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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된 불을 피우지 말라

기사승인 2020.10.25  13: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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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된 불을 피우지 말라
말1:9-11
(2020/10/25, 종교개혁기념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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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사장들아, 이제 너희가 하나님께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간구하여 보아라. 이것이 너희가 으레 하는 일이지만, 하나님이 너희를 좋게 보시겠느냐?"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너희 가운데서라도 누가 성전 문을 닫아 걸어서, 너희들이 내 제단에 헛된 불을 피우지 못하게 하면 좋겠다! 나는 너희들이 싫다.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너희가 바치는 제물도 이제 나는 받지 않겠다. ○해가 뜨는 곳으로부터 해가 지는 곳까지, 내 이름이 이방 민족들 가운데서 높임을 받을 것이다. 곳곳마다, 사람들이 내 이름으로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바칠 것이다. 내 이름이 이방 민족들 가운데서 높임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변질을 경계해야
자비로우신 주님의 은총과 평안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모처럼 교우들의 얼굴을 대하니 반갑고 기쁘고 감사합니다. 마치 전장에서 돌아온 가족을 보는 것 같은 심정입니다. 서리가 내린다는 상강霜降 절기에 접어들어서인지 날이 제법 쌀쌀합니다. 모든 때를 아름답게 하시는 주님의 은혜 안에서 기뻐하며 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10월의 마지막 주일인 오늘은 종교개혁기념주일입니다. 마틴 루터가 면벌부(免罰符, indulgence) 판매를 비판하는 신학 논제를 비텐베르크 성 교회 문에 게시한 사건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면벌부라는 용어가 다소 낯설지요? 하지만 우리에게 익숙한 면죄부보다는 면벌부라는 용어가 본래의 뜻에 더 부합합니다. 가톨릭은 오랫동안 사람이 자기 죄를 고백할 경우 하나님의 은총과 사제의 권한으로 용서받지만, 죄로 인해 생긴 후유증은 남는다고 가르쳤습니다. 그것을 일러 ‘잠벌’(暫罰, temporal punishment)이라고 합니다. 영원한 벌이 아니라 잠시 동안 받는 벌입니다. 참회자는 그 잠벌을 없애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금식, 기도문 암송, 성지 순례, 자선 행위 등이 그런 노력에 해당합니다.

중세 사람들은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이 컸습니다. 그들은 벌을 다 청산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전전긍긍했습니다. 남은 잠벌을 해결하는 방식으로 제시된 것이 바로 면벌부였습니다. 죽어서 정화의 장소인 연옥에서 고통 받는 이들도 면벌부를 통해 낙원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면벌부는 어떤 의미에서는 대중들의 요구에 교회가 응답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이것이 교회의 치부 수단으로 변하면서 문제가 심각해진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최종원, <텍스트를 넘어 콘텍스트로>, 비아토르, 2019, 74ff 참조).

며칠 전에 만난 분이 제게 사주팔자를 본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기독교인이 무슨 사주팔자 타령인가 싶었지만, 그분의 이야기를 들으며 인간의 연약함에 대해 새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삶의 무게에 짓눌릴 때마다 사람들은 ‘내 인생이 왜 이 모양이냐?’ 하고 탄식합니다. 누구도 답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화가 납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는 게 당신 팔자‘라는 말을 듣는 순간 마음이 평안해지면서 자기 삶의 자리를 긍정하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슬픈 자기 위안입니다. 믿음은 그런 숙명론을 뛰어넘는 것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숙명을 뚫고 나가지 못합니다. 면벌부라도 사고 싶어하는 마음이 이해가 됩니다.

∙더 근원적인 것
세상의 모든 것이 낡아집니다. 그렇게 무성하던 나뭇잎들이 낙엽이 되어 떨어집니다. 그렇게 곱던 얼굴에 검버섯이 피어납니다. 문명도 나타났다가 사라집니다. 모든 것이 헛됨에 종속되어 있습니다. 우리를 뜨겁게 만들었던 종교 체험도 시간이 지나면 시들하게 변합니다. 한때 우리를 달뜨게 만들던 사랑의 감정도 어느 순간 가라앉게 마련입니다. 남는 것은 기억뿐입니다. 그 기억을 반추하며 미래를 기획하는 것이 인생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새로움을 만들어갈 용기가 없는 이들은 과거의 기억에만 붙들려 살아갑니다. 전통은 아름답지만 전통주의에 빠지는 순간 고루해집니다.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생생한 기억에서 출발한 종교가 때로는 사람들을 억압하는 도구로 변질되기도 합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가 그러했습니다. 성전체제를 통해 누릴 것을 다 누리며 살던 이들은 사람들이 겪고 있는 아픔과 슬픔에 주목하셨던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자기들의 사고 체계에 들어맞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안다 하던 이들이 진리의 구현이신 분을 죽였습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이라도 별반 다를 바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종교개혁주일을 기념하는 것은 단순히 루터의 용기를 기리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근본을 되찾기 위해서입니다. ‘Ad Fontes’, 요즘은 여기저기서 사용되는 말입니다. 근본 혹은 원천으로 돌아가자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꽤 괜찮은 신자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성실한 교인들 가운데도 여전히 진정한 믿음에 당도하지 못한 이들이 많습니다. 핵심을 붙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 핵심은 하나님의 마음, 그리고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그 마음은 세상의 약자들을 향한 연민과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그 마음에 접속되는 순간 이웃에게 보였던 불친절한 태도와 무뚝뚝함, 무정한 마음을 부끄러워하게 됩니다. 그리고 독점이 아니라 나눔, 고립이 아니라 연대, 적대감이 아니라 환대의 세상의 꿈이 우리 속에 들어옵니다. 주님은 그런 세계를 함께 만들자며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세상이 만들어 놓은 담을 허물어 서로 소통하게 하고, 상대방 속에 있는 아름다움을 호명하는 일처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또 있을까요?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까닭은 남들과 구별되기 위해서도 아니고, 구원에 대한 배타적 특권을 누리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사람다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힘을 의지하여 우리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욕망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다른 이들과도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마음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지금 강도 만난 이들의 좋은 이웃이 될 생각이 없다면 우리 믿음이 대체 무엇이겠습니까? 몸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자기를 세상의 중심에 놓으려는 구심력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우리를 타자들의 세계와 하나님의 마음을 향해 나아가도록 이끌어주는 원심력입니다. 구심력이 중력이라면 원심력은 은총입니다. 그 은총의 세계에 들어갈 때 비로소 우리를 사로잡는 두려움에서 해방됩니다. 문제는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그릇된 목자들입니다. 믿는 이들의 분별력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제사장들의 죄
말라기서를 통해 오늘의 우리 현실을 가늠해보려고 합니다. 말라기(Malachi)는 ‘나의 사자’라는 뜻입니다. 고유명사인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말라기에 사용된 용어들을 잘 살펴보면 이 책이 기록된 것은 이스라엘이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고 있던 시절임을 알 수 있습니다. 포로생활에서 귀환한 공동체가 직면하고 있던 문제들이 이 책의 배경이라는 말입니다.

예언서를 보면 아시겠지만 예언서는 대개 “~가 전한 말“, “~가 본 이상/환상”, “~에게 주신 말씀”이라는 구절로 시작됩니다. 그런데 말라기서의 시작은 좀 다릅니다. “다음은 주님께서 말라기를 시켜 이스라엘 백성에게 경고하신 말씀이다.”(1:1) ‘경고하신 말씀’은 히브리어로 맷싸 massa‘입니다. 그 기본적 의미는 ‘짐’ 혹은 ‘부담’(load, burden)이라는 뜻입니다. 듣는 이들이 반드시 응답해야 한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말라기는 백성들의 죄를 준엄하게 꾸짖지만 누구보다 더 엄중한 경고를 듣는 것은 제사장들입니다. 제사장은 하나님 앞에서는 백성들을 대변하고 백성들을 향해서는 하나님의 뜻을 일깨워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그는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한 경계인이라는 말입니다. 제사장은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해 자신을 깨끗하게 유지해야 합니다. 몸과 마음이 두루 정결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라기의 입을 빌어 당시의 제사장들을 준엄하게 꾸짖습니다. “제사장들아, 너희가 바로 내 이름을 멸시하는 자들이다”(1:6). 예언자의 말은 칼날처럼 날카롭습니다. 결코 에두르지 않습니다. 마치 집도의의 칼처럼 예리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이라는 말은 둥근 네모꼴이라는 말처럼 일종의 형용모순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하면서 제사장이 될 수는 없는 일이니 말입니다. 그들은 제단에 더러운 빵을 바치고, 눈 멀거나 병든 짐승을 바치면서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그들 속에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조선시대 선비들의 이상은 ‘거인욕去人欲 존천리存天理’라는 말 속에 오롯이 담겨 있습니다. 자기를 닦아 삿된 욕심을 덜어내고 인간이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지키는 것이야말로 참 사람의 길이라는 뜻일 겁니다. 이 마음을 품는 사람은 함부로 살 수 없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책망을 들은 제사장들은 하나님을 멸시한 적이 없다고 항변합니다. 제사법에 따라 정당하게 제사를 집행했고, 하나님을 저주하거나 함부로 말하지 않았으니 그럴 만도 합니다. 누가 보더라도 경건한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겉은 깨끗이 하면서 속은 더러운 것이 가득 찬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람들을 정신적으로 지배하고, 자기를 돋보이게 만드는 일을 하면서도 그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고 포장했습니다. 그들은 신령한 척 하지만 불신과 혐오, 냉소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래서 교만하고, 사납고, 무모합니다. 말과 표정에 온기가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 삶의 한 복판에서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사람도 상황이 급박하면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기도에 응답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급할 때마다 불러낼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Deus ex Machina’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기계장치로서의 신’이라는 뜻입니다. 고대 그리스 연극에서 사용되던 장치입니다. 주인공이 곤경에 빠져 도저히 그 위기에서 벗어날 수 없을 때 갑자기 등장하여 상황을 일거에 해결하는 장치를 일컫는 말입니다. 우리도 살면서 어려운 일을 만날 때마다 이런 하나님의 등장을 고대합니다. 이건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약함 때문입니다. 좋은 시절에는 하나님이 마치 안 계신 것처럼 맘대로 살다가, 곤경에 처하면 하나님께 절박하게 매달리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우리 생의 한복판에서 발현되어야 합니다.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만이 아니라 우리 삶이 두루 평안할 때에도 하나님의 뜻을 여쭙고 그 뜻을 따라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깊은 일치를 이루기 위해 늘 겸손하게 엎드려야 합니다. 믿음은 삶의 방식이어야지 삶의 방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에게 가장 큰 충격을 주는 구절은 “너희 가운데서라도 누가 성전 문을 닫아 걸어서, 너희들이 내 제단에 헛된 불을 피우지 못하게 하면 좋겠다!”(1:10)라는 말씀입니다. 제단에 타오르는 불이 헛된 불일 수도 있다는 사실이 우리를 두렵게 합니다. 차라리 성전 문을 닫아 걸었으면 좋겠다는 말씀 속에 담긴 하나님의 분노가 느껴지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첫 사랑을 잃어버린 에베소 교회가 회개하지 않으면 “내가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겠다”(계2:5b)고 말씀하셨습니다. 에스겔은 “주님의 영광이 그룹들에게서 떠올라 성전 문지방으로 옮겨”(겔10:4)가는 광경을 비전 가운데 보았습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 역할을 감당하지 못할 때 하나님은 교회 문을 닫으실 것입니다. 그것은 어쩌면 하나님의 무능력의 증거가 아니라 살아계심의 증거인지도 모릅니다.

한국 교회는 어느 사이엔가 역사 발전의 걸림돌처럼 인식되고 있습니다. 역사를 초월의 방향으로 이끌어야 하는 교회가 오히려 반사회적인 집단처럼, 몰상식한 집단처럼 인식되고 있습니다. 개신교회 하면 떠오르는 단어가 뭐냐는 질문에 나오는 대답은 대개 부정적인 것들입니다. 헌금 강요, 배타성, 편협함, 거리의 전도자들, 광신적 믿음, 타락한 성직자들, 교회 세습…. 부정할 수 없는 우리의 현실입니다. 성전 문을 닫아 걸었으면 좋겠다는 하나님의 탄식이 오늘처럼 크게 들려올 때가 없습니다.

지금은 울면서 씨를 뿌려야 할 때입니다. 흥성했던 과거의 기억에만 붙들릴 여유가 없습니다. 작은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일단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는 오만한 자부심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브루더호프 공동체(Bruderhof Communities)의 웹자보에서 이런 구절과 만났습니다.

“어찌하여 그렇게도 많은 우리 기독교인들이 우리가 옳다고 완벽하게 확신하는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여지를 마련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이 설사 우리가 전혀 예상치 않은 장소 혹은 우리가 완전히 동의할 수 없는 사람들로부터 오는 것이라 해도.”

하나님의 말씀은 다양한 통로를 통해 옵니다. 내가 그릇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겸허히 인정할 때 우리는 나와 다른 사람들을 친절하게 맞이할 수 있습니다. 지나친 확신이 오히려 우리를 오류 속으로 몰아넣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추구하셨던 것은 종교적인 올바름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아름다운 삶이었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약자들과 연대하는 삶이었습니다. 이런 성숙한 마음을 회복할 때 교회는 회복될 것입니다. “해가 뜨는 곳에서부터 해가 지는 곳까지, 내 이름이 이방 민족들 가운데서 높임을 받을 것이다”(1:11a). 이 말씀이 그대로 실현되기를 빕니다. 헛된 불을 피우면서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고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과 존중 없는 신앙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이제 다시 시작합시다. 선지자 미가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공의를 실천하는 것, 인자를 사랑하는 것,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미6:8)이라 했습니다. 삶으로 이 요구에 응답할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름에 합당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근본을 붙드는 이들이 늘어날 때 제도로서의 교회도 새로워질 것입니다. 비록 더디더라도 보이지 않는 보폭으로 담을 넘는 담쟁이처럼 끈질기게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살 때 우리는 비로소 그리스도의 몸이 될 것입니다. 주님, 우리를 인도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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