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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색동옷 입고

기사승인 2020.10.25  00:13:24

송병구 sbkbochu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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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통일희년 사업의 연장으로 재독한인교회들이 뜻을 모아 세미나를 열었다. 주강사로 한국에서 박순경 선생님을 초청했는데, 그만하면 독일 동포들의 수준에서 얼마나 공들여 행사를 준비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열흘 남짓 복흠 시에 있는 우리 집에서 박 선생님을 모셨다. 그런데 일이 잘 되려고 했는지 둘째 아이를 임신한 아내가 입덧으로 심한 고초를 치루던 중 덜컥 병원에 입원하고 말았다.

이런 저런 이유로 박 선생님은 온통 내가 독차지 하였다. 당시 숱하게 나눈 이야기들 중 여전히 강한 인상으로 남는 것이 있다. “송 목사, 사람이 여든까지는 살아야지?” 그때 칠순을 조금 넘긴 박 선생님은 나이 드는 일이 점점 빨라진다며 칼 바르트도 번역해야하고, 통일신학도 해야 하고, 여자들도 키워야한다고 아직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일감을 늘 걱정하셨다.

처음 박 선생님을 가까이하게 된 것은 1991년 구속직후였다. 물론 전에도 먼발치에서나마 알고 있었지만 가까이하기에는 먼 여성신학자 정도로 생각했을 뿐이다. 일찍이 감신(監神)을 나왔지만, 감리교와는 무관한 이미 교파의식을 넘어선 분이었다. 막상 박 선생님이 구속되었을 때 석방활동을 벌이던 이들은 감리교회에서 거들만한 사람을 찾았다. 또 석방 후 출판기념회를 열면서도 초청장을 받을 마땅한 이들을 골랐던 것 같다.

사실 박 선생님의 구속은 갑작스런 일이어서 젊은 우리에게도 충격이었다. 대개 사회운동을 하다가 심경이 바뀌어 자신의 내면세계만을 추구하는 역주행의 경우는 종종 있었지만, 세상의 허물과는 담 싼 듯이 살아온 까다로운 조직신학자가 늘그막에 통일의 거리에 나선 것은 참으로 뜻밖이었다. 그 의외성 때문에 파장도 넓었고, 영향도 깊었다.

1988년 즈음 ‘고난 받는 이들과 함께 하는 모임’을 주선하던 내 입장에서 박 선생님의 구속은 기막힌 인권상품이었다. 당시 고난모임은 가까이에 있는 감리교인 양심수를 찾았고, 또 우리 시대의 가장 큰 고난인 분단의 희생자들을 발굴하여 소개하던 중이었다. 이창국, 이병설, 정영, 장의균, 이규영 님들이 그랬다. 그런 관심의 안경으로 내다보니 박순경 교수의 구속은 고난모임의 적절한 인기상품이자, 분단현실의 단면을 보여주는 대표상징이었다. 소식지에 이런 글을 썼다.

“박 교수의 신학 역정을 보면 해방공간부터 북방정책을 추진하는 오늘까지 단 한치도 발전하지 못한 분단현실을 볼 수 있습니다. 1940년대 후반 감리교신학대학 상급생 시절, 당시 민족지도자 중 존경하는 인물에 대한 설문조사에서 ‘여운형 선생’이라고 써낸 네 명의 동기생들 중의 하나인 그 분은 이 사건으로 봉변을 겪을 뻔하더니, 드디어 1990년대에 범민족회의를 주관하는 장본인이 되어 누진형을 사시게 된 듯싶습니다. 애초부터 박 교수님의 신학적 토양이 애국적이었고 그의 사상은 통일의 밑거름임을 새삼 확인케 하는 중요한 교훈입니다. 늘 제 백성의 내일을 번거롭게 하는 조국은 언제까지 우리를 이 땅에서 이방인 취급을 하려는지”(고난함께 23호, 1991년 9월. ‘묶인 박순경 교수의 노구를 핏발선 두 눈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

나중에 박 선생님이 고난모임의 강력한 지지자요 후원자가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특히 우리 시대의 고난을 가장 험하게 또 오래도록 겪고 있는 장기수 노인들에 대해 진한 연대감을 지녔다. 또래 노인으로서 그분들의 연약함을 걱정하였는데 인간에 대한 인정과 도리는 여느 젊은 축들과 남달랐다. 이제 막 사회안전법이 폐지되어 비로소 세상으로 나오던 노인들께 고난모임이 나서서 밥 한 술, 술 한 잔 대접하며 사람 사는 인정을 나누려했던 시도는 나름 적절한 행동으로 지지를 받았다.

돌아보면 해방정국의 혼란기에 잠복하였다가 1980년대 말에야 빛을 보기 시작한 그 노인들과 박 선생님의 이력이 묘하게 겹치는 것은 흥미롭다. 평생 박 선생님이 보여준 삶의 의외성은 아직 우리 시대에 숱한 희망이 잠복하고 있고, 미로의 가능성이 내재되어있음을 몸소 보여주었다. 이런 믿음으로라면 남이든 북이든 못 이을 길이 없을 것이다.

늘 젊음을 부러워하고 상찬하시면서 자신의 청춘시대를 그리워하던 박 선생님은 가뿐히 팔순을 넘고, 구순을 지나쳐 곧 백수를 앞두고 아쉽게 먼 길을 떠나셨다. 박 선생님은 영원한 청춘일 줄 알았는데 갑작스런 부음(訃音)을 듣자니 놀랍다. 세월을 촌금처럼 아끼던 박 선생님이기에 시간주머니가 여유 있을 거라 생각하였다. 평소 근심을 백두산처럼 두텁게 쌓아 놓았기에 아직 미련을 남겨둔 까닭이었다.

박순경 선생님, 부디 곱게 곱게 색동옷 차려입고 그토록 소원하던 통일나라 저편에서 우리를 지켜보소서.

송병구 sbkbochu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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