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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바냐의 최후통첩, 마지막 기회” 스바냐1장 1절~6절

기사승인 2021.02.22  11:56:51

김명섭 kimsubwa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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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바냐의 최후통첩, 마지막 기회” 스바냐1장 1절~6절

 

1. 선지자 스바냐

 

① (1절)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아의 시대에 스바냐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스바냐는 히스기야의 현손이요 아미랴의 증손이요 그다랴의 손자요 구시의 아들이었더라”

▶ 스바냐는 어떤 책인가? 스바냐는 ‘12 소선지서’중에 9번째 책이다. 대선지서(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와 소선지서(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댜, 요나,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 학개, 스가랴, 말라기)는 분량에 따른 구분일 뿐 비중에 따른 구분이 아니다. 대선지서는 ‘이사야에서 다니엘까지’를 시대 순으로 배열했고, 소선지서는 ‘호세아에서 말라기까지’를 한 묶음으로 해서 시대 별로 편집했다. 스바냐가 전하는 본래적인 메시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적인 상황에 대한 전이해가 필수적이다. 모든 예언서는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기록된 말씀이다. 구체적인 현실과 상황에서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모든 성경은 수천 년 전의 것이고 특정한 민족 이스라엘의 역사에 관한 것이지만 성경의 기사가 다 그런 것 같이 모든 시대와 상황 속에서 동일하게 읽혀지고 적용되어야 한다. (성서조선)’ 요한계시록에 구약의 예언서가 직간접적으로 자주 인용된 까닭은, 역사적인 시대는 다르지만 ‘멸망(종말)’이라는 특수한 상황이 동일했기 때문이다. 구약의 예언서가 ‘바벨론제국에 의한 솔로몬성전의 파괴’라는 상황에서 기록되었듯이, 요한계시록은 ‘로마제국에 의한 헤롯성전의 파괴’라는 동일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오늘날 로마제국의 통치는 사라졌지만, 물질이 세상을 다스리는 물질만능주의시대를 살고 있다. 무엇보다 ‘왕관’이라는 뜻을 가진 ‘코로나’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공포와 불안으로 다스리는 시대다. 오늘 우리가 스바냐의 예언을 다시 읽고 숙고해야 할 이유다.

▶ 이스라엘의 역사는 남 유다의 멸망과 솔로몬성전의 파괴로 대표되는 바벨론 포로기를 중심으로 크게 세 단계로 구분된다.

구분

예언자

열왕

열강

포로기 전

암,호

욜,사,미

욘,나,옵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앗수르전성기

하박국, ※ 스바냐, 예레미야

※ 요시아 이후 (멸망직전)

바벨론전성기

바벨론 포로기

에스겔, 다니엘

느브갓네살~다리오

바벨론/바사

포로기 후

학개, 스가랴, 말라기

다리오~

바사

 

▶ 시대적 구분에 따라 자세히 살피는 까닭은, 스바냐의 예언이 ‘요시아의 시대’에 선포된 말씀이기 때문이다. 또한 스바냐가 히스기야의 현손(4대손)이라는 기록을 통해 스바냐가 히스기야 이후 만연했던 므낫세의 우상숭배를 척결하는 종교개혁을 요시아와 함께 수행했다는 사실이다. 무엇보다 스바냐의 예언은 남 유다가 바벨론에게 멸망하기 바로 직전, 국가의 명운이 풍전등화 같던 상황에서 돌이킬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점이다. ‘스바냐’라는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 숨겨둔(비축해둔) 자’다. 스바냐는 품속에 비밀히 간직하고 감춰둔 ‘비장(祕藏)의 무기’다. 마치 단검(短劍, dagger)처럼 적의 심장을 찔러서 막판에 전세(戰勢)를 역전하기 위해 숨겨둔 하나님의 최종병기다. 하나님의 최후통첩이자 돌이킬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다. 이스라엘이 멸망한 결정적인 사유는 죄악 때문이 아니라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바냐의 최종적인 예언을 듣고 돌이켜 회개하지 않으면 이제 남은 건 비참한 멸망뿐이다.

 

2. 여호와의 큰 날(Day of the Lord)

 

① (2절)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지면에서 모든 것을 진멸하리라”

▶ 스바냐의 주제는 ‘여호와의 큰 날(Day of the Lord)’이다. 그 날은 최종적인 ‘심판의 날’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구원의 날’이다. ‘모든 것을 진멸하리라’ 진멸은 히브리어로 ‘끝장나다’는 뜻으로 종말(끝장)을 의미한다. 성경이 전하는 종말은 이 세상의 종말을 넘어 국가의 멸망이나 개인의 죽음처럼 모든 것이 영원하지 않고 끝나는 날이 있다고 증거 한다. 그 누구도 그 무엇도 하나님의 심판에서 예외가 없다는 사실이다. 끝을 알고 사는 지혜가 요구되는 까닭은 삶을 허비하지 않고 더 잘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경이 전하는 종말신앙의 본래적인 메시지는 ‘마지막 날을 생각하면서 오늘을 의미 있고 가치 있게 살라!’는데 있다.

 

② (3절 상) “내가 사람과 짐승을 진멸하고 공중의 새와 바다의 고기와 거치게 하는 것과 악인들을 아울러 진멸할 것이라”

▶ ‘거치게 하는 악인’에 대한 진멸은 당연한 결과다. 하지만 ‘모든 사람, 공중의 새, 바다의 물고기’는 무슨 죄가 있어서 아울러 진멸을 당해야 하는지 의문이다. 아담의 범죄로 인해 땅이 ‘가시와 엉겅퀴를 내는(창3:17)’ 저주를 받았다. 코로나바이러스와 같은 ‘인수공통감염병’의 원인은 생태계를 교란시킨 인간의 탐욕이다. 오늘날 전대미문의 전염병보다 인류를 위협하는 더 심각한 위기는 ‘기후재해’다. 기후재앙의 근본원인도 인간의 부분별한 소비로 인한 환경파괴에서 비롯되었다. 남이야 어찌 되든지 나만 잘 먹고 잘살면 된다는 이기심과 탐욕이 부른 ‘인재(人災)’다. 전 지구의 생존을 위협하는 기후재앙은 온 인류를 향해 ‘공존과 공생’의 지혜를 촉구하고 있다. 모든 생명체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자각과 통찰은, 교회공동체나 가정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영광도 부끄러움도 함께 받는 운명공동체, ‘한 몸’이기 때문이다.

 

③ (3절 하) “내가 사람을 지면에서 멸절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 스바냐는 멸절의 원인을 거듭해서 강조한다. ‘누구 때문인가!’, ‘사람’의 책임이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 (창1:28)’ 사람은 만물의 지배자가 아니라 창조질서를 보존하는 책임을 위임받은 청지기(steward)다. 본분을 망각하고 관리자로서의 책무와 권한을 멋대로 남용했다. 지도자는 군림하는 사람이 아니라 책임지는 사람이다. 권한과 혜택은 누리면서 책임과 의무를 감당하지 않는 불의한 청지기의 문제다. 지도자의 진정한 덕목은 ‘리더십(leadership)’을 넘어 ‘청지기의식(stewardship)’이다. 스바냐는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보존해야할 사람이 도리어 창조질서를 거역하고 파괴함으로 모든 만물과 삶의 터전이 무너졌음을 고발한다.

▶ 우리도 자연과 생명, 물질과 직분을 맡기신 분의 뜻에 따라 선용해야할 책무를 위임받은 청지기다. (창6:5~8)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과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하나님께서는 패괴한 세상에서 말씀대로 준행했던 신실한 청지기 ‘노아’ 한 사람을 통해 구원의 길을 열어 두셨다. 멸망의 원인이 사람으로부터 시작되었지만, 생명으로 나가는 구원의 길도 사람에게 달려있다. 하나님께서 ‘인자(人子)’되신 예수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이유다.

 

 

3. 멸절의 대상자

 

① (4절) “내가 유다와 예루살렘 모든 거민 위에 손을 펴서 바알의 남아 있는 것을 그곳에서 멸절하며 그마림이란 이름과 그 제사장들을 아울러 멸절하며”

▶ 누구 때문에 온 땅을 멸절하시는지 더 구체적으로 적시한다. (메시지성경) ‘유다부터 시작할 것이다. 예루살렘 거주민들부터 시작할 것이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선민이다. 왜 세상이 부패하는가! 소금이 맛을 잃었기 때문이다. 왜 세상이 어두운가! 빛을 잃었기 때문이다. 최근 보건복지부의 발표에 따르면 ‘낮은 수준의 밀집도를 유지하면서 방역수칙을 엄격히 지킨다면 대면예배 자체가 감염 위험도를 높이는 행위는 아니다’ <대면예배 감염 위험 사실상 없어> (2021.2.1. 아시아경제신문) 이와 달리 여론조사에 따르면 국민들은 ‘교회발 감염’을 43.7%로 과장해서 인식하고 있다. 이런 현실에 대해 ‘교회를 향한 지나친 비난과 과도한 규제’라고 억울해 할 일이 아니다. 스바냐의 주장에 따르면, 하나님의 심판이 ‘남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에게서 시작된 것처럼, 하나님께서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할 교회를 친히 징계하고 계신다. 한마디로 재앙의 목적은 한국교회의 회개다.

▶ ‘바알의 남아 있는 것을 그곳에서 멸절하여’ 그곳은 ‘남 유다와 예루살렘’이다. 거룩한 땅과 거룩한 처소에서 바알을 섬겼다. 바알은 풍요의 신 맘몬(Mammon)이고 ‘그마림’은 바알을 섬기는 제사장이다. ‘맘모니즘’은 부요와 재물을 절대시하고 섬기는 ‘황금만능주의’, ‘물신주의’다. 우상숭배는 하나님 아닌 것을 하나님처럼 섬기고,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는 행위다. 한국교회의 과제는 물량주의와 성과주의, 기복주의와 성장주의라는 우상을 버리고 세속적인 가치와 구별된 거룩한 교회로 회복해야 한다. 교회를 대한 과도한(?) 행정조치는, 바벨론에 의해 예루살렘성전을 파괴하셨던 하나님이 한국교회에 집행하시는 강제조치다. (암5:3)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스라엘 중에서 천명이 나가던 성읍에는 백 명만 남고 백 명이 나가던 성읍에는 열 명만 남으리라 하셨느니라.’ 성찰과 자성으로 거듭남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② (5절) “무릇 지붕에서 하늘의 일월성신에게 경배하는 자와 (여호와께도) 경배하며 여호와께 맹세하면서 (동시에) 밀감을 가리켜 맹세하는 자와”

▶ 선민이스라엘은 바알숭배와 더불어 앗수르의 이방종교 일월성신과 암몬의 밀곰(몰록, 몰렉)을 겸하여 섬기는 혼잡한 신앙에 물들었다. 다양한 문화로 전파되는 종교적 특성으로 인해 ‘종교혼합현상’은 불가피하다. 하지만 ‘혼합주의’의 문제는 신앙의 고유한 정신과 본래적인 가치를 상실하는 변질(타락)을 수반한다. ‘다신숭배’의 현상은 한 가정에 여러 남편과 아내를 두는 것과 같은 혼돈과 무질서를 유발한다. ‘다신숭배’의 본질은 자신의 유익만을 추구하는 이기심이다. 신앙의 본질은 ‘자기희생’과 ’자기부인’인데, 이는 타인을 희생시켜 ‘자기유익’을 구하고, ‘자기과시’의 수단으로 이용한다. 교회의 직분은 명예가 아니라 멍에(섬김)다.

▶ (신6:4~5)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하나님 한분만 하나님이심을 믿는 유일신앙의 메시지는 배타와 독선이 아니라 그 무엇도 하나님의 자리에서 그 누구도 하나님 노릇하면 안 된다는 ‘순전함(純全, integrity, 온전함, 진실함)’이다. 한국교회의 시대적 과제는 ‘순전한 기독교’의 회복이다. 선교의 다양성을 명분으로 ‘세속적인 친교나 사회봉사 등’의 부차적인 일에 몰두하는 것은 ‘말씀과 기도를 제쳐두고 공궤를 일삼던’ (행전6:2) 초대교회의 과오를 반복하는 것이다. 신명기 말씀으로 바알산당과 이방종교를 척결했던 스바냐와 요시아의 종교개혁은, ‘오직 말씀’으로 타락한 중세로마가톨릭교회를 갱신했던 루터의 종교개혁과 그 맥을 같이 한다. 한국교회는 ‘다시 말씀으로 돌이키는 것’ 외에 다른 길은 없다.

 

③ (6절) “여호와를 배반하고 좇지 아니한 자와 여호와를 찾지도 아니하며 구하지도 아니한 자들을 멸절하리라”

▶ 스바냐는 멸절의 대상자를 더 구체적으로 적시한다. ‘여호와를 배반하고 좇지 아니한 자’의 실상을 예수께서는 산상수훈의 결론에서 명확하게 밝히신다. (마7:21~23) ‘나더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그 날과 그때는 ‘여호와의 날’이다. 겉으로는 ‘주의 이름’을 부르며 속으로는 ‘불법’을 자행한 자들이다. ‘배반’은 ‘배교’다. 박해와 핍박에 대한 반응은 ‘배교’와 ‘순교’로 나타난다. 모래 위에 집은 지은 자들은 그날에 ‘배교’를 선택하지만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자들은 기꺼이 ‘순교’를 선택한다. 대부분의 경우 반석위에 집을 짓는 것을 선호하지만 모래 위에 집은 짓는 것을 선택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이 없는 까닭에 말씀대로 준행하기 위한 고난을 감수하지 않기 때문이다. 고난 없이 영광도 없고, 십자가 없이 부활도 없다. 눈물로 씨를 뿌리지 않고 씨를 뿌리는 시늉만 했는데 어찌 풍성한 열매를 바랄까!

▶ ‘여호와를 찾지도 아니하며 구하지도 아니한 자’ 중심은 위기의 순간에 드러난다. 믿음의 진가는 평상시에는 드러나지 않는다. 삶에서 만나는 위기의 순간에 ‘무엇을 의지하는 지, 무엇을 신뢰하는 지’가 입술의 고백(말)으로 드러난다. (롬10:9~13)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라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을 얻으리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사람은 위기의 순간에 자신이 의지하는 대상을 찾고, 자신이 신뢰하는 대상을 구하기 때문이다. 스바냐가 전하는 ‘여호와의 큰 날’은 예수께서 전하신 ‘비가오고 창수가 나는 날’이다. ‘그 날’은 우리의 숨은 공력이 만천하에 드러나는 날이다. 지금 우리는 전대미문의 재난을 통과하고 있다. 지금 이 순간은 ‘알곡’인지 ‘쭉정이’인지 그 실체가 판가름 나는 때다. ‘겉만 번듯한 쭉정이’는 바람에 날리는 겨와 같이 날리겠지만 ‘속이 꽉 찬 알곡’은 썩어져서 마침내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이것은 성경과 역사 속에서 언제나 변함없는 진실로 입증된 진리다.

김명섭 kimsubwa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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