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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정취

기사승인 2020.10.14  23:17:00

황은경 hallofreund@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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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가을이네! 했던 물음이 하루 이틀 사이 그 깊이가 뚜렷해지고 있다. 자연은 소리소문 없이 빨강 노랑 물감으로 색을 입었는데 하루하루가 다르게 그 색감이 짙어지고 있다. 덧입혀지는 속도는 화가의 손놀림보다 빨라 보인다. 2년 전 생태 조성으로 산을 정리하고 어린 나무들을 싶었던 앞산도 이젠 제법 뿌리를 내리고 키가 자라면서 가을 유행을 타고 있다. 멀리서 바라보면 고만고만한 나무들이 나도 가을 옷으로 갈아입었으니 가는 발걸음 멈추고 바라봐달라고 유혹하는 것 같다. 그래서 오고가는 중에 한번쯤은 가던 차를 세우고 잠시 머물러 산을 바라보며 나무들의 손짓에 화답해준다. 나무 아래의 풀들도 덩달아 노랗게 물들인 머릿결을 휘날리며 인사한다. 물아일체는 억지로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이뤄지는 순간이다.

얼마 전 이웃집에 커피를 마시러 갔다. 나보다 먼저 귀촌을 하여 양지바른 곳에 터를 잡고 사시는 분들인데, 두 분이 엄청 부지런하시다. 500여 평 남짓 되는 땅을 무지 잘 가꾸신다. 처음에는 자급자족으로 시작하신 텃밭 농사가 지금은 마늘, 고추, 배추, 블루베리 등 웬만한 작물들을 척척박사처럼 잘 키워내셔 시절마다 호주머니가 빵빵하게 채워지는 쏠쏠한 재미를 맛보며 사신다. 손이 바지런한 사람은 굶어죽지 않는다는 말이 그분들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런 두 분이 동네의 산을 누비며 도토리를 채집하셨다고 한다. 얼마나 주우셨나 여쭸더니 도토리는 한가마니를 채우셨고, 밤은 먹을 만큼 주우셨단다. 이것을 깨끗이 씻어 고운 가을볕에 말린다. 잘 말린 도토리 껍질을 일일이 깐 뒤 방앗간에 가서 곱게 갈면 우리가 아는 도토리묵을 쑬 수 있다. 100% 국산에, 100% 유기농이니 그 맛이 얼마나 좋겠는가. 나도 종종 얻어먹는데 도토리 특유의 쌉싸름하고 떫은 맛이 시장에서나 마트에서 파는 도토리와는 비교할 수 없는 맛이다. 도토리 가루는 묵으로 쑤어먹기도 하고, 부침개를 할 때 밀가루와 섞어 부치면 훨씬 부드럽고 고소하다. 한봉지 사다놓고 반찬으로, 간식으로 해 먹으면 긴 겨울이 그리 지루하지 않다. 이런 수고로 그분의 주머니는 다시 차오른다. 입가에 미소가 한가득이다.

나의 집 옆에도 작은 산이 있다. 밤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하다. 처음에는 먼저 익어가는 밤이 한두개 툭툭 떨어진다. 그러다 입이 벌어져가는 익은 밤들이 서로 앞다투어 떨어지는 소리가 툭툭 투두둑 툭툭 하며 떨어진다. 밤이 떨어진 산길에 들어서면 입을 활짝 연 밤송이에는 굵은 것은 두알, 작은 것은 세알이 들어있다. 작정하고 나온 것이 아니기에 그럴 때는 꼭 슬리퍼나 고무신이다. 그런 신을 신고 무성한 가시 사이로 밤을 꺼내려 하니 매번 손이고 발이고 찔림을 당한다. 따갑고 아프기도 하지만 소쿠리에 채워지는 밤들을 보면 아픔보다는 즐거움이 앞선다. 30분 정도 그렇게 움직이면 한두번 쪄먹을 정도의 양이 된다. 주머니 가득, 손에 한웅큼 쥐고 내려와서 작은 소쿠리를 들고 다시 올라간다. 모아 놓은 밤을 챙겨오면 그날 저녁은 밤이 밥이 된다. 산밤은 한두번 주워 먹으면 족하다. 그 외의 널린 밤은 다가오는 겨울의 산짐승 먹이로 남겨두는 게 예의다. 내가 욕심을 덜 부리면 산짐승의 그해 겨울은 따뜻하게 보낼 수 있다.

지금은 거의 없지만 몇 년 전만 해도, 차량 대절로 찾아오는 도시 사람들로 몸살을 앓았다. 봄에는 봄나물을 캐러 오고, 가을에는 열매를 주우러 오는 사람들로 마을 입구에 나물 채취 금지와 남의 밭에 함부로 들어가지 말라는 현수막이 세워지곤 했다. 우리 동네도 한동안 외부인의 출입으로 달래와 냉이와 고사리, 도토리와 같은 열매들의 씨가 말라 몇 년 곤혹을 치뤘다. 정도만 지켜줘도 좋으련만, 아무리 뭐라 해도 듣는 둥 마는 둥 막무가내라 소리치는 내 입만 아프다. 그러면서 하는 소리가 시골 인심이 더 사납다고 한다. 사유지에 무단 침입하면서도 적반하장이다.

추석 전 부지런히 고구마를 거뒀다. 잔뜩 기대하고 힘들게 캤는데, 웬걸? 수확인 영 파이다. 내 양아치 농사 중 이번만큼 고구마 수확이 없던 해는 처음이다. 호미와 삽과 낫을 들고 생쇼를 해서 얻은 것이 작은 소쿠리에 겨우 채워질까 말까? 이웃과 나눠먹으려던 호기는 두서 너번 땅을 파고 난 뒤 포기로 돌아섰다. 기대에도 못미치고 포기도 빨라져서 설렁설렁 움직인 것이 오히려 화근이었다. 성한 것보다 찍힌 것이 더 많아 결국 속상함만 가득 남긴 고구마 농사였다. 고구마 수확은 보물을 찼든, 석탄을 캐듯 조심스럽고 정성스러운 손놀림이 필요하다. 고구마가 어디에 묻혀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참을성이 없으면 제대로 된 고구마를 얻을 수 없다. 보이는 뿌리로부터 반경을 최대한 넓혀 어린 아이를 대하듯 조심스럽게 땅을 파내면 자줏빛 선명한 고구마가 나타난다. 고구마가 보인다고 거기서 고구마를 걷어내도 안된다. 괜히 힘을 쓰다가 세로로 박혀있는 고구마가 똑 부러질 수 있으니 마치 문화재 발굴하듯 해야 한다. 이런 수고를 하루 반나절 했는데 작은 소쿠리에도 채워지지 않았으니 얼마나 당황스럽던지. 차라리 그 돈으로 한 박스 사먹고 말지 하는 소리가 절로 나오는 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고하고 애쓴 덕에 얻은 고구마를 며칠 숙성시켜 삶아 먹었더니, 헐! 맛 또한 맹하다. 고구마도 그렇게 물 건너갔다.

이제 남은 것은 벼다. 벼에 마지막 희망을 가져본다. 가을이 더 깊어지기 전, 황금 들녘은 하나 둘씩 베어진다. 그런 다음 누렇게 뜬 들깨와 콩 수확으로 올해의 가을 정취는 서서히 지는 것이다. 아마 이주 후면, 밭들은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길목에 서 있게 될 것이다. 넘어가는 계절을 놓치기 전, 이 아름다운 정취를 내 눈과 마음에 한껏 담아내도록 산책을 나서야겠다.

 

황은경 hallofreund@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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