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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주의자들의 이율배반적인 삶

기사승인 2021.01.14  02:22:24

최재석 jschoi411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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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첫날 담임선생님이 들어와서 앞으로 새로운 각오로 열심히 공부하라고 학생들을 격려했다. 영어를 가르치는 그 선생님은 칠판에 ‘Heaven helps those who help themselves.’라고 써놓고, 노력하지 않으면 하늘도 도와주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 영어 속담을 외우라고 하면서 여러 번 따라 읽게 했다.

나는 고등학교를 다니는 동안 그 속담을 내 좌우명으로 삼고 열심히 노력했다. 그런데 대학에 가서 대학생 선교단체에서 교리공부를 하면서 그 속담은 예정의 교리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예정론에 의하면 하나님이 어떤 사람은 영원한 생명으로 어떤 사람은 영원한 사망으로 만세 전에 예정하셨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그 예정은 바뀌지 않는다. 그리고 예정론을 내세운 루터나 칼빈 같은 개혁자들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인했다.

예정론에 따르면,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 자를 돕는다“는 속담은 인간의 노력, 다시 말해서, 자유의지를 강조하는 말이기 때문에, 이단적이었다. 그래서 그동안 내가 좌우명으로 삼아 온 그 속담이 하루아침에 무너져버리게 되었기 때문에 혼란스러웠다. 속담이란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조상들의 삶의 지혜가 담긴 금언인데, 서양의 기독교 국가들에서 어떻게 예정의 교리와 맞지 않는 속담이 만들어졌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해온 대로 그 속담의 테두리 안에서 살면서도 예정의 교리를 받아들이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내 내면에서는 내게 익숙해진 그 속담과 개혁자들의 교리가 싸우고 있었다. 바울 같은 위대한 신앙인도 자기 내면에서 두 가지 법이 싸우고 있다고 고백했으니 나만이 그런 갈등을 겪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위안을 얻었다. 

그러다가 사회학자 막스 베버를 배우면서 왜 서양의 칼빈주의자들이 그런 속담을 만들게 되었는지 알게 되었다. 그는 사회학의 고전이 된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칼빈의 예정론과 칼빈주의자들의 직업 정신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데, 그 설명은 아르키메데스가 했던 것처럼 ‘유레카!’를 외칠 만한 것이었다.

베버에 의하면, 칼빈주의를 신봉하는 서양의 교인들은 자신이 구원받을 사람인지 멸망할 사람인지 알 수 없어서 아주 불안했다. 자기가 구원받도록 예정된 것이 아니라면 아무리 열심히 교회를 다니고 성경을 공부하고 성경대로 살려고 노력해도 아무 의미가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런 불안을 벗어날 방안을 직업의 성공에서 찾았다. 그들은 자기의 직업을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믿고 성실하게 일해서 성공하면,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고 또한 그것은 자기가 구원받도록 예정되었다는 증거가 된다고 믿었다. 아마도 그들은 달란트의 비유에서 그런 믿음의 당위성을 발견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들은 세상에서 성공하기 위해서 열심히 일해서 재물을 축적했다. 

베버에 따르면, 이러한 그들의 노력이 자본주의 발전의 핵심이 되었다. 예정을 철저히 믿는 사람들이 열심히 일했다는 것은 이율배반적인 일이어서 믿기 어렵다. 그러나 사회학자로서의 베버의 명성과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 명저로 인정받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그의 주장이 학계에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calling’이라는 영어 단어의 의미를 보면 서양의 기독교인들이 자신의 직업에 대한 철저한 소명 의식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 사실인 것 같다. ‘calling’에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의미하는 소명(召命)과 직업 두 가지 의미가 있다. ‘calling’이 지닌 이 두 가지 의미는 칼빈주의자들이 자기의 직업을 하나님이 자기를 불러서 맡긴 것으로 생각하고 성실하게 노력한 데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러한 그들의 직업의식에서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속담이 나올 만하다

칼빈주의에 바탕을 둔 장로교가 한국의 주류 교단을 이루고 있지만, 우리에게는 그런 직업관이 없다. 그것은 우리가 전도에 힘썼기 때문인 것 같다. 구원받을 사람이 미리 정해져 있고 우리가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그 예정이 바뀌지 않는다면 전도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우리는 믿는 사람은 누구나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고 ‘아무나 오게’를 노래하면서 열심히 전도했다. 그 결과 예정의 교리가 한국 교회에 깊이 뿌리내리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어떻든 놀랄 수밖에 없는 것은 예정을 믿는 칼빈주의자들이 그들의 의지를 발휘해서 힘써 노력했다는 점이다. 칼빈주의자들의 직업의식이 자본주의의 원동력이 될 만큼 그들이 성공하기 위해서 노력했다고 하니, 그들은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실제 삶에서 예정론과 상반되는 자유의지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예정과 자유의지를 모두 받아들이는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 실제로 일어난 것이다.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성경에는 예정과 자유의지를 비롯해서 공의와 자비, 예정과 전도, 믿음과 행위같이 상반되는 것들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이 대립되는 것들이 모두 중요하다고 말한다. 성경에서는 예정을 말하지만 행위도 요구한다.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이지만 동시에 자비로운 분이다. 예정을 말하면서도 전도하라고 명령한다. 믿음이 중요하다고 가르치지만 행하라고도 말한다. 성경에는 이런 역설적인 비전이 수두록하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상반되는 두 가지 중에서 하나만을 강조하려고 한다. 우리가 대립되는 두 가지 중에서 하나만을 강조하면 성경에 기록된 진리의 반쪽만을 받아들이는 셈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공의만 강조하면 하나님이 자비로운 분이라는 것을 외면하게 되고, 자비만을 강조하면 공의는 저버리게 된다. 

우리는 예수님이 하나님이며 인간이라고 믿는다. 지금 신학자들은 하나님이 초월해 계시면서도 내재하신다고 말한다. 예수님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인간) 사랑 중에서 하나님 사랑에만 몰두하지 말고 이웃도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그리고 상반되는 것을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 23:23)라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대립되는 것을 모두 받아들이는 것은 헤겔식의 정반합의 변증법적 사고방식과 통한다. 

나는 베버의 책을 통해서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속담이 칼빈주의자들이 성공을 위해서 힘써 일한 데서 나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예정과 자유의지 사이에서 어느 한 편에 치우치지 말고 양편을 모두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 그것이 성경적이라는 것도 배웠다.

최재석 jschoi411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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