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경 목사의 영화일기
《세상을 바꾼 변호인》 (On the Basis of Sex, 2018)
영화 《세상을 바꾼 변호인》은 미국 최초의 여성 연방대법관인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1933~2020)의 삶에 관한 이야기다.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는 여성이 남성에 비해 열등한 권리를 갖는 것이 자연의 섭리요 상식이라 여겨졌던 시대 한복판에서 법이라는 분야에서 이 차별에 대항했던 기념비적인 인물이다. 그녀는 빛나는 어록들도 많이 남겼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아마도 아홉 명 정원의 대법관 중 몇 명이 여성이 되어야 충분하겠느냐는 질문에 대한 그녀의 대답일 것이다. 그녀의 대답은 이랬다. “아홉 명 전원입니다.” 그녀의 이 말은 정말로 아홉 명 모두를 여성으로 임명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었다. 이 대답으로 그녀는 지금까지 아홉 명 전부가 남성이었을 때에는 아무도 의문을 품지 않았다는 사실을 지적한 것이었다. 사고방식의 전환을 촉발하기 위한 대답이었던 것이다.
영화의 첫 장면은 이 지혜로운 대답의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신입생들이 하버드법대의 입학식장으로 들어가는 첫 장면에서 카메라는 남자들의 물결을 보여준다. 온통 다 남자들만 등장하는 이 첫 장면은 괴이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그중에 단 한 사람의 여자인 주인공 긴즈버그가 무리 속에 등장한다. 여자요 엄마요 유대인이라는 모든 사회적 약점을 짊어진 그녀의 파란만장한 삶이 이 첫 장면에서 고스란히 전해진다.
그녀의 많은 활약 중 영화는 1972년 모리츠 대 국세청장 사건을 주제로 다룬다. 이 사건이 특이한 점은 성차별을 받는 대상은 여자가 아니라 남자였다는 점이다. 미혼으로 홀로 노년의 모친을 돌보던 남자는 어머니의 간병인에게 지불한 보수에 대해 소득공제를 신청했으나 국세청에 의해 거절당한다. 그가 미혼의 남성이었기 때문이다. 가족의 보육자는 여성이라는 전제가 오히려 이 남자에게 차별적인 요소로 작용했던 것이다. 이 사건을 통해 긴즈버그는 성차별이 여성만의 문제가 아니라 남성에게도 문제임을 지적한다. 그리고 그녀는 이 성차별사건에 대한 승리의 판례를 이어지는 모든 성차별 사건들에 대한 발판으로 삼게 된다.
영화의 영어 원제 ‘On the Basis of Sex’, 즉 ‘성별에 근거한’은 영화가 다루고 있는 차별의 성격을 보다 선명하게 보여준다. 영화에는 곱씹을 가치가 있는 수많은 장면과 대사들이 등장한다. 판사들이 틀린 거냐는 남성 의뢰인의 질문에 판사들이 아니라 법이 틀린 것이라는 긴즈버그의 대답은 이상하게 제정되고 적용되는 무수한 교회의 법들을 생각나게도 하고, 도덕적으론 옳았으나 재판에선 진 사건을 언급하며 긴즈버그를 향해 도덕이 이기지는 못한다고 자조적으로 말하는 인권활동가의 씁쓸한 말은 기세등등한 불의가 승리하는 법 현실을 떠올리게도 한다. 또한 재판석을 향해 “이 나라를 바꿔달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 나라가 바뀔 권리를 지켜달라는 겁니다.”라는 그녀의 호소는 법이 지니는 의미와 중요성을, 그 법을 결정하고 실행하는 자들의 엄중한 책임감을 생각나게도 한다.
인권의 문제가 대두될 때마다 한 편의 인권 상승이 다른 편의 인권 하락을 초래한다며 인권의 문제를 당사자들 간의 대결구도로 몰아가려는 사람들이 어김없이 등장하곤 한다. 하지만 영화는 사회적 약자의 인권이 향상되면 사회 전 구성원의 인권이 향상된다는 사실을, 인권의 문제가 결코 제로섬 게임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긴즈버그의 남편이 영화 내내 헌신적인 최고의 동반자로 아름답게 묘사되는 것은 영화를 재미있게 만드는 큰 덤이다. 자신보다 뛰어난 아내를 끝까지 사랑하고 존경한 남편은 세상을 떠나기 전 다음과 같은 편지를 긴즈버그에게 남겼다고 한다. “처음 만난 그날 이후로, 당신을 존경하고 사랑했습니다. 그런 당신이 법조계의 가장 높은 곳에 올라서는 모습을 지켜보며 참으로 기뻤습니다!” 이 극영화와 더불어 그녀에 관한 다큐멘터리영화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나는 반대한다》(2018)를 함께 감상하는 것도 좋은 공부가 될 것이다. 영화는 19세기 초 노예제 폐지론자이자 양성평등 지지자였던 사라 그림케를 인용한 긴즈버그의 말을 실제 육성으로 전하며 끝을 맺는다. “여성에게 특혜를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목을 밟고 있는 발을 치워달라는 것뿐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갈 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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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경 jinkyung.lee@yahoo.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