귀뚤귀뚤, 새르륵새르륵, 찌륵찌륵 등 밤마다 합창을 들려준다. 창문을 열면 가을을 느끼게 하는 차가운 그러나 시원한 밤바람이 뺨을 스치고 지나간다. 바람을 더 맞으려고 창밖으로 얼굴을 내밀면 어느새 내 소리를 듣고 쏜살같이 달려온 앞마당 고양이가 불쑥 얼굴을 내민다. 야식을 달라는 표시다. 머리 한번 쓰다듬고 사료를 한웅큼 쥐어주면 내 얼굴 한번 쳐다보고는 얼굴을 박고 먹기에 바쁘다.

지난 주일 오전, 예배를 드리고 집으로 오는 길도 하늘이 매우 높고 파랬다. 흰구름이 산 정상에 걸려 걸음을 멈추고 쉬고 있었다. 구름 아래 산기슭에 그늘이 시원하게 드리우며 차츰 붉게 변해가는 가을을 언뜻 내보이고 있었다. 차 안의 우리들은 "와아, 어느새 가을이네. 우리가 이런 하늘 보는게 얼마만이야!" "이런 날은 가을 운동회 하기 딱 좋은 날인데~~" 하면서 감탄을 자아내며 서로의 운동회 기억을 떠올렸다.

이미 40년 전이다. 허허! 대체 그 많은 세월은 어디에 가 있는 것일까? 믿기지 않는 시간의 흐름이다. 여하튼 초등학교 시절, 가을 운동회는 학교 행사의 꽃이었다. 그때의 운동회는 학교만이 아니라 가족 친지들도 이런저런 이유로 함께 했던 행사였기에 그 넓은 운동장이 일년에 한번 처음으로 꽉 찼다. 더욱이 한 학년이 70명 이상 열 두 반에 오전 오후반 수업을 했던 세대였고 내 앞뒤 선후배도 엄청난 출산율을 기록하던 세대였던지라 운동회는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운동회 중 화장실을 다녀오려면 사람들 틈을 비집고 헤집고 지나야 간신히 다녀오고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기에 그 수고와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 가능하면 참고 참는게 다반사였다. 그러나 나와 같이 생각하는 동무들이 꽤 되었나보다. 점심시간의 화장실은 차라리 아까 다녀올걸 하는 후회를 갖게 했다. 지금처럼 편리하고 깨끗한 화장실도 아니었지 않은가.

학교와 지역의 행사였던 운동회는 하늘이 무너져내릴 정도로 함성이 가득했다. 하늘 아래 만국기가 흩날리고 여기저기 학년마다 경기 종목이 이뤄졌다. "청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 하는 응원소리가 귓전을 울리고, 어느 쪽에서 "와아!" 하는 소리가 들리면 어디가 이겼느냐고 묻느라 아우성치곤 했다. 우리편이 이겼다고 하면 덩달아 소리치고, 상대편이 이겼다고 하면 괜히 성질이 나곤 했다.

응원은 운동회의 재미요 볼거리다. 청군과 백군의 응원 단장 인도하에 목소리가 터져라 외치는 응원은 선수들의 사기를 북돋아주기에 충분했다. 응원은 운동회 하기 한달전부터 준비를 했다. 얇은 미농지를 꽃모양으로 여러개 오려 가운데를 풀로 붙이다보면 입술과 혀와 손끝은 미농지 색에 따라 분홍이나 파랗게 변해있곤 했다. 응원 소품은 가운데 손가락에 끼울 수 있도록 철사로 반지처럼 만들면 어린 작은 손 전체는 풍성한 꽃에 묻혔다. 풍성함이 더할수록 멀리서 보면 더 예쁘게 보였다. 그런 다음 몇날 몇일 수업을 마치면 두어시간 응원 연습이나 학년별 특별한 볼거리를 연습했다. 이리뛰고 저리뛰며 운동장을 휘돌아치면 우리들 다리 사이로 뽀얀 먼지가 가파르게 올라와 연습을 마칠때 즈음 온몸은 먼지로 가득했다. 이런 일을 4주 정도 하였으니 가끔 비가 내릴때는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그냥 지나치지는 않는다. 책상과 의자를 뒤로 밀어놓은 뒤 방송국에서 학년 담당 선생님의 구령에 따라 교실 안에서 팔딱거리며 연습을 했다. 가끔 보이지 않는 우리를 향해 호통을 치시는 선생님의 소리에 옆 급우와 숨죽여 낄낄거리기도 했다. 이렇게 열심히 연습을 하고 운동회 당일 많은 사람들 앞에서 보여줄 때는 왜 그렇게도 떨렸는지 모른다. 틀리지 않으려 긴장하고 집중한 끝에 얻은 어른들의 우뢰와 같은 환호성과 박수소리는 고생 끝에 낙이 있음을 느끼는 순간이기도 했다.

줄다리기도 하고, 달리기도 하고, 오재미로 박도 터트리고, 학년별 행사도 하고, 학부모와 함께 하는 경기도 마치면 운동회의 하이라이트가 기다리고 있었다. 경기 중에 경기는 역시 마지막으로 승부수를 띄우는 계주였다. 여기엔 꼭 계주 선수가 한 명 끼였다. 백군이건 청군이건 계주 선수가 있는 팀은 이미 이긴거나 진배없었다. 그때는 그저 계주 선수가 언제 몇번째로 뛰는가가 관심거리였다. 나머지 참가 선수들은 솔직히 들러리였다. 이러한 분위기를 계주 선수도 알았던거 같다. 그는 대부분 맨 마지막에 뛰었다. 그것도 상대 선수보다 꼭 반바퀴 정도 지고 있을 때 등장했다. 마지막 주자로서 반바퀴 뒤지고 있는 상황에서 그의 뒤춤에 전달된 바톤이 쥐어지자마자 그는 미사일처럼 튕겨 나갔다. 갑자기 운동장 전체가 들썩이기 시작한다. 학생이건 선생님이건 가족 친지 등 운동회에 참석한 모든 사람이 기립하여 오로지 한 사람만 지켜보며 소리를 내었다. 뒤처졌던 반바퀴를 넘어 앞서가던 상대 선수를 간발의 차로 스쳐 지나가는 순간,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합창 4악장의 최고조 부분이 배경음악으로 나와도 손색이 없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었다. 그는 이미 금메달 선수 뺨치는 영웅이 되었고, 계주 선수로 인해 이긴 팀은 덩달아 기뻤고 진 팀은 아쉬움을 냈지만, 어린 마음에 운동회는 하루 즐겁게 노는 날이었기에 아쉬움은 달콤한 솜사탕처럼 금새 사라졌다. 그렇게 더없이 파란 하늘 아래서 펼쳐졌던, 계절의 호사를 매해 느끼며 살았던 그 시절은 이젠 이렇게 기억으로 소환할 수밖에 없는 시절이 되었다.

코로나 이전이었다면 미세먼지로 가득하였을지도 모를 가을 초입이나 올해는 코로나 덕분(?)에 맑고 푸르고 높은 하늘을 종종 만난다. 그 하늘을 다시 못볼까 염려되기도 하지만, 그러면서도 지금 이 순간 눈을 들어 이보다 아름다울 수 없는 계절을 볼 수 있다는 것에 감사가 저절로 넘친다. 당분간 이런 하늘, 이런 호사를 누릴 수 있음에 위로를 받는다. 코로나는 멈춰도 계절의 호사는 계속 누릴 수 있기를 빈다.

황은경 hallofreund@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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