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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질부사로 순직한 샤프, 충청기독교 선교의 초석이 되다.

기사승인 2020.09.25  07:22:13

곽일석 iskwag@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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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길은 우리의 길과 다르고, 그의 생각은 우리 생각과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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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프 선교사는 1903년 미감리교회 선교부로부터 한국선교사로 파송 받고 내한했습니다. 그는 1904년에 공주 선교 사업의 책임자로 임명되었으며, 이 때 서울에 거주하면서도 윤성렬과 함께 공주에 내려와 선교지역을 살폈습니다. 그리고 맥길이 안식년으로 미국으로 돌아가자 1905년에 공주로 이주하여 본격적으로 선교사업에 착수했습니다. 이로써, 샤프는 충청도 지역에 상주한 두 번째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이해 6월 서울에서 열린 미국 북감리교회 제 1차 한국선교회(Korea Mission Conference) 당시 평안도지방, 황해도지방, 경기서부와 충청도지방으로 조직되어 있었습니다. 1906년에는 서울지방, 제물포지방, 평양지방, 영변지방, 공주지방으로 확대되었습니다. 논산교회가 속한 공주지방의 감리사는 스웨러였으며, 그간 샤프의 노고가 컸습니다.

 

샤프는 1872년 3월 18일 캐나다 온타리오의 캐스토링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친은 지방관리를 겸하고 있던 감리교 전도사였습니다. 그는 신학과 선교에 뜻을 두어 1887년 부르클린의 유니언 선교사 양성소에 입학하여 공부했습니다. 오벌린 대학 재학 중에는 오하이오주의 펜필드의 한 교회에서 목회를 했고, 남아메리카와 같은 외지에 가서 선교하려는 꿈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1903년 내한했으며, 그보다 3년 전인 1900년에 선교사로 와서 상동교회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던 하몬드(Alice J. Hammond, 史愛理施)양과 결혼했습니다. 샤프는 1903년 5월 3일 미감리교 조선선교연회에서 무어(David H. Moore) 감독에게 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그 후 정동제일교회에서 목회하며 배재학당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는 1903년 10월 28일 조직된 황성기독교청년회(YMCA)에 브라운, 에비슨, 게일 등과 함께 초대 이사로 선출되어 초기 한국기독교청년운동에 기여했습니다.

 

샤프는 공주에 부인과 함께 내려와 생활하며 공주를 비롯한 천안, 홍성, 논산 등지를 순회하며 전도했습니다. 초기에는 여건이 변변치 않아 두개 돌다리 사이에 솥을 걸고 불을 지피는 한옥에서, 그것도 일어서면 천장에 머리가 부딪히는 집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샤프부부는 1905년 11월 그간 맥길이 사용하던 하리동의 초가집과 그리 멀지 않은 곳(현 공주사회관 자리)에 서양식 집을 아름답게 지었습니다. 지하 1층과 지상 2층의 아름다운 집이었습니다.

 

샤프 목사는 충청도 지역의 곳곳을 순회 전도하며 교인들을 돌보았습니다. 여기에는 기독교 복음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어 하는 한국 신앙인들의 간절한 요청이 작용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샤프 목사의 전도와 목회가 효력을 발생해 공주와 논산을 비롯하여 주변 지역에서 열심 있는 신자들이 계속 생겼습니다.

 

공주에 기거하며 주변 지역을 순방하며 전도하던 샤프선교사는 기후와 풍토가 다른 낯선 땅에서 자기 몸을 제대로 돌보지 않고 무리하여 건강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1년여의 활동을 마친 1906년 3월 5일에 그는 장질부사에 걸려 아까운 젊은 나이에 착수한 여러 가지 일들을 남겨 놓은 채 세상을 떠나야 했습니다.

 

샤프는 1906년 2월 지역을 순방하고 있었는데, 그 중에 논산과 강경 등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샤프는 약 1년 전에 논산교회를 방문하여 성난 주민들의 박해를 받았고, 다시 그 지역을 여행하던 중 장질부사에 감염되어 별세하게 된 것입니다.

 

샤프의 이런 죽음을 당한 부인 샤프 여선교사의 아픔은 누구보다도 더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남편과의 사별의 아픔을 신앙으로 극복하며 그의 뜻을 이어 더 큰 선교사역을 통해 승화하는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고백입니다.

 

“지난 해 남편과 사별할 때, 나의 사랑하는 남편이 하늘에서 보고를 하기 위해 장차 우리가 다시 모이게 될 그 하늘의 회의로 불려 갈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하나님의 길은 우리의 길과 다르고, 그의 생각은 우리 생각과 다르다.’그래서 비록 그분이 나에게 깊은 슬픔을 주셨지만 나는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그 슬픔을 잊으려고 노력할 것이고, 또한 그분이 나에게 맡기신 일을 더욱 열심히 할 것이다. ‘이별은 이미 지나갔고 만남이 앞에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참 절망적인 해이군!’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어려움과 손실들 중에서도 어떤 방법으로든 하나님이 선을 가져다주실 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 하나님은 남편을 위해 오랫동안 준비해 오시던 더 밝은 그 집으로 남편을 데리고 가셨고,‘여기에는 우리에게 영속적이 처소가 없다’는 것을 나에게 더욱 확실히 알게 해 주셨다.“(Mrs. R. A. Sharp, "Evangelistic Work of Chung Chuong Province", The Korea Mission Field, 1906.7, p.162)

 

또한 샤프 선교사의 헌신과 병사 곧 그의 순직은 이후 공주에 파송 된 다른 선교사들에게 본이 되었고, 그들이 어려울 때마다 보이지 않는 힘을 주었습니다. 공주와 충청지역에 내려온 선교사들은 모두 샤프의 행적에 존경을 돌리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샤프 선교사는 공주를 비롯하여 논산과 강경 등 충청지역의 성장을 위해 헌신했고, 그의 봉사와 죽음의 뜻은 후대들에 의해, 특히 그의 부인에 의해 계승되었습니다.

 

 

*상기 내용에서 인용된 교회사 관련 역사자료는 백석대 성백걸 교수(한국역사신학연구소)의 허락을 받아 인용하였습니다.

 

 

2030 메소디스트 포럼(Methodist Forum)

총무 곽일석 목사(iskwag@naver.com)

곽일석 iskwag@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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