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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성”의 딜레마

기사승인 2021.02.19  02:54:29

최형미 choihyungme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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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미(연세대 강사)의 춤추는 하마의 Friday for Feminism- 여섯 번째 이야기 

“모성”의 딜레마

“프랑스 시민이여, 당신들은 왜 어머니와 창녀만을 사랑하는가?” <남녀동수제> 운동을 하던 여성 운동가들이 외쳤던 구호다. <여성에 대한 전형성>에 도전한 것이다.

전형성(stereotype)은 폭력의 한 형태다. 아프리카를 시혜대상으로, 장애인을 의존적 존재로, 노인을 판단력이 흐려진 무력한 존재로 여기는 것 모두 그런 것이다. 여성에 대한 전형성 중의 하나는 <모성적 존재>로 보는 것이다. 모든 인간이 여성들의 자궁에서 나왔고, 최초의 사회경험은 여자의 숨, 눈, 손길이었는데, 여성을 어머니라 부르는 것이 뭐가 문제냐고 물을지도 모른다. 심지어 그것은 여성을 존중하는 표현이 아닌가 되물을 수 있다.

 

   
▲ 잠든 어머니(1883) Christian Krohg

인도 페미니스트 출판사 주반(Zubaan)의 창립자 우르바시 부탈리아(Urvashi Butalia)는 페미니스트 지식이 필요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구직 인터뷰 때였다. 회사는 내가 앞으로 아이를 낳게 될 것이므로 고용할 수 없다고 말했다. 우리 사회는 아이 낳는 여자를 범죄자처럼 취급한다. 그 이유를 밝히기 위해 우리에겐 지식이 필요하다.” 좀 노골적이긴 해도 얼마나 익숙한 상황인가? 우리 사회가 여성을 어머니로 여길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생각해 본 적 있는가? 

천재 시인이었던 아드리엔느 리치는 아이 셋을 기르며 무력해진 자신을 되돌아보며 “모성제도는 인간의 조건이 아니다. 강간, 매춘, 노예제도가 사라져야 하듯 모성제도는 사라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모성 수행이 힘들다는 표현을 넘어, 모성이라는 것이 인류 절반에게 삶의 선택권을 빼앗고, 절망하게 했다면서 모성폐지를 주장했다. 그가 비판한 것은 여성들이 어머니가 된다는 사실 그 자체가 아니다. 왜 어머니가 되면 모든 희생을 강요당하는 전형성의 굴레에 갇혀야 하는가? 누가 언제 왜 이런 전형성을 만들었는가를 묻고 있다. 

 

   
▲ 아드리엔느 리치 (1987) @ Neal Boenzi/ New Yok Times)

사람들은 어머니란 자아실현보다 이타적인 존재라고 믿는다. 대가없이, 계산없이 주기만 하는 존재라고 믿는다. 어머니는 모든 욕망이 사라진 무성애적 존재로 여긴다. 봉준호는 <마더>에서 이런 어머니 전형성에 균열을 낸다. 그러나 그는 모성을 비틀어 모욕하는 것으로 끝냈을 뿐이다.

리치는 <더이상 어머니는 없다>에서 19세기 산업발전속에서 사회구조가 바뀔 때, 남성 생계부양자 개념과 함께 등장한 것이 <가정을 지키는 어머니 개념>이라는 것에 주목한다. 이전에는 가족이 함께 농사를 짓고, 청어를 말리고, 치즈를 만들고, 술을 빚었다. 그때는 굳이 어머니 개념을 가정에 묶어둘 필요가 없었다. 

기업이 장시간 일하는 숙련된 노동자가 필요했을 때, 여성들에게 일상적 노동을 전담하게 했다. 여자들은 집에서 노는 존재, 의존적 존재, 가정주부라 불리었다. 우리들의 어머니들은 일하기 무서워 시집가지 않겠다고 했다는데….

어머니는 정말 집에만 있었을까? 기업들은 여자들을 어머니라 불렀고, 아이들 간식값이나 벌어가라며 임금 후려치기를 했다. 어차피 집에서 공짜로 일하는데 그렇게라도 받는 것이 얼마나 다행이냐고 여성들을 설득했다. 아이들을 골목에 내버려 둔 채, 생계를 위해 나온 여자들의 사정을 모른척했다. 여자들은 적은 돈을 받더라도 감지덕지 일한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여자들은 노동자가 아니라 무상노동을 하는 마음 착한 어머니이기에. 

국가도 여성들을 어머니라고 불렀다. 우리나라의 경우, 함께 독립운동을 한 여성을 민족의 어머니로 칭송했지만, 해방 후 국가는 그들을 침대로, 우물가로 부엌으로 돌려보내며 이름조차 기록하지 않았다. 지금도 여성들은 어머니라 불리며, 학교 급식, 교통봉사, 도서관 봉사등에 무상으로 동원되고 있다.

돈 이야기를 하니 치사하게 보이나?. 인권은 치사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기업과 정부만 그런일을 했을까? 사람들은 왜 그렇게 여성의 희생을 강요하는 모성을 찰떡같이 믿었을까? 그 뒤에는 교회가 있었다.


“ 어머니는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후세들의 행복에 영향을 준다. 땅이 경건하고 애국심이 투철한 어머니들로 가득 차면 세상은 고결하고 애국심이 투철한 남자들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성령의 은총 아래 세상을 구원하는 힘은 어머니의 입술에서 나와야 한다. 최초로 죄를 범한 그녀가 또한 세상을 구원하는 가장 중요한 도구가 되어야 한다. (가정을 지키는 어머니, 존 아보트 목사, 1833) “ 

“ 자신도 다스리지 못하는 어머니가 자녀들을 다스릴 수 있겠는가? 어머니는 자신을 다스리는 법을, 자신의 격정을 억제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어머니는 순종과 평정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 어머니를 위한책, 1831 ”

당시 목사들은 남자들이 술집에 가는 이유는 여자들이 집에 소홀했기 때문이라고 설교까지 했다. 지금 교회의 메시지는 바뀌었나?

“대가 없이 주는 존재”, “분노를 다스리는 존재”, “이타적인 존재” 어쩌다 이 도덕적인 말들이 차별과 폭력의 도구가 된다는 말인가. 여유가 있으면 손해 좀 보고 사는 것이 인간사다. 어려울수록 다른 사람을 품어야 온기와 용기가 생긴다. 그러나 이런 모성 이데올로기가 노동착취, 생존의 위협속에 여성들을 침묵시키는 역할을 했던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 제34회 총회 감독회의 @ 기독교 대한 감리회 홈페이지

여성들에게 어머니 역할만을 강조한 것은 국가와 기업뿐이겠는가? 교회는 여전히 여성을 어머니로 취급한다. 그들에게 더 큰 목소리를 내라고, 공동체의 지도자가 되라고 말하지 않는다. “약한자 힘주시고, 강한자 바르게, 추한자 정케함이 주님의 뜻이라” 복음은 대상에 따라 메시지가 변주된다. 남성보다 다수인 여성 신도들에게 필요한 메시지가 무엇인지 고민해야 할 때다. 교회가 왜 인권의 사각지대라는 말을 들어야 하나? 

모성은 변신하며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살아있는 날것이다. 여성이 리더가 되는 교회, 여성이 장로가 되는 교회, 여성이 목사로 서는 교회에서, 모성은 주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다. 고통에 공감하고, 싸우고, 분노하고, 보듬고, 낮아지고, 소리치고 춤추는 겸손하고 자유로운 리더의 모습일 것이다. 

 

최형미 choihyungme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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