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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구 목사의 반론에 대하여 답함

기사승인 2021.02.03  19:52:24

박충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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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구 목사의 반론에 대하여 답함

1. 부족한 글(박충구:“차별의 악: 선한 차별주의자는 없다” )에 대하여 동성애에 대해 부정적 견해를 가진 목회자의 입장에서 논평해 주신 것(여성구: 편견이 아니라 사실이고, 혐오가 아니라 긍휼이다)에 대하여 일단 감사드린다. 그러나 동시에 깊은 유감을 표한다. 이해하고 쓴 논평이 아니라 반대하기 위해 쓴 논평으로서의 허위의식이 너무 노골적으로 담겨있기 때문이다. 나의 글이 여 목사의 입장을 바꿀 정도의 설득력이 없다는 이유를 밝히기 위하여 여 목사께서는 여기저기서 동성애 혐오자들의 글과 논리를 끌어와 편집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리한 주장은 두 가지 문제를 가지게 된다. 첫째는 사실에 적합하지 않는 주장을 하게 된다. 동성애자를 이해하는 방식에서도 나의 글을 분석하는 방법에서도 사실에 적합하지 않은 주장을 하는 이유는 둘째, 여 목사께서 이미 외삽법적으로 나의 논의의 맥락과 관계없이 자기주장을 덧 씌우려는 의도를 가지고 글을 썼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동성애와 관련하여 다양한 자료와 학술적 논문이나 책을 읽지도 않은 사람이 제기하는 이런 류의 편파적 비판에 대해 윤리 학자의 입장에서 응답하는 글을 쓸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이런 부류의 논의가 동성애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여  마음 편하게 부정적으로 이해하는 평신도 지도자 혹은 목회자에게 미치는 영향을 생각하여 응답 글을 드린다.


2. 나는 동성애와 관련하여 미국교회의 입장, 유럽, 특히 독일 교회의 입장, 카톨릭 교회의 입장, 그리고 세계 정신의학회와 심리학회의 입장을 살피면서 1995년에 동성애에 관한 최초의 논문을 썼다. 이 논문은 나의 책 “한국사회와 기독교 윤리”에 실려 있고, 이에 앞서 기독교 사상지에 편집진의 이름으로 발표하였다. (당시 기상 편집진은 동성애에 관한 한국 교회의 부정적 기류가 필자인 내게 위해를 끼칠 것을 염려하여 나의 이름으로 논문을 내지 않고 기상 편집진의 이름으로 논문을 게재했다.) 

하여 동성애에 대한 나의 견해는 나의 사견이라기보다 세계 교회의 입장 변화의 추이를 살피고, 그러한 입장 변화에 내 자신이 설득된 입장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동성애 문제는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대단히 심각한 위기의식을 조장하는 주제가 된다는 것을 오래 전부터 잘 알고 있다. 나에게도 그랬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는 동성애자가 문제인가 아니면 동성애자를 혐오하는 문화에 젖어 있는 이들이 문제인가 양단간에 하나를 택하라고 하면 후자의 문제라고 보는 입장에 서있다. 내가 나의 앞선 글 말미에 밝혔듯이 인간에게는 “인간을 혐오하고 미워할 권리”가 없기 때문이다.


3. 동성애를 이해하는 방식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문제는 “존재와 행위“에 관한 이해에 있다. 동성애자의 존재를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따라서 동성애 이해의 방식이 달라지기 때문이며, 대부분의 비판자들은 존재의 문제를 간과하고 행위의 문제를 비열하게 들추는 방식을 택한다. 나는 이런 태도는 정말 문제라고 보고 있다. 이성애는 하나님의 질서고, 동성애는 하나님의 질서가 아니라고 했던 과거의 자연신학적인 입장이나, 자녀 산출의 법이 인간에게 주어진 사랑의 목적이라고 해석했던 기능주의적 성 이해는 이미 인간의 성(sexuality)이 다양하고, 신체적 조건 역시 소수자들로 인하여 다양하다는 사실 앞에서 합리적인 이성애자들도 정직하게 버린 주장이다. 

성은 동성애나 이성애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존재에 대한 이해를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지지하거나 반대할 문제가 아니다. 나는 동성애를 지지하지도 반대하지도 않는다. 그냥 존재하는 것을 인정할 뿐이고, 동성애자를 한 인간으로 대하려는 것이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과거에 형성된 편견은 소수자의 존재를 존중하는 오늘의 사회 윤리, 법적 기준에 미달하기 때문이다. 여성 혐오의 전통을 오늘날에도 계속 이어가겠다고 고집하는 이는 반사회주의자이거나 바보다. 세계의 기독교인들이 동성애를 이해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인간의 성은 이성애라는 하나의 기준만을 가지고 다른 모든 양태의 성을 비정상이라고 규정하는 시대는 지나가고 있다. 

물론 이런 사실을 애써 외면하면서 반대하는 이들도 있다. 그들은 대부분 과거의 편견을 유통하며 자기 자신이 편협한 혐오주의자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들은 자기 자신들이 문제라는 사실을 부정하기 위하여 새로운 이해를 받아들인 이들이 문제라고 아우성 친다. 물리학자 길원평 교수가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물리학자의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내가 보기에는 동성애 혐오주의자다. 혐오주의를 경건한 신자의 삶이라고 가르치는 기이한 사람이다. 

나는 기독교인들이 동성애자 존재 그 자체를 인정하지 못하던 옛 논리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기독교는 혐오주의 집단으로 전락한다. 여 목사께서는 이런 부류의 추종자일 것이라고 나는 판단한다. 동성애자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부정함으로써 그들을 혐오하고 끝없이 괴롭히는 목사인 셈이다. 그들이 여 목사에게 무슨 해를 끼쳤는지 나는 모르겠다. 왜 동성애자 존재를 부인하며, 그렇게 증오하는가? 무슨 이유가 있는지 궁금하다.

 
4. 여 목사는 나열한 동성애가 비성경, 비자연, 부도덕하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길원평씨의 주장을 또 인용했다. 유전론은 일종의 과학주의적 증거를 요구하는 것인데 사실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유전자가 있건 없건 동성애자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성애 유전자는 찾아 봤는가? 유전자 결정론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여기서 한 발 나가면 문화적 영향을 일겉는 밈(Meme)이론도 있다. 유전자 결정론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어서 나온 이론이다. 

이 모든 이론은 가설적으로 추정하고 그 가설을 입증하려는 시도들이다. 내 입장에서 본다면 그것이 입증되든지 안 되든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예를 들어 갑돌이와 갑순이가 사랑을 하는 데 그 이유가 유전적인 것인지 후천적인 것인지를 밝혀 인정하겠다는 주장과 유사하다. 동성애자의 빈도는 유럽기준 남성 인구의 약 2.5%, 여성은 그 절반 정도 된다. 이것이 사실이다. 이런 현실적 사실, 존재 자체를 인정하기가 쑥스러운지 혐오주의자들은 거듭 동성애자의 행위를 아주 야만적으로 유치하게 벌거벗긴다? 

존재는 인정하지만 존재해서는 안 될 무리라는 주장이다. 어폐가 있지 않은가? 존재하는 것을 어떻게 지워 버리나? 혐오주의자들은 여기서 히틀러가 했던 방식을 사용한다. 악의를 가지가 참소하는 것이다. 혐오주의자의 사고방식과 좌표는 바로 여기 히틀러 주변이다. 

그렇다면 동성애자들이 혐오를 받을 이유가 충분히 있는가? 혐오주의자들은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이성애자들은 혐오를 받을 이유가 없는가? 조두순은 이성애자, 자기 딸을 68차례나 강간한 강간범도 이성애자다. 이 세상의 성범죄의 99.9%가 모두 이성애자가 저지르는 범죄다. 이런 사실을 미루어 내가 이성애자를 혐오하자고 한다면 나에게 동의하겠는가? 범죄와 사랑을 구분하지 못하는 야만적 편견을 가지고 동성애자를 참소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할 짓이 아니다. 성경대로라면 “참소하는 자“나 할 짓이다. 참소하는 자는 누구인지 여러분이 잘 알 것이다. 

이성애자 중에 범죄자가 있듯이 동성애자 중에도 범죄자가 있다. 이성애자 중에 애널섹스를 하는 자도 있지만 모든 동성애자가 에널섹스를 하는 것은 아니다. 레즈비안도 있지 않은가? 특수와 보편이라는 기본적인 개념도 정리하지 못하고 종과 속을 나누지 못하는 대충 하는 사고로 특정 행위를 일반화하여 범죄 행위와 동성애 행위를 동일시하는 것은 내가 보기엔 악의가 앞선 판단이다. 


5. 여 목사께서는 자기 아내와 성행위를 어떻게 하는지 나는 모른다. 다른 사람의 성행위를 함부로 공개적인 자리에서 떠들어 대는 행위는 누가 보아도 품위가 없는 짓이다. 혐오주의자들은 교양을 주장하고 윤리와 도덕을 주장하지만 유독 동성애자를 향한 혐오감을 부추기기 위하여 동성애자들의 성애적 행위를 매우 추하게 설명하려 든다. 여기에 항상 동원하는 것이 에이즈 전파설이다. 여기 더해 애널 섹스, 리밍 행위를 매우 혐오스럽게 설명하고 있는데 나는 여 목사께서 평소 나름대로 교양 있게 살아가시는 분이라고 믿고 싶다. 

하지만 여 목사의 생각과 달리 최근 보고되는 사례들을 살펴보면 리밍은 동성애자들만 하는 것이 아니다. 이성애자들도 사랑하는 행위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물론 청교도들은 사랑의 행위도 가부장적 남성 상위 체위, 혹은 미셔나리 포지션만이 성경적이라고 주장하던 때도 있었다. 여 목사께서는 지금 이 시대에 그런 수준에서 성을 이해하고 계시리라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건강상의 문제를 염려한다면 건강위생을 가르치자고 하면 될 일이다. 민감한 성기를 물리적으로 해하는 성행위는 동성애자만이 아니라 이성애자에게도 문제가 된다. 이성애자 조두순이 한 짓을 생각해 보시라. 더구나 동성애자들 모두 마약을 하는 듯이 주장하는 것을 보니 특수와 보편을 헤아리기를 아예 포기한 논리라는 생각이 든다. 동성애자들이 마약을 하는 것이 아니라 동성애자나 이성애자 가리지 않고 정신적으로 약해진 “인간이” 하는 것이다. 

내가 주장하는 것은 동성애자가 완전 무구한 인간이라든지 천사라는 주장이 아니라 동성애자도 하나님이 내신 이성애자와 별로 다를 바가 없는 한 인간이라는 주장이다. 동성애를 혐오하기 위하여 온갖 몹쓸 이야기를 가져오는 그 방법을 이성애를 혐오하기 위해 사용해 보시라. 데이터 상 이성애자들이 더 많이 마약하고, 더 많이 사창가를 드나들며 에이즈를 퍼뜨리고, 더욱 폭력적이며, 자기 파괴적인 짓을 많이 한다. 이런 짓을 하는 이성애자를 앞에 두고 유전설이니 후천설이니 하는 것이 얼마나 우스운 짓인가? 그런 주장은 보편적 합의를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나는 그런 논의에 참여하지 않는다.  


6. 경건하다고 스스로 여기는 기독교인들은 매우 쉽게 성경을 인용하면서 동성애자를 정죄하려 든다. 여 목사께서도 예외가 아닌 것 같다. 나는 여 목사가 정말 양심적인 사람이라면 성경에서 사람의 생명을 함부로 뺏으라고 명령하고 있는 구절들이 현행 실정법에서 무효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성경 구절은 그 내용이 무엇이든 모든 것이 다 옳은 아주 특수한 (독일어로는 이런 것을 기독교에만 아주 특수한 것, Sondergut 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평신도 수준이라면 용서가 되지만 기초적인 신학 교육을 받은 이들이 이런 주장을 하는 경우, 나는 신학을 잘못 배운 이가 악의적 풍설을 주장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성경은 동성애 행위자를 포함하여 28가지 항목에서 “죽이라“고 명하고 있다. 28가지 항목을 들어 사형에 처할 죄라고 보는 이유는 그들의 행위가 하나님의 거룩함을 훼손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구절이야말로 과거의 종교 사회적 배경에서 형성된 매우 잘못된 유산이라고 본다. 나는 내 자식이 내 말을 안 듣는다 하여 성경에서 명하는 대로 죽일 생각이 없다. 

이런 성서 구절을 들이대며 혐오를 발산하는 나쁜 습성, 기독교인들이 쉽게 걸리는 병이다. 예수는 혐오를 가르친 것이 아니라 용서와 사랑을 가르치셨다. 동성애자가 이성애자가 그러하듯이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은 예수의 가르침에서 먼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문화적 유산이 이성애자 기준으로 형성되어 왔기 때문에 우리는 동성애를 잘 모르고, 이해하기도 쉽지 않고, 경험적으로 동성애자를 만나 보기도 쉽지 않아서 그들은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하여 동성애 혐오자들로부터 혐오의 원리를 수입하여 유포하는 짓은 신실한 목사가 할 짓은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7. 나는 여 목사께서 죄와 범죄를 나누어 생각하기를 권한다. 성경은 동성애 행위를 죄 정도가 아니라 죽여야 할 범죄라고 보고 있다. 다시 말해 범죄적 동성애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범죄적 동성애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성폭력 특별법을 가지고 이성애자들이 범죄적 이성애를 했을 경우에 처벌하듯이 범죄적 동성애는 법적 처벌의 대상이다. 나는 이런 처벌을 반대하지 않는다. 성경이 동성애를 언급할 경우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동성애를 언급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차이는 무엇일까? 과거로 돌아가면 갈수록 인간의 생명은 값싸게 처리되었다. 과거엔 권력자 마음에 안 든다고 하여 마구 죽이기도 했다. 우리는 그런 과거의 기준을 따라 살아가면 안 된다. 오늘날 인간의 생명은 이전에 비하여 고귀한 가치를 가진다. 그래서 인권 선언문이 나오고, 인권 사상이 펼쳐졌으며, 인간을 함부로 처리하지 못하도록 인간의 권리를 옹호하는 법이 생기고, 사회 구성원이 법을 따라 법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가기로 약속하는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가 도대체 뭔데 오늘날 민주사회에서 인권을 보호하는 법을 만들지 말라고 주장 할 수 있는지 나로서는 조금도 이해가 안 간다. 

인권법을 반대하면서 기껏 한다는 주장이 여 목사께서 나열한 정도라면 그것은 매우 우스운 일이다. 동성애자를 혐오하다 못해 자의적으로 죄인이라고 규정하는 여 목사 같은 분이, 깊은 신앙심을 가지고 동성애자들을 죄에서 구원해 주고 싶다고 주장하여도 나는 그런 주장에 전혀 동의할 수 없다. 동성애자와 여 목사, 내가 보기에는 조금도 다를 바가 없이 두 사람 모두 하나님 앞에서는 구원이 필요한 죄인이다. 

만일 여 목사께서 동성애자들이 죄인이므로 우리가 그들을 구원해야 할 사명이 있다고 주장한다면 나는 오히려 혐오의 죄를 짓고 있는 여 목사가 동성애자들에 의하여 용서를 받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동성애자 앞에서 자신들은 의롭고, 구원의 주체라고 여기는 망상에서 하루 속히 깨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8. 마지막으로 나는 여 목사의 글에서 자신과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을 싸잡아 비난하거나 “프레임 덧 쒸우는 습성“이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여 목사께서는 나를 이해하는 방식에서 매우 병적인 오류를 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오류를 몇 가지만 지적하여 바로 잡아 드린다.

첫째, 여 목사는 마치 내가 “이동환 목사는 차별적 편견이 오류를 인식하고 동성애자를 축복함으로써 동성애자를 진보를 가져왔다며 찬양하고....”라고 주장함으로써 마치 내가 이동환 목사의 행위를 찬양한 것이라 왜곡한다. 나는 이동환 목사를 일면식 대면한 적도 없고 찬양한 사실이 없다. 정정해 드린다. 나는 그를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목사로서 축도한 행위를 빌미삼아 감리교 일부 세력이 그를 2년 정직에 처한 것이 잘못된 것임을 지적한 것이다. 

둘째, 여 목사는 나를 “편견과 차별이라는 그물로 반동성애자들을 쌍끌이 해서 잡으려는 우를 범했다”고 고발하면서 슬며시 “박 교수는 사실을 편견으로 호도하여 감리교회를 비판하였다”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런 주장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나는 내 자신도 속해 있는 감리교회를 비판하지 않았다. 차별주의자들에 의하여 시대착오적인 재판을 벌이는 감리교회의 수준 낮은 자들을 비판한 것이다. 여기서도 여 목사는 특수와 보편에 대한 착각을 자유롭게 오가며 자기 편리한 대로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 

셋째, 나의 앞글에서 나는 누군가의 재현 행위에서 일어나는 지적 왜곡이나 오류에서 차별이나 혐오가 시작된다고 했다. 이것은 내 주장일 뿐아니라 편견에 관한 아주 좋은 책을 쓴 알포트의 주장에서 내가 배운 것이다. 이런 재현의 왜곡 현상이 여 목사의 글에서도 여지없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동성애를 옹호하는 확증편향에 빠져 옳음을 몰아내고 그름을 왕좌에 앉히는 심각한 자기모순에 빠졌다.”고 주장함으로써 여 목사는 마치 내가 확증편향에 빠져 동성애를 옹호하는 이상한 사람인 것처럼 규정하고 있다. 내가 인간을 증오하지 말고 소중히 여기라고 한다면 그것이 확증편향인가? 내가 보기에는 여 목사가 동성애 혐오에 대한 확증편향에 빠져 동성애자도 하나님이 사랑하는 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애써 부정하며 악의와 혐오를 발산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혹하게 된다. 

넷째, 여 목사의 심각한 오류는 동성애가 자의적 선택이라고 보고, 그 선택 행위가 죄라고 단정하는 데 있다. 나는 이성애자들의 다양한 성행위를 모두 옳다고 보지 않듯이, 동성애자들의 다양한 성행위의 양태를 모두 옳다고 보지 않는다. 하지만 문명사회에서 인간의 행위는 도덕과 법에 의하여 규제되고 있다. 그런데 여 목사는 종교적 죄의 개념을 들이대며 동성애자를 비하하고, 죄인으로 취급하며, 온갖 악설을 주장하면서 “동성애는 치료 불가능한 유전적인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의지적인 결단으로 얼마든지 고칠 수 있는 취향”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판단은 근거가 없는 주장이다. 사실 인류사회는 1970년 대 초가지만 해도 동성애를 치료하거나 바꿀 수 있다는 원칙을 고수해 왔다. 하지만 1973년, 1975년 세계 정신의학회와 세계심리학회에서 동성애는 “고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라고 정의하여 정신이나 심리 질병 리스트에서 동성애를 제외했다는 사실을 모른 척하고 있다. 그 대신 길원평 같은 혐오주의자의 주장을 하나님 말씀보다 더 귀하게 여긴다. 교회들이 지난 역사 속에서 “고칠 수 있는 취향” 장도로, 혹은 잘못된 일, 죄악 이라고 줄기차게 보아왔던 견해를 바꾸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 시점을 지나면서부터라는 사실을 아셔야 한다. 

다섯째, 여 목사는 온갖 부정적인 편견을 유포하고 나서 이렇게 다른 얼굴을 보인다. “반동성애 진영에서 죄라고 지적하며 회개를 촉구하는 것은 동성애자를 혐오하는 것이 아니라, 긍휼한 마음이 바탕이 돼서 나온 행동이다.” 두 얼굴의 목사님이시다. 정말 그럴까? 그런데 동성애자들을 위해 축도한 목사는 2년 정직을 내리고 정당하다고 하는가? 동성애를 혐오하는 부모, 목사, 교인을 만들어 놓고서 동성애가 죄라는 사실을 인정하라고 강요하는 집단이 베푸는 긍휼을 동성애자들이 받아들일까? 동성애자를 향해서 차별의 악을 향한 교회의 지난 역사를 정말 모르는 주장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교회가 비정상으로 여겨 동성애자를 자살로 내몬 역사에 대한 기록을 반드시 찾아 읽어보시기 바란다. 

마지막으로, 최근 리포트된 내용을 소개하는 것으로 이 응답 글을 마친다. 미국의 경우 일반적으로 성소수자 청소년은 그렇지 않은 청소년보다 자살률이 3.5배, 트렌스젠더는 5.87배, 게이나 레즈비언은 3.71배 높다. 이들이 자살로 내몰리는 원인은 호모포이아를 느끼는 가족 구성원이나 친구, 그리고 교회 멤버들의 냉대와 차별로 인해 삶의 기반과 보호막이 사라져 거의 적대적 환경에 둘러싸인 홈리스 상태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지금도 성소수자 청소년의 경우 약 10%가 위협과 폭력에 항상 시달리고, 34%정도가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하며, 28%가 사이버 괴롭힘을 겪는 것으로, 그리고  23%의 성소수자 청소년이 데이트 성폭력을 겪은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나는 이들이 단순히 바꿀 수 있는 성적 취향 때문에 스스로를 자살로 내 몰고 있다고 보지 않는다. 그들은 자살로 내 모는 사람은 다름 아닌 여 목사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다. 영국 성공회 캔터베리 대주교와 요크 대주교는 2020년 11월 9일 교회가 성소수자들을 억압하고 차별하며 상처 입혀온 사실을 인정하고 지난 역사에 대하여 엄청난 상처와 아픔을(huge damage and hurt)끼쳐온 것에 대하여 공식 사과했다.  부디 교회 지도자라면 자기 귀에 듣기 좋은 소리를 하는 물리학자나 간호사의 소리를 듣지 말고 세계의 교회가 바뀌는 것을 아주 조금 이해라도 했으면 좋겠다. 

박충구 교수(원로목사, 전 감리교 신학대학교 기독교윤리학 교수).

   
 

박충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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