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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려 넘어지게 하는 사람

기사승인 2021.02.21  12:57:30

당당뉴스 webmaster@dangdang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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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려 넘어지게 하는 사람
마 18:6-9
(2021/02/21, 사순절 제1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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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믿는 이 작은 사람 가운데서 하나라도 걸려 넘어지게 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차라리 그 목에 큰 맷돌을 달고 깊은 바다에 빠지는 편이 낫다. 사람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일 때문에 세상에는 화가 있다. 걸려 넘어지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걸려 넘어지게 하는 일을 일으키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다." ○"네 손이나 발이 너를 걸려 넘어지게 하거든, 그것을 찍어서 내버려라. 네가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 속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손이나 발 없는 채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또 네 눈이 너를 걸려 넘어지게 하거든, 빼어 버려라. 네가 두 눈을 가지고 불 붙는 지옥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한 눈으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봄볕처럼
주님의 은총과 평화를 빕니다. 자연은 결코 서두르는 법이 없다지요? 우수와 함께 매서운 추위가 찾아오더니 오늘은 봄 기운이 완연합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말이 떠오릅니다. “땅에 서리가 녹기 시작하면 사람에게서도 무언가가 녹기 시작한다.“(<소로의 문장들>, 박명숙 엮고 옮김, 마음산책, p.167). 정말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굳어진 채 살았습니다. 녹아야 흐를 수 있고, 흘러야 어딘가에 당도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최근 몇 년 사이 우리 사회가 참 많이 거칠어졌습니다. 장벽은 높아졌고, 언어는 거칠어졌고, 행동은 흉포해졌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머무시는 동안 주력하신 일은 유대인과 이방인, 의인과 죄인, 성과 속, 남자와 여자를 가르는 벽을 허무는 것이었습니다. 벽을 허물어 화해를 이루게 하는 일 말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그 거룩한 일에 초대하고 계십니다. 다리는 놓아야 하고, 장벽은 허물어야 합니다. 따뜻한 봄볕이 얼음을 녹여 흐르게 하듯이, 은총의 빛을 받은 이들도 우리 사회에 막힌 곳을 뚫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갈릴리 어부들을 보고 “나를 따르라” 하셨던 주님이 지금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사순절의 여정을 통해 우리 마음이 주님의 마음과 깊이 접속되기를 바랍니다. 가끔 ‘나는 불초 신자가 아닌가’ 반성할 때가 있습니다. 불초不肖란 어버이의 이름을 더럽힐 만큼 어리석고 못난 자식을 일컫는 말입니다. 종교란에 기독교인이라고 적기는 하지만 말과 행실은 전혀 예수님을 닮지 못하지 않았나 하는 자책감을 떨쳐버리기 어렵습니다. 조금씩이라도 배우고 실천해야 할 때입니다.

마태복음에는 예수님의 행적 사이사이에 다섯 개의 설교 뭉치가 배치되어 있습니다. 다섯 권으로 되어 있는 토라를 연상시키는 구조입니다. 각각의 설교가 끝날 때마다 “이 모든 말씀을 마치셨을 때”, “이 말씀을 마치시고”, “지시하기를 마치고”라는 말로 다른 단락이 시작됩니다. 5장부터 7장까지는 산상 설교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이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대목입니다. 10장은 제자들을 세상에 파송하며 들려주시는 말씀입니다. 13장은 비유를 통해 하나님 나라에 대해 일깨워주십니다. 오늘 본문인 18장은 주님을 따르는 이들이 이룬 공동체적 삶을 다루고 있습니다. 마지막 설교인 24장과 25장은 마지막 날 우리가 받게 될 심판의 기준이 무엇인지를 가르칩니다.

∙제자로 산다는 것
오늘 본문으로 택한 18장은 네 번째 설교로 “하늘 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라는 제자들의 질문으로 시작됩니다. 이 질문에는 숨겨진 전제가 있습니다. 제자들은 자기들이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기정사실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으로 평가받을 것인가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바드 대학교 교수인 마이클 샌델은 “‘자격이 있다you deserve‘라는 말의 쓰임은 1970년에서 2008년 사이 세 배로 늘었다”(마이클 샌델, <공정하다는 착각>, 함규진 옮김, 와이즈베리, p.119)고 말합니다. 그 말은 미국사회가 급격하게 능력주의를 신봉하는 사회로 변모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약자들이 설 자리는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미국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온 세계가 그러합니다.

스스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제자들의 전제가 어리석음을 보여주기 위해 주님은 어린이 하나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돌이켜서 어린이들과 같이 되지 않으면, 절대로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여기서 어린 아이는 귀염이나 사랑스러움을 나타내기 위해 동원된 것이 아닙니다. 아이들은 여전히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제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스스로 자격이 있다고 여기는 태도가 아니라, 자기의 연약함에 대한 자각입니다. 짐짓 자기를 낮추라는 말이 아닙니다. 철저한 자기 응시를 통해 자기의 부족함을 깨달아야 한다는 말일 겁니다.

자기의 연약함을 아는 사람이라야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지 않습니다. 이어지는 단락들은 우리 곁에 있는 ‘작은 사람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대해야 하는지에 대해 말합니다. 10절부터 나오는 잃은 양의 비유는 사회가 소홀히 하기 쉬운 한 사람, 가장 취약해진 사람을 돌보고 보살피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관심사임을 보여줍니다. 능력주의가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이런 이들을 ‘패배자’로 취급하고 무시합니다. 공정한 경쟁이 이루어질 수 없는 환경 속에서 분투하는 이들의 눈물과 아픔을 무시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나타나는 것이 현실입니다. 어떤 이들은 경제적 능력이 있는 부모를 만나 자기 재능을 한껏 개발하며 살 수 있지만 그럴 수 없는 환경 속에 있는 이들이 더 많습니다. 몇 년 전 한 철없는 젊은이가 부모를 잘 두는 것도 능력이라고 말하여 공분을 사기도 했지만, 많은 이들이 이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노력하면 좋은 결실을 거둘 수 있다는 말은 우리 사회의 불평등을 교묘하게 숨기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마이클 샌델은 그런 말의 허구성을 통렬하게 지적합니다.

“그들은 바닥에 묶여 있는 사람들 또는 물 밑으로 가라앉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사람들의 사정을 챙기지 못했다. 사회적 상승의 담론은 그런 이들에게 있어 약속이라기보다는 조롱이었다.“(마이클 샌델, 앞의 책, p.124)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승자들이 모든 것을 독식하는 것이 정당화되는 세상은 예수님이 꿈꾸셨던 세상과는 무관합니다. 주님의 시선이 머물고 있는 곳은 벼랑 끝에 내몰린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이들은 예수님의 눈길이 머무는 곳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에 서야 합니다. 15절부터 나오는 용서에 대한 가르침과 이어지는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 또한 취약해진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줍니다. 그런 이들을 어떻게 대하느냐가 왜 중요할까요? 아까 말씀드린 대로 마태복음의 마지막 설교 단락인 24장과 25장은 심판 날에 하나님께서 어떤 기준으로 사람들을 판단하는지를 가르칩니다. ‘가장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과 하지 않은 것이 우리의 운명을 가릅니다.

∙스칸달리조
주님의 말씀은 엄중합니다. “나를 믿는 이 작은 사람 가운데서 하나라도 걸려 넘어지게 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차라리 그 목에 큰 맷돌을 달고 깊은 바다에 빠지는 편이 낫다”(마18:6). 번역 문장이긴 합니다만 스타카토 식으로 ‘누구라도‘, ‘차라리’, ‘그 목에’로 이어지는 문장의 흐름은 이 교훈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일깨워줍니다. ‘걸려 넘어지게 하다‘라고 번역된 헬라어 동사 스칸달리조(skandalizo)는 ‘죄로 유인하다’라는 뜻도 내포하고 있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사람들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은 어떤 것들일까요? 독단적 태도, 교만함, 배려할 줄 모름, 차별, 무시, 모멸감을 안겨주는 말과 행동 등이 떠오릅니다. 공동체를 허무는 것은 대개 사소해 보이는 일들인 경우가 많습니다. 작은 구멍이 둑을 무너뜨린다는 말이 빈 말이 아닙니다. 누군가와 공동체를 이루어 산다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닙니다.

브루더호프 공동체를 만든 에버하르트 아놀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공동체로 부르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도 공동생활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잘 알기에 이렇게 말합니다.

“감정의 기복과 동요, 육체적·심리적 만족을 탐욕스레 추구하는 성향, 신경과민과 야망의 심리적 동인動因, 타인에 대한 영향력 추구, 인간의 모든 특권은 진정한 공동체 건설을 막는 장애물이지만 인간은 이를 극복할 수 있다.“(에버하르트 아놀드, <공동체로 사는 이유>, 김순현 옮김, 비아토르, p.57-58)

마지막 문장이 강력합니다. 믿는 사람은 인간의 이런 자기중심적 성향을 고칠 수 없는 결함처럼 여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안에 머문다면 이런 성향을 능히 고칠 수 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우상 앞에 바쳐졌던 음식을 먹어도 되냐, 먹지 말아야 하냐를 두고 견해를 달리 하는 교인들이 다툰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바울 사도는 스스로 믿음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향해 경고의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그대가 음식 문제로 형제자매의 마음을 상하게 하면, 그것은 이미 사랑을 따라 살지 않는 것입니다. 음식 문제로 그 사람을 망하게 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께서 그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습니다.“(롬14:15)

믿음이 연약한 자들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하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나의 자유가 다른 이들을 시험에 빠뜨린다면 기꺼이 그 자유를 유보할 줄 알아야 공동체는 든든히 선다는 말입니다.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는 조금 더 적극적으로 말합니다. “그러므로 음식이 내 형제를 걸어서 넘어지게 하는 것이라면, 그가 걸려서 넘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나는 평생 고기를 먹지 않겠습니다.“(고전8:13)

공동체 안에 우리 마음에 들지 않는 이들이 왜 없겠습니까? 차라리 등을 돌려 외면하고 싶은 생각이 드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차갑게 외면하라고 부름 받지 않았습니다. 성 프란체스코는 감정을 사하게 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복잡한 일상에서 물러나 기도에 전념하고 싶어하는 형제 베르나르도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든지 사람의 몸속 깊은 곳에는, 가장 거룩한 고행자조차도, 무섭고 더러운 벌레가 잠자고 있습니다. 몸을 구부려 그 벌레에게 이렇게 말하세요. ‘나는 그대를 사랑하노라!‘ 그러면 그것은 날개가 돋아 나비가 될 것입니다.“(니코스 카잔차키스, <성자 프란체스코 1>, 김영신 옮김, 열린책들, p.300)

다른 이들 속에 잠자고 있는 무섭고 더러운 벌레를 나비로 바꾸는 힘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어려운 일이기에 훈련이 필요합니다. 열 번 가운데 한 두 번이라도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삶이 달라질 겁니다. 그리고 우리의 자유로운 행동이 다른 이들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은 아닌가 늘 살펴야 합니다.

∙예민함 vs. 둔감함
우리는 남을 탓하는 일에 익숙합니다. 자기 눈앞의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남의 눈에 든 티끌은 잘도 봅니다. 주님의 제자는 늘 자기를 살피며 사는 사람입니다. 그는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속에는 온갖 더러운 것이 가득 찬 사람이 다름 아닌 자기 자신임을 자각합니다. 그걸 알기에 남을 함부로 비판하거나 정죄하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하여 잘못을 마냥 방치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공동체 안에서 죄를 짓는 사람이 있다면 외면하거나 도외시할 것이 아니라, 그를 사랑으로 바로잡아 주어야 합니다. 무시하고 정죄하는 태도로는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8절부터 나오는 말씀은 매우 당혹스럽습니다. 주님은 누군가를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우리 손이나 발이면 그것을 찍어서 내버리고, 눈이라면 빼어 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너무 극단적이어서 이게 과연 주님의 가르침인가 싶기도 합니다. 거의 유사한 말씀이 산상수훈에도 나옵니다. 5장 29절과 30절은 오른 눈이 너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한다면 그것을 빼서 내버리라 고, 오른손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것을 찍어서 내버리라고 가르칩니다. 산상수훈에서의 가르침이 개인 윤리를 말하는 것이라면 18장의 가르침은 공동체 윤리라고 보아도 좋을 것 같습니다.

개인적 차원이든 공동체의 차원이든 누군가를 죄에 이르게 하는 일은 정말 엄중하고 예민하게 다뤄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믿음의 공동체가 무너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말과 행실이 다른 이들 속에 있는 더럽고 무서운 벌레를 깨우는 것인지, 아니면 나비를 부르는 것인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누군가를 죄로 이끌거나 걸려 넘어지게 하는 일을 하지 않기 위해 조심해야 합니다.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리가 가장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을 당신께 행한 것으로 셈하십니다. 걸려 넘어지게 하는 사람이 아니라, 붙들어주고, 일으켜주고, 북돋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바로 그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 더 나아가 예수님을 닮은 사람입니다. 불초 신앙인으로 사는 시간은 이제까지로 족합니다. 치유하고 회복시키고 온전하게 하려는 당신의 손과 발이 되라고 주님은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사순절은 바로 이러한 삶으로의 초대입니다. 이 거룩한 소명에 기쁨으로 응답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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